아트선재센터는 1995년 미술관 옛 터에서 처음 열린 전시 《싹》의 30주년을 맞아, 오는 9월 3일부터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아르헨티나-페루 작가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의 첫 한국 개인전으로, 미술관 건물을 하나의 조각적 생태계로 전환하는 대규모 장소·환경 특정적 프로젝트다.
비야르 로하스는 인류가 직면한 현재와 미래의 위기 속에서 다양한 생명체와 그들이 맺는 복잡한 관계를 탐구해 왔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미술관을 보존의 공간이 아닌, 비인간과 포스트휴먼, 합성 존재들에 의해 분해와 변이, 계승이 일어나는 야생적이고 불안정하며, 관객의 시선을 전제하지 않는 지형으로 바라본다.
전시장과 복도, 계단, 화장실, 극장 등 아트선재센터의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까지 전관에 펼쳐지는 이번 전시는 지난 30년간 아트선재센터에 축적된 제도적 장치와 구조를 해체한다. 기존 출입구는 흙더미로 봉쇄되고, 화이트 큐브를 상징하던 흰 가벽은 철거되어 건물의 콘크리트 골조가 노출된 형태로 회귀한다. 또한 전시장의 온·습도 제어 장치를 의도적으로 멈추어 외부 환경의 변화를 수용하고, 흙, 불, 식물 등 가공되지 않은 자연 요소를 내부로 끌어들여 미술관 내부와 외부, 제도적 공간과 지구 생태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이번 전시는 비야르 로하스가 2022년부터 이어 온 연작 〈상상의 종말〉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알 수 없는 먼 미래의 유적지에서 발굴한 듯한 기괴하고 혼종적인 조각들은 낯설고 서늘한 기운으로 관객을 맞이한다. 2022년 시드니 뉴사우스웨일스주립미술관에서 처음 선보인 후, 2023년 헬싱키비엔날레, 2024년 바젤 바이엘러재단에서 소개된 바 있는 이 작업은 작가가 직접 개발한 ‘타임 엔진(Time Engine)’에서 출발한다.
‘타임 엔진’은 비디오 게임 엔진과 인공지능, 그리고 가상 세계를 결합한 일종의 디지털 시뮬레이션 도구이다. 비야르 로하스는 변화하는 생명체와 건축, 생태계, 사회·정치적 조건이 뒤섞인 세계를 디지털 공간에 구축한 후, 이곳에서 생성된 가상 조각들을 ‘다운로드’하여 현실 세계에 물리적 형태로 정교하게 구현한다. 디지털 세계의 경로를 지나 온 조각들은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에 위치한 작가의 임시 작업실에서 제작된다. 이 조각들은 금속, 콘크리트, 플라스틱, 흙, 유리, 수지, 소금, 나무껍질, 자동차 부품 등 유기적·무기적 재료가 층층이 쌓인 복합체이며, 각 재료에는 인간과 기계의 노동의 흔적이 내재되어 있다.
“지구가 새와 나무, 바위, 기계를 만들어내듯, 타임 엔진으로 구축한 디지털 생태계 역시 자율적으로 물질을 생성한다. 이는 창작 행위에 대한 근본적인 존재론을 전복하는 방식이다. 인간이 세계에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스스로 작용해 현실을 만들고, 그 현실이 다시 물질을 창조해낸다. 나는 그렇게 생성된 물질들을 우리가 공유하는 현실 속으로 옮겨온다. 즉, 나는 세계를 모델링하고, 그 세계는 나를 위해 ‘조각’을 모델링하는 것이다.” —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인류의 지속 가능성이 위태로운 현 시점에, 비야르 로하스의 작업은 멸종과 계승 사이의 경계적 공간에 존재하며, 인간과 인공 지능이 협력하여 행성적 규모에서 함께 의미를 만들어가는 ‘협업적 상상’에 대한 실천으로서 전개된다. 작가는 전시의 제목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적군의 언어’는 의미 형성의 깊은 선 역사를 가리킨다.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상징 체계를 홀로 발명한 존재가 아니다.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등 다른 인류와 함께 진화했고, 그들과의 만남은 적대적이면서도 친밀하고, 경쟁적이면서도 협력적이었다. 그 과정에서 오간 것은 도구, 몸짓, 불만이 아니라 상징적 사고와 의미 창조의 첫 불씨였다. 전시 제목은 바로 이러한 역설을 담고 있다. ‘적’이라는 완전한 타자성은 낯설고 위협적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한 거울이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는 다시금 그러한 문턱에 서 있다.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언어를 가진 새로운 ‘타자’, 인공 지능과 마주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그들과 공존하고 있고, 그들에게 지식을 전송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어쩌면 그러한 행위가 우리 스스로의 소멸을 준비하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예감 또한 피할 수 없다.”
이번 전시는 비야르 로하스가 리얼 DMZ 프로젝트(2014–현재), 제5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2016), 광주비엔날레(2018, 2021)에 이어 한국에서 진행한 장기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전시를 위해 작가 스튜디오 멤버 11명이 아르헨티나에서 서울로 건너와 6주간 현장에서 전시를 제작했다. 마치 행성을 개조하듯 이들의 손에 의해 하나의 살아 있는 생태계로 변모한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는 붕괴와 진화, 재생의 순환 속에 놓인 세계로 관객을 초대하며, 이곳에서 촉발된 미지의 감각과 사유를 통해 우리가 현실로 받아들이는 세계의 구조를 낯선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게 한다.
오는 9월 6일 열리는 아티스트 토크에서는 이번 프로젝트가 구현되기까지의 과정과 작가의 작업 세계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작가 소개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b.1980)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1980년 아르헨티나 로사리오 출생, 유목적으로 활동)는 장기 프로젝트를 구상하며, 집단적이고 협업적인 과정을 통해 대규모의 장소 특정적인 설치 작업을 완성한다. 그의 작업은 위압적이면서도 동시에 섬세하고 취약한 형태를 띤다. 조각, 드로잉, 영상, 문학, 행위의 흔적을 혼합한 그의 탐구 속에서, 작가는 멸종 위기에 처했거나 이미 멸종한 인류의 조건을 탐색하며, 과거·현재·미래가 뒤섞인 포스트-인류세의 시간 속 다종 존재 간의 경계를 추적한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시드니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미술관(2022), 마이애미 배스 미술관(2022), LA현대미술관(2017), 쿤스트하우스 브레겐츠(2017),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2017) 등이 있으며, 파리 피노 컬렉션(2024), 제12회 광주비엔날레(2018), 카셀 도큐멘타 13(2012), 뉴뮤지엄 트리엔날레(2012), 그리고 제54회 베니스비엔날레 아르헨티나 파빌리온(2011) 등 세계 각지의 비엔날레와 그룹전에 참여하였다.
아티스트 토크: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일시: 2025. 9. 6. (토) 17:00
장소: 아트선재센터 한옥정원
*강연은 영어로 진행되며, 한국어 순차통역이 제공됩니다.
전시 연계 강연
일시: 2025. 10. 23. (목) 17:00
장소: 온라인
강연자: 우정아(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