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지현정은 자신의 그림을 ‘마음을 반영한 하나의 방’이라 부른다. 성장기를 뉴질랜드, 미국 등지의 해외에서 홀로 보낸 작가는 오랜 타지생활 끝에 뒤늦게 돌아보게 된 자신의 내면을 고스란히 캔버스에 녹여낸다. 이방인으로 살아가며 고유한 감정마저 절제하고 외면해야 했던 작가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그의 굳은 감정을 되살리고, 다시 흐르게 하는 의식적 행위이다. 정동아트센터에서 열린 한국에서의 두 번째 개인전 <마음의 방>에서 그는 얽히고 설킨 줄, 그리고 그 줄에 매달리거나 물 속에 서 있는 무표정의 아이들이 사는 공간으로 자신의 내면을 표상한다. 이 작업은 ‘사적인 공간’이었던 작가의 마음 속을 누구나 와서 들여다 보고 갈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확장시키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는 과거의 기억과 감정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관점에서, 개인과 세계가 맞닿는 지점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파고들게 만드는 지현정의 캔버스는 차원의 매개물에 가깝다.

지현정 초대전 ≪마음의 방≫ 전시장 전경
<인터뷰>(LIM: 인터뷰어, JI:지현정 작가)
LIM: 전시 <마음의 방>은 작가의 자전적인 스토리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다르게 보면 본인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자 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전시라고 생각된다. 줄곧 미국에서 작업을 해왔던 입장에서 이러한 작가 개인의 이야기를 한국에서 풀어놓는 감회가 새로울 것 같은데, 소감이 어떠한가?
JI: 줄곧 한국에서 전시하고 싶었던 마음이 커서 너무 행복했다. 한국에서는 거의 첫 전시나 다름 없어서 과연 몇 명이나 올지 걱정도 많이 했는데, 소셜계정을 통해 알게 된 많은 사람들 중 실제 작품을 직접 보고 싶어서 온 관람객들이 많았다. 소셜계정으로 작품활동을 꾸준히 지켜봐 주시고 전시에 와주신 것에 대해 너무 감사했다. 또, 미국에서의 전시와 달리 한국에서의 전시는 ‘한국이기에’ 내가 작품을 통해 하고자 하는 말들이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되고, 또 더 큰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느꼈다.
LIM: 모든 작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요소가 있다. 무표정의 아이들, 길게 늘어뜨린 줄, 경사지고 무너진 천장과 벽, 그리고 그 틈새로 새어 나오는 물. 이 모두가 작가 개인의 심리적 상태를 표현하는 은유와 상징일텐데, 이러한 특정 메타포를 사용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그리고 이를 통해 구체적으로 어떠한 심상을 전달하고자 했는지도.
JI: 그림을 시작한 계기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들을 읽고 나도 무언가를 표현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뒤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림을 구상할 때도 이야기의 한 장면을 포착한 것 같이 묘사하고 즐겨 읽는 책 안에서 등장하는 메타포들을 가져와 사용한다. 내 그림에서는 물이 가장 중요한 메타포다. 모든 그림에서 물이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다. 물이란 감정인데, 물이 고이면 썩듯이 감정도 마음속에서 흐르지 않으면 결국 곪아버린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우리는 모두 물속에서 태어났지 않나. 그래서 물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도 있다. 결국 다시 기억 속 감정으로 돌아가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매우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무너진 천장이나 벽에서 물이 흘러 들어오는 것은 내면에 발생하는 균열 사이로 감정이 파고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때 방에서 줄이 내려온다. 이 줄에 아이들은 의지해 있거나 얽매여 있다. 이는 전래동화에 나오는 구원을 상징하는 ‘금동아줄’과 파멸을 상징하는 ‘썩은 동아줄’을 연상시킨다. 이를 통해 나는 나로 인해 구해질 수도, 또 철저히 버려지고 소외될 수도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LIM: 맨 처음 포트폴리오 계정에서 작품을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았던 건 화려하면서도 각자가 너무 튀지 않는 색채였다. 과슈의 특성 때문인지 색면이 무척 선명하고 견고한 느낌이었달까. 색채만으로 눈이 즐거웠던 적은 정말 오랜만이었던 것 같다. 그만큼 지현정의 작품 세계에서 색채는 매우 중요한 시각적 장치라고 생각이 된다. 이번 전시에서도 분홍, 보라, 연두, 하늘 등의 다채로운 파스텔톤 색채를 사용했는데, 각 색마다 함축하고 있는 의미가 있는가? 더불어 평소 색을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편인지, 그리고 작품에서 색이 실제로 차지하는 중요도는 어떠한지 궁금하다.
JI: 전략이라기보다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페인팅에 임한다. 페인팅을 할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물의 색깔을 정하는 것이다. 그림 속에서 물은 감정을 상징하기 때문에 즉흥적으로 정하는 편이다. 그 뒤 다른 색들은 보다 치밀한 판단에 근거해 사용한다. 이번 전시가 진행된 정동아트센터 에서 1층은 모두 2020년에 그린 작품이고 2층은 2018년도 작품과 2019년도 작품이 섞여있는데 비교해보면 위층의 색감이 좀 더 어둡고 차분하다. 작업 초기의 나는 지금보다는 마음속에 쌓여있는 감정들이 더 많았고 그 때문에 직설적이고 무거운 표현 방법을 택했던 것 같다. 지금은 그때보다 감정이 많이 정돈된 상태다. 작가노트를 읽었을 때 그 표면만 보고 너무 무겁고 우울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내가 그림을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마음의 평화다. 그림을 본 순간의 첫 느낌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평화롭게 다가오길 바라는 마음에서 지금의 화려한 색감을 쓰게 되었다.
LIM: 지현정의 작품들은 어딘지 모르게 한국적인 정서가 함축된 것처럼 느껴진다. 특히 멀리서 보았을 때 불화, 탱화와 같은 한 폭의 동양화가 연상되기도 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기는 하지만 작품을 감상한 관람객들 중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이 분명 있을 것 같다. 아마 여러 작품에서 보이는 2,3단 구도와 화면을 꽉 채운 요소들, 그리고 무엇보다 세필로 촘촘하게 그려낸 선 때문이라고 생각이 되는데, 혹시 유화로 동양적인 화면을 구축하는 것을 의도한 것인가? 아니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드로잉 테크닉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인가.
JI: 사실 동양적인 느낌을 의도한 적은 없다. 중학교 때부터 쭉 미국에서 지내와서 동양화를 접할 기회가 많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를 보는 사람들이 간혹 동양화 같은 느낌이 있다고 해서 생각을 해보니, 미국에서 한국소설과 일본소설을 굉장히 많이 읽었다. 텍스트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알게 된 동양적 세계관이 그림에 조금씩 묻어 나오나 보다.
LIM: 초기작부터 지금까지 계속 개인의 내면에 중점을 둔 작업을 해왔는지, 아니면 중간에 작품의 성격이 바뀐 것인지 궁금하다. 무엇보다 어떠한 계기로 ‘내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JI: 10살 때 혼자 뉴질랜드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옆에서 도와줄 가족도 친구도 없고 당연히 의사소통도 힘들었다. 그래서 항상 혼자였던 기억이 있다. 사실 당시에는 힘들다는 생각을 전혀 ‘안’했다. ‘안’했다고 하는 이유는 나중에 이때 내가 의도적으로 힘든 감정들을 억눌렀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계속 외국에서 지내면서 나는 겉으로 보기에 아무 문제도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정말 어느 날 갑작스럽게 모든 감정들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이유는 모른다. 그저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왜 이제 와서 갑자기 공허하고 우울한 감정이 드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었다. 그렇게 너무 힘들 때 접했던 것이 앞서도 언급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다. 거기서 이 구절을 읽었다. “나는 상처 받아야 할 때 충분히 상처 받지 않았다. 진짜 아픔을 느껴야 할 때 나는 결정적인 감정을 억눌러 버렸다. 그 감정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진실과 정면으로 맞서길 회피하고, 그 결과 텅빈 마음을 떠안게 되었다”. 하루키의 소설을 읽은 후 항상 절제된 감정이 주는 안정감 때문에 분노, 우울, 슬픔 등의 감정을 통제하며 텅 빈 마음으로 살아왔던 것을 깨달았다. 그 이후로 그림을 통해 그러한 지나간 감정들을 해소하고자 한다.
LIM: 과거의 감정과 기억들로부터 영감을 얻고 이를 위한 작업을 한다는 것이 매력적이다. 지현정의 작품들은 과거의 작가에게 바치는 헌정시 같다. 그동안 잘 살아왔고, 잘 버텼다는 의미로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 같은 것 말이다. 과거의 내가 어떠한 모습이었든, 그리고 어떠한 감정을 느꼈고 그것에 어떻게 대처했든, 그 모든 행위들은 ‘나 자신’이 했기에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다. 다만, 주관성이 너무 지나치면 대중의 수용도가 떨어지기 마련인데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 때 작업할 때 가장 염두에 두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개인의 내러티브를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있다면?
JI: 질문처럼 대중이 나의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리고 그로부터 어떠한 영향을 받는지는 내게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지금 현재라는 시간 속에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추억과 지나간 감정들을 간직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모두는 아닐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해줄 것이라 믿고 작업하고 있다. 마음과 감정을 주제로 하는 만큼 나의 마음을 먼저 열고 이야기를 시작하면 관람자들도 마음을 열고 그림을 감상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역시 갖고 있다.
LIM: 직접 쓴 전시 서문 중, 그리는 작업을 통해 ‘감정을 내주는 동시에 마음 속 평화를 얻는다’는 구절이 매우 인상 깊었다. 이 구절을 통해 작가에게 있어 ‘그린다’는 행위는 일종의 ‘수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조금 거창하긴 하지만, 지현정의 회화관이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작가 지현정이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아가 관객이 전시장에서 무엇을 보기를 원하고, 작품을 통해 무엇을 느끼길 원하는지 함께 답해주면 좋겠다.
JI: 사실 작업 초기에는 ‘나 자신’을 위해 그렸다. 일종의 자가치유적인 면도 있었고 그냥 단순하게 내 안에 있는 것들을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했던 거다. 그림이란 정말 일종의 수행 같아서 창작하는 동안의 정신적 수련과 그림을 그리는 동안의 육체적 수련을 하고나면 내적으로 단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서문에 적힌 또 다른 구절처럼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통해 의식 밑바닥에 내려가 내적인 혼돈을 마주하고 기억 속 지나간 감정들을 되새기’고 싶었다. 그렇게 작업을 하다 보니 나의 감정을 혼자서만 간직할 것이 아니라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나와 비슷한 과거를 겪은 타인과 공유하면 더욱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그림이 내가 나를 깨닫고 이해하게 되는 통로였던 것처럼 다른 이들에게도 그러한 역할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LIM: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작업 방향을 물어보고 싶다. 질문이 좀 많다. 개인 서사 위주의 작업을 계속 이어갈 것인지, 혹은 다른 주제도 생각하고 있는지. 또 한국에서 계속 머무를 예정인지. 그렇다면 추후 전시는 언제로 예정되어 있는지 전부 궁금하다.
JI: 당분간은 지금 이 주제로 좀 더 작업을 이어갈까 한다. 12월말에 예술의 전당에서 진행하는 아트페어에 참여할 예정이고, 다음 개인전은 내년 3월에 예정되어 있다.
LIM: 향후 새롭게 선보일 작품들도 기대해본다. 응원하고 있겠다.
드래곤과 아이들, 2020, 종이에 과슈
시간의 태엽을 감는 새, 2020, 종이에 과슈
나비, 2020, 종이에 과슈
마음의 방, 2020, 종이에 과슈
지현정(b. 1992) 주요이력 2020 <마음의방> 정동1928 아트센터 개인전 2020 <MvVO AD Art Show> World Trade Center, 뉴욕 (단체) 2019 <MvVO AD Art Show> World Trade Center, 뉴욕 2019 <Lab 11> Malamegi lab, 베네치아, 이탈리아 2019 <All Stars> Art Share-LA,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 2018 <MvVO AD Art Show> Sotheby’s, 뉴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