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홍성연

테레즈 보니, 폴
푸아레가 자신의 패션 하우스 살롱에서 모델 르네와 함께 사진을 찍는 모습,
1927년, ARCP가 네거티브에서 찍은 포지티브 사진. The Bancroft Library,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소장
테레즈 보니, 폴 푸아레가 자신의 패션 하우스 살롱에서 모델 르네와 함께 사진을 찍는 모습, 1927년, ARCP가 네거티브에서 찍은 포지티브 사진. The Bancroft Library,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소장
스스로를 “나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예술가다(I am an artist, not a dressmaker.)”라고 말한 폴 푸아레(Paul Poiret, 1879–1944)는 코르셋으로부터 여성의 몸을 해방시키며 20세기 초 파리 패션계를 뒤흔든 혁신가입니다. 그는 현대 복식의 토대를 만들고 현대 패션 산업의 초석을 놓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었습니다.
당시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드로잉을 들고 패션하우스에 찾아가 디자인을 판매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이었다. 그 역시 이 방식으로 자신의 패션경력을 시작합니다. 1898년 쿠튀리에 마들렌 셰뤼(Madeleine Chéruit)가 그의 디자인 12점을 판매하고 같은해 자크 두세(Jacques Doucet) 하우스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디자인을 배우 레자느(Réjane)가 연극 자자(Zaza)에서 의상을 착용하면서 400벌의 의상을 판매될 정도였습니다. 이후 그는 오트 쿠튀르의 아버지 찰스 프레더릭 워스(Charles Frederick Worth)의 하우스에서 일하다가 1903년 지나치게 전통적인 장인 정신에서 벗어나 자신의 브랜드를 설립했습니다. 그는 곧장 코르셋이 없는 드레스를 선보이며 해방의 선구주자로 자리잡았습니다. 당시 마들렌 비오네(Madeleine Vionnet)와 폴푸아레는 하이웨이스트 드레스와 호블 스커트 등을 선보였는데, 그는 뮤즈이자 아내였던 데니즈 푸아레(Denise Poiret)가 그의 옷을 입고 파리 거리를 활보하며 홍보대사 역할을 한 덕분에 더욱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는 또한 작가들과 협업하였는데, 화가 라울 뒤피(Raoul Dufy)와 독창적인 프린트를 개발하고, 폴 이리브에게 〈폴 푸아레 의 옷들(Les Robes de Paul Poiret racontees par Paul Iribe)〉 카탈로그 디자인을 맡겼습니다. 패션디자이너이자 화가인 조르주 바르비에(George Barbier)역시 패션 일러스트로 아름다운 푸아레의 패션을 기록했습니다.
폴 푸아레, 상표, 1911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소장 / 드니즈 푸아레, 사진 인화, 1919. 팔레 갈리에라 소장/ 폴 이리베, 폴푸아레의 옷들, 팔레 갈리에라 소장/ 조르주 바르비에— 잡지 Les Modes 의 표지 , 1912년 4월 Paris, Manzi , 1912 장식 예술박물관 소장
푸아레는 패션을 단순히 옷으로만 홍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파티를 예술적 무대이자 패션 산업의 홍보 수단으로 활용한 최초의 디자이너 중 한 명이었습니다. 화려하고 파격적인 이벤트를 통해 자신의 디자인을 입은 모델과 예술가들을 한자리에 모았고, 이는 곧 패션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효과적인 전략이 되었습니다.
그는 1911년 여름 자택에서 천이일야(La mille et deuxième nuit)파티를 열었습니다. 저택은 페르시아풍 장식으로 꾸며졌고, 예술가와 배우를 포함한 300여 명의 손님이 초대되었습니다. 파란 차양과 도자기 분수가 놓인 안뜰, 그리고 이국적인 의상으로 가득한 연회는 파리 사교계를 열광시켰습니다. 이후 그는 La Celle-Saint-Cloud에 위치한 Butard 파빌리온을 여름 별장 겸 파티 장소로 사용했습니다. 1912년 열린 바쿠스의 축제(Les Fêtes de Bacchus)에서는 디오니소스적 분위기를 위해 대담한 의상을 제작했고, 이사도라 던컨이 테이블 위에서 춤을 추며 900병의 샴페인이 동이 틀 때까지 열기가 이어졌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장면은 단순한 사교 모임이 아니라, 푸아레의 패션을 직접 체험하게 하는 일종의 ‘살아있는 광고’였습니다. 이 푸아레의 파티는 사치스러운 향연이 아니라, 그의 패션을 각인시키는 효과적인 브랜드 전략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예술가들이 모이는 Mortigny 서클의 일원이 되어 파리 문화계와 끊임없이 교류했으며, 자신의 저택 정원에 야외극장을 마련해 연극을 공연하는 등 패션·예술·사교의 경계를 허무는 무대를 연출했습니다. 그의 패션쇼는 단순한 런웨이를 넘어 연극적 퍼포먼스를 결합한 새로운 형식이었으며, 이는 오늘날 패션쇼의 원형으로 평가됩니다. 그는 패션을 옷장에서 파리 사교계의 밤으로 확장시키며 옷을 입는 행위 자체를 사교계의 중요한 이벤트로 승화시켰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당시 파격적이었지만 매우 성공적이었고, 패션 산업의 홍보 방식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폴 푸아레, 의상, 1911년./ 폴 푸아레, 의상, 1919 모두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소장
그가 1911년의 자택에서 열린 파티에서부터 패션의 오리엔탈을 향한 사랑이 본격화되었습니다. 그는 발레 뤼스(Ballets Russes)의 무대 의상과 레옹 박스트(Leon Bakst)의 장식에서 영감을 받아, 페르시아·중동·북아프리카의 이국적 요소를 자신의 디자인에 적극 반영했습니다. 풍부한 드레이프, 대담한 색채, 그리고 전통적인 서구 실루엣을 파괴한 옷들은 파리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는 그를 단숨에 “패션의 황제”로 만들었고, 파리의 사교계는 그의 동양적 판타지 속에서 열광했습니다. 이는 전쟁 전 유럽 사회에 불안한 이념들이 소용돌이치던 시기에, 전 세계적인 혼란을 향한 그의 예술가적 대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적 접근은 동시에 허구와 오해에 기반한 것이었습니다. 유럽이 동양을 바라보던 시선은 두려움과 매혹이 뒤섞인 일종의 ‘타자성’에 불과했으며, 푸아레 역시 이 낯선 이미지를 미학적으로 소비한 데 그쳤습니다. 그의 오리엔탈리즘은 순수한 낭만적 환상이었고, 그것은 결국 시대가 원하는 현실과 점차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이 다가오면서 사회적 분위기는 급변했습니다.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열광은 교육 부족, 근거 없음, 허구에 기반한 현실 도피주의로 인해 전반적으로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민족주의가 강화되던 시대적 요구에 맞춰 프랑스 사회는 순수한 프랑스적 가치를 중시했고, 오리엔탈리즘적 화려함은 이질적이고 과도한 것으로 비판받기 시작했습니다. 대중의 취향은 점점 샤넬이 제시한 단순하고 실용적인 모던 스타일로 기울었습니다. 결국 그는 시대가 요구하는 현실적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고 패션사의 주류에서 밀려났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시도는 패션이 사회적·문화적 맥락 속에서 어떻게 타자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변형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으며, 이는 이후 패션이 예술과 사회를 교차시키는 방식을 이해하는 중요한 사례이자 현대패션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출처-
https://gallica.bnf.fr/ark:/12148/btv1b10023514d/f30.item https://www.bidoun.org/articles/a-persia-more-french
https://madparis.fr/Paul-Poiret-la-mode-est-une-fete
https://www.metmuseum.org/essays/paul-poiret-1879-1944
https://www.inha.fr/actualites/paul-poir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