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is Our Greenplace: 분노 이후를 상상하기展 - 존재의 지대
"폭정은 영원히 물러가고 자유, 특히 개개의 양심이 다른 의견을 존중하는 가운데 자신의 의무를 다할 수 있게 하는 인간적 자유가 회복되었다고 믿었으리라." -에밀 졸라-
우리에게서 분노와 슬픔 등의 부정적인 정서는 익히 자연적이고 만연한 반면, 기쁨과 즐거움처럼 긍정적인 감정은 언제나 찰나적이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일단은 우리의 필연적인 운명 태어나자마자 죽음으로 향하고, 다만 그 운명이 유예될 순 있으나, 결코 집행을 거스를 수 없는 죽음이 분노에 대한 하나의 이유가 되리라. 죽을 수밖에 없는 서글픔, 이에 우리의 기쁨은 때때로 허망함이 몰려온다. 하지만 운명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꼿꼿하게 일어서서 다시금 발을 내딛지 않던가. 그렇게 운명을 외면할 수 있다면 과연 분노는 어디서 비롯하는가. 이제는 세계와 타인들에게 눈길을 돌려보자. 세계에서 우리가 마음대로 제어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몇이나 될까. 갑갑한 세계에 대한 스스로의 한계에 분노하고 더욱이 세계, 그리고 타인들은 우리를 분노케 하지 않던가. 그들의 분노가 우리를 해하고 분노를 전염시킨다. 부조리한 제약들, 나를 옭죄는 통념들과 편견들, 그 파렴치한 시선과 말이 나를 침범하고, 세대에 세대를 거쳐 답습된다. 허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분노로 허송세월 보내기엔 너무나도 찰나다. 우리는 분노로 나와 타인을 해할 시간에 행복과 기쁨을 누려야 하리. 이 같은 분노의 가장 큰 축 중 하나는 이분법적으로 나뉜 성에 대한 사회, 문화적 기대감, 요구사항들이었다. 두 명의 신진 큐레이터로 구성된 독립 큐레이터팀 장동콜렉티브와 세 명의 신진 작가가 모여, 성별로 구획된 분노의 근원을 무너뜨리고, 그 이후를 본 전시를 통해 제시하고자 한다. 특히나 그 다섯 명의 구성이 모두 여성이자, 90년대생이라는 것이 눈에 띈다. 다만 그들은 다른 시선을 제시하고자 하지, 틀을 더욱 더 공고히 하거나 갇히려고 하진 않는다.
*이경옥 작가
전시 구성 상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이경옥 작가의 작품이다. 최근작 두 작품이 중앙에 배치된 2016년에 그려진 이전 작품을 에워싸고 있다. 세 작품은 시기 상 차이는 있지만, 분명 작가의 공통된 관심을 포착할 수 있다. 일단 배경이다. 중앙의 작품은 불교의 사천왕이 그려져 있으며, 그리고 사이드의 작품들은 거칠고 재빠른 수묵산수의 필치로 자연을 스산하게 구성한다. 이러한 배경의 세계는 숭고하다. 우리를 집어 삼켜버릴 것 같은 위협적인 의미에서의 숭고다. 그 공포의 이유는 매서운 눈초리로 우리를 쏘아보고 위축시키려하거나, 아니면 우리의 나약한 형체를 그 흐릿하고도 불분명한 자신들 내에 게걸스레 흡수해버릴 것 같아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최신 작품의 배경과 인물의 경계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편이다. 인물들을 살펴보면 세계가 그들을 쏘아봄에도 당당하고도 꼿꼿이 앉아있거나, 세계 속에서 태아처럼 웅크려서 유약한 느낌을 줌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사이즈로 그려지거나, 작다면 능동적으로 세계를 향해 뿌리를 내리고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자아를 집으로 풀어낸다. 집이 있기에 '나'를 보존하고, 만약 집이 부재한다면 전체성을 띠며 우리를 자신들 속에 획일화시키고자 하는 세계에 의해 휘둘린다는 것이다. 세계가 아무리 폭정을 부려도 우리는 집으로 도망쳐오며 스스로를 보존하고, 때로는 바깥의 위협 속에서 칩거한다. 이경옥 작가의 인물들은 그 집을 지키는 것이 아닌가. 세계의 분노 어린 시선에도 불구하고 평정심을 유지하고, 나를 흐릿하게 지워내려는 세계 속에서도 나를 거대하게 유지한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나만의 자유를 강조하는 철학자가 아니라 타자의 존재를 강조하고, 그들을 내 집으로 환대할 것을 주장하는 철학자다. 우리와 다른 생각을 갖고 다른 삶을 살아가는 그들은, 나의 판단과 사고, 인식으로부터 무한하다. 레비나스는 우리의 울타리를 높게 올리지 아니하고, 거기에 창을 내거나 넓힐 것을 주장한다. 이에 작은 집은 풍요로워지고 타자에 의해 우리도 무한으로 나아가기에, 그래서 우리는 타자들에게 뿌리를 내린다. 즉 분노란 세계와 타인이 우리 삶에 침범한 것에서 비롯할지 모른다. 허나 우리는 나를 지킴에 행복하고, 서로가 존중되고 환대함에 그래서 도약하기에 황홀하다. '나의 보존'과 '뿌리내림'이 바로 이경옥 작가의 분노 이후가 아닌가.
*김은지 작가
이 같은 이경옥 작가의 작품을 지나면 김은지 작가의 작품이 자리한다. 일단 작품은 바다를 펼쳐놓은 듯한 설치작품을 제외하곤 모두 회화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언뜻 의문이 든다. 앞의 두 작품은 조각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의 두 작품은 캔버스를 구기고 여기에 물감을 칠해, 마치 구리 내지는 동과 같은 질감을 낸 것이기에 회화라 할 수 있으며, 뒤의 두 작품은 명백히 보기에도 회화다. 다만 온당 사각 캔버스로는 느껴지지 않는다. 앞의 두 작품은 기존의 사각 캔버스가 구겨진 것이며, 뒤의 두 작품은 사각 틀이 눈에 띄긴 하지만 이는 화이트큐브 가벽과 이어져 있는 듯, 이에 가벽과 캔버스는 한 몸이요 오직 둥둥 떠 있는 것은 둥근 형체들인 것만 같은 착시를 준다. 이는 1950년대 후반 미국 추상표현주의에서 전개된 셰이프 캔버스(shape-canvas)를 연상케 한다. 본 사조는 사각으로부터 삼각, 원형으로 잘려지고 틀에 대한 하나의 해방을 선언한다. 다만 모더니즘 말기에 형식에서의 실험에 집중한 당대의 화풍과 달리, 김은지 작가의 작품은 오히려 내용을 눈에 띄게 만든다.
작품의 내용은 물이라 할 수 있다. 흘러내리는 질감과 청량하고도 광대한 채도의 색채, 그리고 다채로운 색채의 조화는 물의 가능성과 또한 오팔 원석을 연상케도 한다. 물이나 원석이나 그것이 품고 있는 가능성은 무궁무진하지 않은가. 특히 본 작품의 주된 색깔은 파랑이다. 추상회화의 대가 칸딘스키는 자신의 회화론에서 파랑을 마치 지상에서 해방된 높다란 하늘처럼 이상과 동경을 염원하는 상징을 지닌다고 논한 바 있다. 본 작품도 이 같은 파랑의 느낌을 보여준다. 특히 파랑은 하늘에 놓여있지 아니하고, 어쩌면 작품에 투영된 자신들의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 잠재력을 통념에 의한 사각 틀에 갇히곤 하지 않던가. 그 폭압적인 요구가 틀을 구기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편견과 통념에서 비롯한 분노가 새겨진 역사의 주름은 아닐까. 한편 우리는 또 다르게 생각해볼 여지도 있다. 구겨진 것이 왜 굳이 펴져야만 하는가. 애초에 처음부터 그랬다면, 그저 있는 그 존재를 그대로 둘 순 없을까? 마치 옆에 놓인 타원형의 작품처럼, 광대한 가능성을 품은 알처럼 그저 둘 수 는 없을까? 여하튼 우리 존재는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에 의해 제련된다. 하지만 되레 정제되지 않음에 우리의 가능성은 더욱 무궁무진 할 것이니. 김은지 작가의 분노 이후란 형태를 통해 있는 그대로 있을 수 있는 존재들, 그리고 이들이 지닌 무궁무진한 색채의 보존이 아닌가. 이에 우리는 스스로의 이상을 지켜내고 향함으로써 행복 할진저.
*강수지 작가
마지막으로 강수지 작가의 작품이 소개된다. 강수지 작가의 작품은 영상이다. 앉아서 감상할 수 있는, 그리고 전시 이후에 사유와 담론을 나눌 수 있는 정원과도 같은 자리는 두 큐레이터들의 의도가 담긴 공간이다. 강수지 작가의 영상에는 백자가 담긴다. 그녀의 이전 작품이 베일에 싸인 여성들을 포착한 사진작품이라는 것을 염두 하여, 이와 연관시켜 접근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전처럼 작품은 안과 밖에 대해서 논하는 듯 보인다. 백자의 외부는 순일한 순백의 경건한 아름다움을 선보인다. 특히나 이전 작품에서도 흑백을 선택하던 작가는, 본 영상작품에서도 흑백을 선택하여, 무채색의 극단적 대비 속에서 깨끗한 하양의 순수함을 더욱 강조한다. 흑백 속에 품겨진 백자는 어떠한 티끌도, 흠결도 용납하지도 품어내지도 않는다. 색채는 오직 하양이요, 표면은 이와 더불어 단단하고 변치 않는다. 돌이 비처럼 내림에도 불구하고 금가지 않는다. 다만 거대한 폭력에는 무너진다. 백자가 깨진다. 내부가 드러난다. 매끈하고 획일화된 과거의 백자와 달리, 거칠거칠하고 무수하게 변이되며 안과 밖이 공존하는 상태로 깨져버린 파편들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하지만 비로소 내부가 보인다. 우리는 백자의 내부에 대해서 관심도 없었고, 볼 수 도 없었다. 허나 표면 못지않게 무언가를 담아내는 내부도 중요한 영역이 아닌가.
사실 우리의 분노라는 것도 이와 일맥상통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표면만을 마주하고, 여기에 서로의 기대와 요구를 투영한다. 백자는 다만 순일한 상태를 요구받고, 어떻게든 지켜낸 것은 아닌가. 허나 그 폭압적인 요구들에 결국에는 깨져버린 것이 아닐까. 우리는 상대방 자체, 그리고 표피 너머의 내면에 관심이 있을까. 앞서 언급한 레비나스가 논하는 서로의 집을 존중하고, 다만 초대하고 초대받을 수는 없을까. 왜 굳이 폭력에 의해서 백자는 깨져야만 하고, 책임질 수 없는 그 이후에야 내면을 응시하는가. 그래서 깨짐이 분노로 얼룩진 상황이라면, 퍼즐처럼 다시 조합되는 장면은 분노 이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론에서 특정성별에만 천착되지 않고 모두를 아우른다는 정신이 바로 이 작품에서 집대성을 이룬다. 남성의 손과 여성의 손이 함께 화합하여 파편들을 다시금 엮고 빚어낸다. 폭력 이후는 결코 온당 이전과 같을 수 없다. 투박한 상흔이 느껴진다. 다만 그 백자는 이제 우리가 요구하는 아름다움만을 지닐 필요가 없게 되었다. 안과 밖, 모두가 드러나고, 여러 입구들이 생겨나 우리는 백자를 총체적으로 마주한다. 강수지 작가의 분노 이전이란 표면을 향한 요구와 폭력에 의한 파멸이라면, 분노 이후란 이면과 소통함에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맞닿은 손이 아닐까. 그 맞닿은 손은 더 이상 야만을 써내려가지 아니하고, 생명을 첩첩히 쌓아 올려나간다.
세계 때문에, 그리고 타인 때문에 우리는 분노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그들을 배제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면 과연 어떻게 살 것인가. 그것은 화합, 존중의 정신이 아닐까. 또한 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모두가 그 정신을 지녀야 할 것이다. 분노는 한발 물러서서 그것을 식힌다. 이에 평정심을 회복한다면 편견에 휩싸인 대상이 아니라, 투명하게 드러난 대상의 선연한 형체가 보일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존중하자, 우리는 마땅히 분노해야할 부조리에만 분개하자. 이에 서로가 살아가는 집을 존중할 수 있다면, 각자는 스스로의 내밀한 형체를 지켜낼 수 있지 않을까, 스스로의 찬연한 잠재력을 뻗어낼 수 있지 않을까, 서로는 상대방의 내면까지도 마주하고 생명력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90년대 여성들로 구성된 두 명의 큐레이터와 세 명의 작가들이 본 전시에서 논하는 분노 이후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균열은 봉합하고, 편견과 아집은 내려놓으며, 다채로운 서로의 존재를 그저 감싸 안으리, 만연한 분노에 평화는 거저 찾아오지 않지만 이 같은 서로를 향한 각고의 노력에 끝끝내 도래하리라. <글. 박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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