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 살아도 두려움의 색은 다르다. 그녀가 가진 두려움의 색이 세상을 먹먹하게 덮도록, 나는 해맑게, 이해하지 않았다. 작고 아담한 그녀가, 긴 머리와 조막만 한 얼굴을 가진 그녀가, 매일의 북적임과 매일의 밤길을 어떻게 견디는지, 차마, 생각하지 않았다. 내 삶도 벅차서, 혹은 귀찮아서 일부러, 그랬다. 소매치기들은 언제나 그녀의 가방만 노렸고, 번잡한 공간의 추행범들은 그녀 몸에만 손을 뻗었다.
“왜 너한테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위험을 잘 지나쳐 온 사람은 이유 따위 궁금해하지 않는다. 살아남은 이유를 궁금해하는 사람은, 위험을 그대로 들이받고, 죽다 살아난 사람들이다.
은빛 갑옷을 입은 그녀의 일상은 매 순간이 위협적인 게 분명하다. 머리꼭지부터 콧날을 타고 흐르는 은빛 곡선은 타인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상처를 입힐 수 있다. 머리카락에 감긴 칼날에 베이는 것이 비단 타인의 살갗뿐일까. 간지러운 콧등을 긁다 제 입술을 베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무장武裝해야만 하는 이유란 얼마나 서글픈 것일까. 구부정한 자세를 숨기기 위해, 조심성 없이 곁을 파고드는 사물들에 대항하기 위해, 붐비는 대중교통 틈바구니에서 밀고 들어오는 무례한 몸짓들을 물리치기 위해, 뒤통수 찌르르하게 떠들어내는 낯선 이바구들 사이에서 무수히 빚어지는 상처들을 가리기 위해, 갑옷은 필요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위험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방패旁牌다. 그러나 차가운 금속판에도 불구하고, 할 말 많은 저 눈빛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손에는 꽃이 들려있다.

이제 막 사춘기로 들어선 듯 바늘같이 뾰족한 소녀의 눈이 흑백의 세상을 흘겨보고 있다. 생의 한때는 모든 것을 비껴본다. 무엇도 똑바로 볼 수 없고, 밋밋한 젖가슴도 태산처럼 부담스러울 때다. 참 고약하지만 거부할 수 없던 시간에 우리는 나름의 살길을 찾는다. 화내고 길길이 뛰고 미친 듯이 웃으며 빛을 사랑하다 어둠에 길든다.
머리 앞뒤로 고정된 은빛 금속들이 마치 금관악기의 피스톤을 닮았다.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면 연약하지만 따끔한 통증의 소리가 높낮이를 달리하며 울릴 것 같다. 감각의 미세한 부분들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섬세한 기계. 악기인 듯하지만 실은 교정장치일지 모른다. 머리카락만큼 가느다란 바늘을 숨기고 우아한 듯 움직이는 몸짓 속에서 필요와 효율을 위해 가동되는 통제의 도구.
정신적 상처 혹은 흔적들을 실재적 오브제로 표현하는 작가의 작업은 인터뷰이와와 대화를 통해 구체적인 형태를 갖춘다. 단순한 표현뿐만 아니라 그렇게 구현된 장치(!)를 착용한 채 일상의 공간으로 들어간다. 일상 속에서 주고받게 되는 양방향의 영향이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작업의 진짜 의미, 내적 갈등의 외적 표현으로 소통되는 예술적 의미다.

가드를 올리고 머리를 숙이고 몸을 돌돌 말아 고치를 만든다. 가늘고 긴 금속으로 몸을 감싸 코끝 가슴 앞에 작은 공간을 만들고 비로소 나만의 숨이 쉬어질 순간, 확- 내 전부를 숨기던 공간을 펼쳐 타인의 영토를 부수고 빼앗는다.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차라리 두려움의 기원을 다르게 써보는 것은 어떨까. 안전하기 위해서, 그러나 너무 예민해서 무감각해지는 무해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그리하여 세상 속으로 완벽히 사라져 버리게 (너무 눈에 띄면 눈총에 맞아 죽을지도 모르니까), 차라리 먼저 선방을 날린다. 나를 알아보는 모든 것들을 없애면, 세상에서 나는 없어지고 세상은 나에게 무해한 공간이 된다. 무엇도 나를 위협하지 못한다.
적당한 거리, 당하지도 않고 해칠 수도 없는 거리의 사이가 되어 도시를 누빈다. 무해한 사람이 되기 위해 스스로 유해한 사물이 되어 사방의 접근을 차단한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은 맞는 말일까. 자신을 보호하려는 행위가 오히려 타인을 자극해 원치 않는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면, 갑옷은 보호구일까, 공격용 무기일까, 아니면 고립의 감옥일까.
서글프다. 우리의 간격이 적당함을 찾지 못한다. 뻗어 나온 촉수가 시리도록 부벼져 무뎌진다. 감각을 지키기 위해 벌인 거리가 우리를 고립시킨다. 감각은 오그라들어 부서지고 감정은 두려움에 뒤로 숨는다. 모난 돌이 정 맞을까 봐 제 손으로 사포질을 한다.

저 형형한 청춘이, 아직 죄를 지을 시간도 없었고, 욕망을 추구하려 해도 가진 욕망이 변변찮은데, 그래서 제가 무엇을 이고 있는지 모르는 얼굴로 서 있다. 앞선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는 당연한 무게가 부당하게 느껴진다. 한 치의 빈틈없이, 한 끗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느껴지는 무게. 이 짐들을 이고 계단을 오르는 영상 속 청춘이 시지프스의 노동과 다르지 않다, 비겁한 세대는 다가가 덜어주다 혹여 내 짐으로 옮겨올까 두려워 그저 눈으로만 바라본다, 더욱이 그 짐을 지워준 비겁한 세대라면, 조용히 입 다물고 옆으로 비켜난다, 가해자가 스스로 억울하다며 피해자 행세를 한다.

내 주관적 상태의 날카로움이 언제나 발을 잡아챈다. 못 이기는 척 길을 나섰고, 전혀 다른 결과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답을 뒤적이며 흐린 몸을 쓰다듬었다. 세상의 불편부당에 가시 돋친 밤송이 하나가 부암동 골짜기 지난한 길 위에서 스스로 껍질을 깠다. 내가 품은 가시가 너도 찌르고 나도 찌른다는데, 그걸 붙잡고 어리석게 부들거릴 필요는 없었다. 나의 감각을 누군가도 동일하게 감각하고 있다면, 위로를 받는다. 여전히 두렵고 위험에 예민해져 살갗이 부풀어 오르더라도 부대끼다 보면 굳은살이 되지 않을까. 나의, 우리의 속살을 단단하게 가르쳐줄 예술이 있는 한, 빨간 약은 존재하는 거지. 그러니 오늘 하루, 수고했다. 이제 갑옷은 벗어.
작가님께
찾아오는 길, 귀동냥 눈동냥으로 어찌어찌 오른 길 끝에서,
나의 감옥, 나의 형벌, 나의 휴식을 만납니다.
"뭉툭한 돌기가 돋아난, 위협적이지는 않으나
비우호적인 갑옷"을 입은, 나를 만나고 갑니다.
좋은 작품, 전시 감사합니다.
ps : 저리도 무거운 짐은
이곳에 차마 두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