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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거래 | ARTLECTURE

어떤 거래

-산티아고 시에라(santiago Sierra).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것 인가?-

/Insight/
by Celine
어떤 거래
-산티아고 시에라(santiago Sierra).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것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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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산티아고 시에라 santiago Sierra(1966-현재)' 그는 스페인 출신의 행위예술가이다. 미술이 사회와 연관되어 관계미학을 지향한 지 한참을 지났다. 그러나 미술은 언제까지나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따로 분리시킬 수는 없다. 이에 산티아고는 현재라는 공간성에서 인간이 막 다른 상황에 직면하였을 때 어떠한 행위까지 할 수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우리의 예술작업으로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란 없다. 우리가 작업을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술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며, 예술은 현실을 뒤따르는 무엇이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변화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믿음이 없다."

-산티아고 시에라-

 

<인간전시/산티아고 시에라/영국TATE MODERN 갤러리>

London U.K TATE MODERN 갤러리의 또 다른 인간전시.


 

현대미술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것이 아닌 때로는 기이한 현상(?)을 보이고 있어 관람자의 입장에서는 작품을 이해하는데 매우 낯 설은 감정으로 다가 올 때가 많다. 이는 초기의 미술은 종교성을 강요하기 위한(?) 평면성을 추구하는 회화와 이후 단면의 입체를 중요시하였던 조각으로 시작하여 문맹자들을 교화시키려는 하나의 수단이었으나, 현대의 복잡한 사회구조를 표현하기 위해 작가들은 그들만의 방법으로 회화의 평면성과 조각의 입체감을 뛰어넘어 장소의 특성 허물며 작품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때는 자연을 훼손하는 작품들에게 대해서는 많은 지탄이 있기도 했다. 자신을 표현하고 사회를 비판하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가는, 보는 이로 하여금 생각을 던져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불쾌감이나 매우 낯설게 다가와 이해하기 난해한 경우가 종종 있다. 오늘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예술가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현재 내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 시대의 예술가이다.



산티아고 시에라 santiago Sierra(1966-현재)

 


'산티아고 시에라 santiago Sierra(1966-현재)' 그는 스페인 출신의 행위예술가이다. 미술이 사회와 연관되어 관계미학을 지향한 지 한참을 지났다. 그러나 미술은 언제까지나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따로 분리시킬 수는 없다. 이에 산티아고는 현재라는 공간성에서 인간이 막 다른 상황에 직면하였을 때 어떠한 행위까지 할 수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더욱 존경하는지도 모르겠다. 산티아고의 작품은 때로는 예술의 표현 그 가치를 넘어서는 기이한 예술로써 이해하기 힘들 만큼의 거부감을 느끼는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예를 들면 쿠바의 한 거리에서 부량자에게 1달러를 손에 쥐어주고는 "당신의 자위행위를 촬영해도 괜찮겠습니까?"라고 묻고는 많은 이들이 지나다니는 대로변에서 부랑자가 직접 자위행위를 하는 모습을 촬영하기도 한다. 산티아고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주로 매춘부들이나 거리의 부량자들 그리고 빈민촌에 살고 있는 이들과 최저의 환경에서 노동을 강요받는 노동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는 그들에게 아주 적은 돈을 쥐어주며 정상적인 인간들이라면 할 수 없는 많은 행위들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산타아고는 왜 이런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그것은 바로 현재 자본이 전부인 이 사회에 대한 도전이며, 사회에 대한 정면적 비판인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일시적 행위들을 무심한 듯 흑백사진, 짧은 텍스트, 그리고 가끔은 비디오로 기록된다. 그리고 그의 작업은 다른 사람들을 퍼포머로 활용하고 보수를 지급하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기존 미술의 전통을 발전시키고 있다. 여기서 그가 작품을 제작하는 행위 즉 전개는 작업하는 장소의 경제, 사회적 현실에 대한 일종의 지표적인 흔적을 만들어 낸다. '산티아고'는 예술가로서 그의 조치에 대한 보수를 받고 그가 만들어내는 상황이 지닌 모순을 인정한 최초의 작가이며, 이 때문에 그를 폄하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 세계에서 자본을 이용하여 인간에게 그 본성을 착취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산티아고는 바로 이러한 모습을 표현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이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한국의 최저 시급 노동자들의 생존권 보장을 위한 시위하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담는 퍼포먼스를 비엔날레에서 보여주기도 하였다.


 

<사람에게 새겨진 160cm의 문신/ 산티아고 시에라/2000/SPAIN>


작품을 직접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6명의 고용된 사람에게 새겨진 250센티미터 길이의 문신/산티아고 시에라/1999/HAVANA IN CUBA>


 

산티아고는 스페인의 헤로인에 중독된 매춘부 네 명의 등 위에 160의 선을 문신하고, 헤로인 일회 분량의 가격인 67달러 정도를 지급하였다. 그녀들은 헤로인을 구입할 수 있다면 자신의 몸에 평생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는 행동을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다. 또한 쿠바의 하바나에서 고용된 6명의 부랑자들 또한 같은 모습이다. 어찌 보면 인간이 살기 위한 처절한 모습을 우리는 보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아니 삶의 밑바닥에 부딪쳐 있는 그들을 보며 할 말을 잃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가 영국의 TATE MODERN 갤러리에서 행하였던 '인간전시'는 참전 용사들과 남미의 여성 노동자의 모습이다. 그들은 작은 보수를 받기 위해 죄책감의 굴욕을 느끼며 갤러리 한쪽 구석에 서 있다. 산티아고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안기는 폭력에 대해서 어떤 사과를 하지도, 비판하지도 않는다. (산티아고가 고용한 이들에게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산티아고가 자행하는 예술적 폭력?을 의미함) 그러나 그는 자본과 힘의 폭력을 예술 영역으로 가져와 전시하고, 폭력의 희생자들을 도덕주의자처럼 보이도록 하는 부정과 이상화의 그림자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한다. 그의 작업은 우리가 자본의 틀과 그로 인해 생성된 계층의 틀이 만들어낸 경제적, 정치적 체제가 매우 난감한 상황으로 인도한 사람들의 고통을 인식하고 그들의 고통을 인정하기를 요구한다. 또한 그는 진보적인 자세를 취하면서도 실질적 변화 없이 억압적 조건을 비난하는 비판적 예술을 용인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이와 같은 조건에서 면제되는 듯한 예술 현장의 자기기만적인 믿음을 방해하기도 한다.


 

<68명의 사람들/산티아고 시에라/2012/ 한국 부산>

 

 

프랑스의 유명 큐레이터인 니콜라스 부리오2010년대 초반부터 관계의 미학에 대하여 말하였다. 인간과 사회 그리고 예술의 관계. 그 경계는 어디까지이며, 그 의미는 무엇을 부여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또한 예술이라고 말하는 공간 속에서 행해지는 가장 생생한 부분은 상호작용적이며 상생적이며 관계적인 관념에 따라 전개된다고 말한다. 미술은 사회적인 관계를 통해 생산품으로 분류하는 통제된 공간들 속으로 인간관계를 통제한다는 의미이다. 즉 기존의 미술이라는 영역은 화이트 큐브라는 공간성의 제약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미술은 확장된 영역으로 그 미술관이라는 공간성을 뛰어넘어 우리의 곁에 있게 되었다. 미술학자들 사이에서는 부리오의 관계미학을 염려하는 이들도 있다. 그것은 사회 속 공공미술로 자리한 예술은 한 사람의 작가 개인 사상을 공공미술 속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공공미술은 많은 이들이 마주할 수 있는 공간에 자리한 미술이다. 버스의 디자인 또는 담벼락, 빌딩의 겉모습 등을 의미한다. 이것은 아무 생각 없이 작품을 마주하는 사람들에게 은연중에 작가 개인의 사상이 자연스럽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계미학에서 그 장소성을 뛰어넘어 미술의 한계에 대한 확장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전적 미술은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으며 그 알레고리를 쉽게 찾을 수 있었으나, 현재의 현대미술은 너무도 어렵다고들 말한다. 솔직히 미술을 공부하고 있고 미술을 강의하는 나 또한 그러한 생각에는 동의한다. 지금의 미술은 늘 우리들 곁에 있을 수 있으나, 가까이하기엔 너무도 낯선 세계의 전유물로 변하고 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지금까지 산티아고 시에라의 작품을 통해 우리 사회의 민낯을 들여다보았다. 나의 민낯은 점차 나이가 들며 화장하는 횟수가 적어진다. 그것은 나를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모습보다는 귀찮음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민낯을 바라보지 않고 내 얼굴의 결점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우리도 오늘은 나의 민낯을 거울을 통해 자세히 들여다보자. 나는 어떤 모습인가?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매우 큰 의미일 것이다. 글을 쓰는 동안 나의 반려견 쿠키는 내가 먹다 둔 아이스크림을 몰래 다 빨아먹었다. 그 달콤함의 유혹이 어찌 뿌리칠 수 있을까? 동물은 자신에게 해가 되는가의 여부를 가릴 능력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사고를 할 수 인간이므로 자신이 자행할 수 있는 한계에 대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밑바닥으로 내려앉아 당장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나 또한 의문이 든다.



<폴리우레탄을 뒤집어 쓴 10명의 노동자들/산티아고 시에라/2004/Lisson Gallery London, U.K.>

 

<Fragile - Sting & Stevie Wo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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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ine_문화와 예술을 사랑합니다. 글을 쓰며 행복을 느낍니다. 제가 소개하는 그림과 글을 읽으시고 한 분이라도 사랑 그리고 위안 또는 치유받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