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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라고 쓰고 삶이라고 읽습니다 | ARTLECTURE

꽃이라고 쓰고 삶이라고 읽습니다

-카페 드 아미디, <피어나다, 삶>-

/Art & Preview/
by 쇼코는왜
꽃이라고 쓰고 삶이라고 읽습니다
-카페 드 아미디, <피어나다,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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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작가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모호함이 작품을 단순한 ‘그래픽’에서 ‘어딘가에 있는 현실’로 한 단계 올려놓는다. 그리고 ‘어딘가에 있는 현실’은 관객이 작품 속 인물에게 대입되면서 ‘현실’로 바뀐다. 그리고 전시가 끝나면 관객은 다시 원래의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겹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두 현실’ 속에서 관객은 자신의 감정과 몸을 저울질하며 자신의 현재 위치를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편견이 하나 있다. 할리우드의 엄청난 CG 기술에 감탄하면서도 그것이 미술 작품에 사용될 때는 묘한 이질감을 느끼는 것이다. 물론 그림을 손으로만 그려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생각 때문은 아니다. 그건 단순히 그래픽의 수준에서 오는 차이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는 의미에만 매몰된 작품들에 지루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현재 미술계에서 그래픽의 활용은 한참 뒤처져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찰흙 같은 그래픽 속 사람들이 올망졸망 움직이는 작품 같은 경우는 의미를 알 수 없어 작품 설명을 살펴보고 나서 그제야 아 그렇구나싶은 정도였다. 물론 다른 전시에서 본 대부분의 작품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번에 본 전시는 좀 다르다. 바로 꽃을 삶이라고 읽는 윤다은 작가의 <피어나다, >에 대한 이야기다.

 


<윤다은, 피어나다, , 2020>


 

윤다은 작가의 작품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꽃이 자주 등장한다. 여기서 꽃은 삶과 동의어다. 그리고 노을이 지는 시간과 밤이 오기 전, 딱 그 시간에 나타나는 붉은색도 보라색도 아닌 황홀한 색이 등장한다. 그 시간은 사람을 무장해제 시킨다. 누군가에게는 퇴근 시간, 누군가에게는 일어나는 시간, 또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는 시간, 혼자 캔맥주에 프레첼을 먹는 시간 모두가 담겨 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좀 더 관대해지고 좀 더 낙관적으로 변한다. 이 모든 것이 가리키는 바는 명확하다. 바로 현실과 상상의 구분을 없애는 것이다.



<윤다은, 무제, 2020>


 

내가 지금까지 디지털로 작업한 작품들에서 이질감을 느끼고 지루함을 느꼈던 것은 누가 봐도 저건 현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윤다은 작가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모호함이 작품을 단순한 그래픽에서 어딘가에 있는 현실로 한 단계 올려놓는다. 그리고 어딘가에 있는 현실은 관객이 작품 속 인물에게 대입되면서 현실로 바뀐다. 그리고 전시가 끝나면 관객은 다시 원래의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겹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두 현실속에서 관객은 자신의 감정과 몸을 저울질하며 자신의 현재 위치를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윤다은, 꽃밭에서, 2020>


 

작가의 작품이 유난히 눈에 띄는 건 바로 이런 부분 때문이다. 단순히 다른 디지털 작품에 비해 예뻐서가 아니다. 현실 속 관객들이 작품 속 인물들처럼 당당하게 서서 앞을 응시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전시회에 가는 이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물론 유명한 작가의 작품을 보거나 신기한 기술을 보러 갈 때도 있지만, 결국 현실을 다시 되돌아보게 하는 힘이 필요하기 때문에 전시를 보는 것 같다. 지친 삶 속에서도 똑바로 현실을 응시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땐 잠깐 작품 속 자신에게 걱정을 맡겨둔 채 현실에 다시 한번 몸을 던져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윤다은, What is life, 2020>


 

삶이 항상 20대 같을 수는 없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책임져야 할 일들은 많고, 감당해야 하는 것들은 늘어난다. 때론 부당한 대우를 받고, 몸이 예전처럼 따라주지 않기도 한다. 그게 마치 꽃이 시들어가고 썩어가는 과정처럼 느껴지지만, 적어도 윤다은 작가의 꽃은 지지 않는다. 작가는 작품 속 꽃을 보는 사람들에게 삶을 선물한다. 그리고 물리적인 시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작품 속에서 피운 꽃을 통해 관객들이 앞으로 살아갈 삶을 응원하고 있다.

 

꽃이라고 쓰고 삶이라고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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