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화의 견고한 태도와 문제 제기
최혜민 (기획)

··· 그런데 이렇게 유형화된 판화의 개념이 자유로운 실천을 제한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동시대 현장의 창작과 소비가 특정한 내용과 형식에 정체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판화의 창작은 기술 탐구에 편향될 수 있고 소비는 진품 판화를 선언하던 시기의 관점에 머무를 수 있다. 이 경우 예술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제약 없이 수행하기 위해서는 견고한 틀의 근거를 비판적으로 점검할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매체 특정성에 대한 연구가 두드러졌던 모더니즘의 기획에서 만일 모더니즘 판화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재료와 기법만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을 것이다. 판화가 내적 비판을 통해 순수성을 가진다면 그것은 생산 기술만으로 치환되지 않는, 찍는 행위와 관련된 더 본질적이고 방대한 논의에 연관될 수 있는 것이다. 또, 판화를 규정하기 위한 대립항은 변할 수 있다. 구조주의적으로 다른 매체와의 차이를 통해 판화를 설명할 때 과거 비교의 대상은 회화였다. 두 매체의 차이는 예술의 대중화라는 판화의 사회적 기능을 선전하며 위계를 가지게 되었고 그릴 수 있는 것을 찍어서 가치를 더하는 상황이 찍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넘어서기도 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비교항은 디지털 매체나 매체 특정성을 해체하는 탈매체로 이동하였다. 그에 따라 복수성과 물질성에 관한 논의는 후퇴하였고 판화는 전형적인 매체로 회화, 사진, 영상과 함께 쇠퇴하거나 다른 매체와 융합할 것이라는 예측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요약하면 매체의 특성은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것이다. 매체 개념은 단일하지 않고 시대에 따라 달리 강조되거나 추가되고 축소되거나 전복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현장에서 이전과는 다른 것에 주목하는 작가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직관적으로 또는 경험적으로 창작의 도구를 새롭게 바라본다. 예를 들어, 일부 작가들은 아카이브 형식으로 모더니즘적 관습을 해체하거나 벽지와 패턴을 활용하여 역사적 담론을 인용하는 일에 프린트 매체가 가질 수 있는 객관적인 태도와 공적인 거리감을 이용한다. 디지털 프린트의 명징함을 신뢰하고 주장을 전달하기 위한 강력한 도구로 사용하기도 한다. 다른 작가들은 이미지의 동시대적 성격을 확인하고 프린트 매체의 새로운 사용처를 제안한다. 이질성, 균열, 편집을 비롯한 데이터의 조형성과 프린트의 편재성을 근거로 디지털 문화를 반영하는 핵심적인 매체임을 명시하는 것이다. 나아가 물질부터 가상의 조형까지 판화가 가질 수 있는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경계 없이 활용해 확장된 자아와 형식을 향유하기도 한다. 한편, 표면을 이미지로 전환하는 매체의 독자적인 기능을 활용하여 찰나적 대상을 기록하고 불가역적 시간성에 대해 고찰하기도 한다. 실재하는 것에 존재를 귀속시키기 힘든 디지털 시대에 역으로 대응하는 것인데, 어떤 이들은 그것을 위해 매체의 물리적 속성에 집착하기도 한다. 판의 각인을 촉각, 증상, 인지, 기억과 결부하여 비물질적인 현실에서 실존의 의미와 양상을 추적하는 것이다. 창작 현장에서 작가들은 전통적 관념의 타당성을 인지하지만 제약에서 벗어나려는 본능적인 욕구를 마주하고 동시대의 흐름을 체감하며 미술사의 연장선에서 프린트 매체의 개념을 재고안하고 있다.  

<검은 악몽의 집단치료>는 견고한 관념이 다 담지 못하는 작가들의 이야기를 조명한다. ‘검은 악몽’은 살아있는 자의 뇌를 악몽처럼 짓누른다는 마르크스의 문구와 판화에서 핵심적인 색깔인 검은색에서 유래한다. 과거의 실체 없는 관념의 망령이 현재에 작가들이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제한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집단치료’는 창작자 중심적인 태도로 동시대의 징후들을 확인하고 매체의 속성에 관해 함께 논하는 공동 연구 기획을 일컫는다. 예술론의 변천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개념은 해체되고 재구축될 수 있는데 그 과정에서 작가들의 주장은 변화의 계기였고 새로운 미술의 근원이었다. 그들은 누구보다 오랫동안 표현 도구인 매체를 마주한다. 비록 개인의 관점이 즉시 보편타당한 일반론으로 이어질 수는 없겠지만, 설득력이 미약하고 효용이 감소한 관습적인 틀을 재고하는 방편이 될 수 있다. 완전하게 새롭고 거대하지 않더라도 사소한 흥미와 의탁에서 시작한 실험을 통해 공동의 논의가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참여 작가들은 애증의 대상인 판화에 관해 생각해 온 바를 글과 작품으로 드러낸다. 그것을 통해 매체 연구에 종합적이고 역사적으로 접근하는 대형 전시를 보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실제 현실에 근거한 연구가 가능할 수 있다. 또, 자유로운 창작의 토양을 마련하여 새로운 실천과 논제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획이 들불이 퍼지듯이 작가들의 목소리 확산에 이바지하기를 바란다. 

프롤로그

미술의 매체 혹은 미디어는 빈번하게 사용되지만 느슨한 개념이다. 용어의 사전적 의미는 한자어 매체 媒體가 전달하는 물체 또는 수단이고 영어의 미디어 media는 중간 또는 목적을 위한 도구이다. 두 경우 모두 표현하는 사람과 수용자 사이의 작용을 매개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언어에 따른 의미의 격차가 적어 교차 사용과 이해가 용이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상황에 따라 달리 쓰이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용어 사전과 미술 교과서와 같이 일반적인 글은 작품의 재료를 중심으로 설명하는 편이다. 또, 미술을 말과 구분하기 위해 비언어적인 시각 매체로 기술하기도 한다. 정보 문화의 영역에서 대중 매체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문화의 설명이 미술에 적용되기도 한다. 이 경우 비록 팝아트를 비롯한 일부 실천의 내용과 형식이 밀접히 관련될지라도 특정 시기의 사례에 국한되는 것으로 매체 일반의 이해와는 분리해야 한다. 미술계에서는 매체와 미디어가 관용적으로 구분되는 것 같다. 매체의 경우 특수한 표현 방식을 가지고 독립된 장르로 인지할 수 있으며 개별 담론을 발전시키는 고유한 분야를 말한다. 미디어는 그 중 더 근래의 기술 분야를 특정하게 지시하며 과거와의 차이를 강조할 때 쓰인다. 구체적으로 컴퓨터를 활용하는 디지털 방식의 미술이나 탈주체의 담론과 연결되고 인공지능, 알고리즘, 빅데이터를 활용하는 최신의 경향을 편리하게 지시할 때 사용한다. 

매체로서 판화는 비교적 분명하게 통용되는 규정이 존재한다. 다수의 글과 말에서 간접성, 복수성, 진품성이 자주 언급된다. 간접성과 복수성은 물리적이거나 가상의 원형을 가지고 작업하는 매체 특유의 조형 방식에서 유래한 속성이다. 판화는 판으로 간주하는 것을 사용하여 간접적으로 이미지를 찍어낸다. 그와 같은 방법으로 여러 개의 결과물을 제작할 수 있어서 복수성은 간접성과 가깝게 연결된다. 진품성은 조형의 결과를 복수의 진품으로 간주한다는 내용이며 존재 형식을 전제로 한 예술품의 판단 기준이 된다. 여러 점의 작업물이 실용적인 목적으로 제작된 복사물이 아니라 특수한 창작 방법에 기인한 필연적인 결과물임을 확인하고 그것의 사회경제적인 가치를 선언하는 것이다. 상기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규정 형성의 배경이다. 그것은 시기적으로 그리기 중심의 미술에 판화, 사진, 영화와 같은 기술 매체가 더해지고 예술로 소비되면서부터이다. 공간적으로는 경제적인 성장과 국제적인 위상의 강화로 한국의 미술계가 활성화하고 예술품의 수요가 증가하여 공급이 필요하던 지역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언급한 간접성, 복수성, 진품성을 중심으로 사용자인 작가들과 연구자들이 매체의 가치를 주장하였고, 제도와 기관은 작품을 자율적인 장르로 분리하여 전시하고 소장하였으며, 판화는 순수 미술의 영역에서 감상, 해석, 교육될 수 있는 대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20세기의 정의는 지역과 문화별로 차이가 있지만 현재에도 유효한 듯 보인다. 조형 방식에서 추출한 매체 개념에 따라 사회에는 일종의 견고한 태도가 형성되었다. 우선, 작가와 연구자들은 공동의 탐구 대상과 가시적인 방향성을 가지게 되었다. 매체의 역할과 의의를 형식적 새로움에 연결하여 연구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것이다. 관련 협회와 학회에서도 만드는 방법과 사용하는 물질에 따라 판종을 구분하고 기술적인 측면을 분석하는 일이 낯설지 않다. 관람자는 작품을 감상하는 쉽고 편리한 틀을 제공받기도 한다. 전시의 작업이 판화로 인지될 때 태도가 결정되기도 하는데 적지 않은 경우 조형 방법과 과정에 대한 설명이 작품 이해의 주된 부분을 차지한다. 또, 미술 기관들은 작품을 분류하고 제시하기 위한 명확한 체계를 가진다. 가시적인 틀은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 오히려 강화되기도 하였는데 한 예로 디지털 프린트가 장르로 편입될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관련 협의체는 물리적인 판의 부재에도 지속되는 복수 제작의 가능성과 데이터를 이용한 간접적인 제작 방식으로 상황을 판단하였다. 그에 따라 작가들은 한정부수 표시와 서명을 비롯한 과거 물질 미술의 전통을 디지털 프린트 작업에 적용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반세기보다 더 이전에 판화의 매체 개념이 결정되었고 전시와 교육을 통해 미술 저변으로 확대되었으며 재생산되어 더욱 견고해졌다. ···

기획: 최혜민
참여: 박우진, 성하은, 윤동천, 윤예지, 이유진, 조유정, 최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