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심평의(虛心平意)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마음을 비우고, 마음에 아무런 생각이 일렁이지 않게 고요한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마음을 비운다는 게 무엇일까? 생각을 비우면 ‘나’라는 존재가 없어지지 않을까 조바심이 날 수도 있다. 항상 라디오의 윙윙거리는 소리 마냥 마음속에서는 감정과 생각들이 일렁였는데 그것이 뚝 끊겨버리면 어떻게 될까?
세상의 모든 것들은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해석은 우리의 ‘마음’, 즉 감정과 생각이 관장한다. 그 강도가 세지면 우리는 생각과 감정에 휘둘리게 된다.
정나라작가는 작업을 통하여, 우리에게 ‘비움’에 대하여 상기시켜준다.
<경계진 바다 , 5/5/5cm , 레진, 4월 2019년>
“나의 모든 작품은 비움으로부터 시작된다.
감정들로 가득 찬 사람들이 작품을 보며 명상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으면 한다.
누구를 미워하고 화로 가득 차있는 요즘 사회를 비판하기보다는
개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안 좋은 생각들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마음의 모든 것을 깨끗이 비워내고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객관적인 생각들로 채워나갈 수 있도록 돕는 매개체가 되기를 원한다.
작품의 뜻을 생각하기보다는
무념무상의 상태가 그 의미가 될 것이다.“ - 정나라 작업노트 중
투명하고 비어져 있는 그녀의 작업은, 여러 가지 자연 요소와 결합하였을 때 더욱 빛을 발한다. 따스한 겨울 햇빛이 그녀의 작업을 통과할 때, 작업은 저 멀리까지 확장되는 물빛이 될 수도 있고, 조용하게 재잘거리는 새들의 지저귐 같은 아름다움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렇게 그녀의 작업은 여러 시적인 요소들로 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담겨져 있다.
<물 조각, 20/10/10cm , 레진, 6월 2019년>
이처럼 작업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존재들도 투명하고 비어졌을 때, 모든 것들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의 여지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 작업적 메시지는 우리의 삶에도 투영시킬 수 있다.
많은 것들의 갈피가 보이지 않거나 혹은 많은 감정들로 물들어 있을 때 우리는 생각과 감정에 애착을 가져 그것의 기이한 보상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을 모두 내려놓았을 때에야 비로소 투명하고 맑은 우리 본인의 진정한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영감과 창조력이라는 힘은 그 투명성 속에서 밝은 햇빛이 어떠한 것에도 물들지 않은 물가에 내려앉은 듯, 아름다운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것이 바로 비움의 지혜이다.
<무게, 10/10/10cm , 레진, 4월 2019년>
비워졌을 때 우리는 온전히 아름답게 존재할 수 있다. 정화시켰을 때 우리는 스스로가 상상치 못하게 맑고 아름답다. 정화가 일어난 뒤에 다른 것들은 알아서 작용한다.
인생은 매 순간 정화를 이어가는 것뿐입니다.
- 이하레아카라 휴렌
정화를 시작하면 인생은 자연스럽게 열립니다.
- 호오포노포노 아시아
투명한 작업 위에 햇빛이 비추어 상상치 못한 새로운 작업물이 형성되듯 말이다.
모든 부정성과 이기적인 마음을 내려놓고 스스로를 정화시키면 새로운 문이 열리고, 새로운 길이 열린다. 그것은 모든 존재에게 통용되는 자연의 법칙이다. 삶이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삶은 모든 존재를 똑같이 사랑한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투명하게 존재할 때 사랑이라는 빛이 우리를 가장 아름답게 통과하여 스스로의 능력을 세상에 비추는 것이다.
<길 , 70/60cm , 천에 유화와 바느질 , 10월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