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우리가 인생의 가을에 왔다고 말했죠? 난 아니에요. 내 인생은 여름이에요. 작렬하는 여름 태양의 에너지를 그대로 품은 여름. 난 여름이고 그러니 내가 떠날 시간도 여름일거에요.’
이름 모를 병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내면에 생명의 충만함을 느낀다던 여자는 자신의 말대로 여름처럼 살다 여름의 기운을 남기고 떠났다. 그녀가 마지막까지 삶의 에너지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예술가라는 호칭을 들을 만큼 빼어난 요리사였던 그녀의 음식을 함께 만들고 제대로 이해하며 먹어주던 단 한 사람의 존재, 그 존재가 그녀에게는 지속적인 에너지를 공급한 여름의 태양은 아니었을까.

영화 <프렌치 수프>는 일상적이고 사사로운 것들을 예술적으로 포착하여 섬세한 영상으로 그려내는 데에 뛰어난 재능을 지닌 베트남계 프랑스 감독 트란 안 홍의 작품이다. 사랑과 결혼의 본질을 말해보고 싶었다는 감독의 이번 작품은 정교한 프랑스 요리와 두 남녀의 관계, 이 두 가지를 중심축으로 삼고 있다. 또한 주인공을 맡은 외제니 역의 줄리엣 비노쉬와 도댕역을 맡은 브느와 마지멜이 과거 실제 연인이었다는 사실도 다양한 요리만큼이나 관객들에게는 흥미로운 지점이다.
사랑의 언어
도댕의 집에서 그의 개인 요리사로 20여년을 지내온 외제니는 당대 최고의 미식가인 도댕의 찬사를 받는 뛰어난 요리사이다. 도댕의 집에서 도댕과 그의 미식가 친구들과의 식사가 있을 때마다 그녀는 애피타이저부터 디저트에 이르는 모든 코스에 최상의 요리를 제공한다. 도댕은 하나씩 요리되어 식탁에 올라오는 외제니의 음식을 자랑스럽게 친구들에게 선보이며 그녀의 요리를 음미한다. 아니 도댕은 외제니의 마음을 음미한다.

그러던 어느 날 외제니가 실신하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한다. 아픈 외제니가 자신이 만든 스프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바라보던 도댕은 그녀가 수십 년간 자신에게 해주었듯 이번에는 자신이 그녀를 위해 요리를 하기로 마음먹는다. 아픈 그녀가 먹기에 편한 메뉴를 골라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만든 그의 요리를 맛보는 외제니는 그 음식들에 담긴 그의 정성과 사랑을 깊이 느낀다. 그 어떤 말로도 설득하지 못했던 도댕의 청혼은 그의 음식을 통해 마침내 이루어진다.
우리가 타인을 사랑한다고 할 때 정확하게 우리는 타인의 무엇을 사랑하는 것일까? 단순한 끌림의 단계를 넘어서 누군가와 인생을 함께 하고 싶다는 결심이 설만큼의 사랑이라는 확신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비포 선셋, 2004>은 9년 만에 다시 만난 제시와 셀린이 결국 사랑을 확인하고 서로를 선택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두 사람이 서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첫 만남이후 절대 회복할 수 없었던 두 사람만의 낭만, 타인을 통해서는 불가능했던 ‘나’에 대한 이해의 방식을 오로지 상대가 가졌기 때문이었다.
외제니와 도댕의 사랑은 철저하게 그들의 음식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 소통되고 공유된다. 말하자면 음식과 요리는 그들의 삶이자 그들의 본질이며 정수인 것이다. 오랜 세월 도댕에 대한 사랑을 마음속에 품고도 말로 표현하지 않았던 외제니는 사실 요리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사랑을 충분히 전했던 것이었고, 그녀를 위해 처음이자 마지막 만찬을 직접 만든 도댕의 요리역시 뒤늦게나마 그녀의 언어를 이해하고 그녀와 같은 언어로의 소통의 행위였던 것이다.
사랑은 자유하는 삶에 대한 인정
외제니는 도댕의 집에서 20여년을 살지만 그녀의 침실은 1층에 있는 도댕의 침실과 떨어져 2층에 별도로 존재한다. 미식계의 나폴레옹이라는 별명답게 프랑스 뿐 아니라 타국에서도 명망 높은 도댕 덕분에 외제니는 그와 그의 미식가 친구들을 위한 최상의 요리를 제공하지만 그들과 결코 합석을 하지 않는다. 도댕의 청혼을 받아들인 후 그와 사랑을 나누고자 선택했던 장소도 도댕의 방이 아닌 자신의 방이었다. 죽기 전 외제니가 도댕에게 물었던 질문은 자신이 그의 아내인지 요리사인지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이 가르키는 것은 무엇인가.

일찍이 레바논계 미국 작가였던 칼릴 지브란(1883-1931)은 결혼에 대하여(On Marriage)라는 시를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결혼상을 제시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결혼한 자들은 서로 사랑하지만 구속하면 안 되고, 함께 즐거워하지만 때로는 서로 홀로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서로의 마음을 주지만 그 마음속에 서로를 소유하려고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이 시에서 나의 눈에 든 것은 바로 이 ‘홀로 있음의 필요’와 ‘소유’라는 단어였다.
도댕과 외제니가 부엌에서 함께 요리하는 장면을 보면 그 누구든 두 사람사이에 깃든 잘 숙성되고 자연스러운 사랑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외제니가 도댕의 줄기찬 청혼을 거절해 왔던 이유가 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부정하거나 그의 사랑에 대한 의심에서 기인하지 않았음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녀에게 사랑은 도댕이 유라시아의 왕자를 위해 준비하려고 했던 뽀뚜푸(Pot-Au-Feu)와 같이 둘이 하나로 녹아들어가 있는 한 그룻의 요리가 아니었다.
외제니가 죽고 난 뒤 어린 수련생과 함께 고기요리를 먹으며 고기의 맛을 끌어올려주는 최상품의 와인에 대해 도댕이 설명하는 대목이 나온다. 외제니가 가장 좋아했다던 브르고뉴 최고의 와인, 샹볼뮈지니(Chambolle Musigny)에 대한 도댕의 설명을 듣다보면 관객은 자연스럽게 외제니가 떠오른다. 최고의 미식가답게 샹볼뮈지니가 지닌 미덕을 읊조리는 도댕은 분명 와인을 통해 외제니를 형상화하고 있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외제니가 원했던 역할, 즉 도댕과의 관계에서 그녀가 원했던 위치가 이 와인과 같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 볼 수 있다. 요리 자체에는 들어가 있지 않으나 요리와 동반되어 요리의 본질을 빛나게 해주는 최상품의 와인처럼 그에게 소유되지는 않으나 동반하는 존재, 자신의 본질을 지닌 채로 그의 본질을 수용하는 존재, 그의 사랑 속에서 자유롭게 그 사랑을 즐길 줄 아는 존재. 결국 그녀가 진정 원했던 존재는 배우자가 아닌 반려자로서의 위치 매김이지 않을까. 사랑은 소유하지도 소유당할 수도 없으며 사랑은 다만 사랑으로 충분할 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