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감시체제에 대한 유희적 전용
2-1. Pac Manhattan (2005)

<사진1> Pac Manhattan 사이트 이미지 (https://www.pacmanhattan.com/)
NYU 졸업생들의 작품 <Pac Manhattan>(2005)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도시전용을 떠올리게 하며 21세기 매체에 대한 유희적인 저항의 몸짓을 담고 있다. 특히 도시 공간에서 카메라에 대한 폭력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의 방법으로 게임을 선택한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은 수잔손택이 <사진에 대하여>에서 언급했듯이 사진의 폭력성은 마치 원주민들을 총으로 위협하는 것과 같이 위협적이다 라는 견지에서 출발한다. 휴대용 카메라에서부터 시작하여 정부와 기관들이 설치해 놓은 감시카메라, 지구 위를 떠다니는 위성카메라 들의 겹쳐진 카메라 화각의 범위 안에서 개인은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어디에서나 찍히고 기록되는 장소와 그 안의 개인은 스스로가 체험하고 만들어내는 주관적 장소를 창조하기 더욱더 어려운 시기에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점을 게임으로 전환시켜 도시 공간에 개입하기를 시도한다.
Pac-Manhattan은 GPS 기술을 활용하여 참가자들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추적하고, 게임 내의 움직임을 도시 공간에서 구현한다. 게임 참가자들은 팩맨 비디오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 의상을 입은 채 도시 현실 속을 전속력으로 달린다. 중앙 본부에서는 게임을 컨트롤하는 플레이어가 되고 도시 안에 행동하는 인물들은 게임 속 캐릭터가 된다. 게임 속의 움직임은 오로지 전화통화에 의존한다. 참가자들은 무선 헤드셋과 2G폰을 통해 서로 소통하며, 중앙 관제 시스템은 이들의 움직임을 모니터링하고 조율한다. 이러한 기술의 활용은 전통적으로 감시와 통제의 도구로 사용되던 GPS를 놀이와 창의성의 도구로 전용시키며 동시에 도시를 다르게 사용하는 것의 사례인 셈이다.
참가자들이 도시 공간을 달리게 함으로써 참가자에게는 게임 속 캐릭터가 되고 이 광경을 목격하는 도시인들에게는 생경한 장소성을 일시적으로 만들었다가 사라지게 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일시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참가자들의 움직임은 일시적 장소의 생성과 소멸이라는 의미에서 미디어가 벽면에 투사되어 현실에 개입하지만 곧 어디론가 사라져 버려 이동하는 성격을 지닌다. Pac-Manhattan의 게임 행위는 도시에 일시적으로 개입하고 사라지기 때문에 마치 미디어가 벽면에 투사되어 현실에 잠시 개입한 후 사라지는 미디어 파사드의 일시적 현상과 유사하다. 이러한 일시성은 도시에 잠시 존재하는 유토피아를 창출하는데, 이는 현실 속에서 실체를 찾기 어려운 이상적인 공간을 상징한다. 도시는 게임을 통해 잠시 유토피아적 공간으로 변모하고, 참가자들은 그 속에서 현실을 탈피하여 새로운 경험을 쌓게 된다.이 작품에서 전통적으로 존재하는 장소적 특징은 실제 공간과 게임공간의 혼재된 공간을 만듦으로 해서 도시에서의 새로운 장소성을 추구하는 도시 개입형 장소 특정적 작업이 된다.
2-2. 영화적 상상력 - 부재를 매우는 힘 <Street With A View (2008)>

street with a view 작품 이미지
미국작가 로빈 헤렛Robin Hewlett과 벤 킨슬레이Ben Kinsley는 구글어스가 제공하는 스트리트 뷰를 활용하여 실제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장소를 창조하는 작품을 제작하였다. 방식은 이러하다. 구글어스를 만들기 위한 차량(1)이 지나가는 정보를 미리 입수한 다음, 그 거리(장소)에 특정 퍼포먼스를 벌인다. 가령, 퍼레이드, 결혼식, 미친 과학자, 테러, 희귀한 조각들, 등 가상의 상황을 연출하여 사진에 ‘찍힌다’. 그 다음은 구글어스에서 제공되는 사진에 마치 특정 공간에 연출된 상황이 그대로 인터넷에 공개되게 되고 사람들은 특정장소에서의 사건이 진짜라고 믿는 것이다.
사진, 영화 등의 매체가 주는 허구적 진실은 시뮬라크르의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이 된 지금 그 자체를 진실로 바라보는 것이 허용된다. 구글어스가 위성사진을 제공하다 스트리트 뷰를 제공할 당시 많은 사람들은 개인정보 차원에서 반대의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반대의입장이며 노마디즘과 글로벌 네트워크 차원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한국에서도 벤치마킹하는 정도가 되었다. 이 위성을 거꾸로 활용하여 영화나 드라마의 허구세트와 같은 접근 방식에서는 불가능했던 없던 공간을 새롭게 만드는데 있어 기존의 감시카메라를 역으로 이용하여 매체 전용시키는 태도가 기발하다.
위성체제를 거꾸로 활용하기는 라캉 식의 표현을 빌려 저 너머의 감시시선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위치를 위장하는 방식으로 피하지 않고 얼굴에 마스크로 가리는 ‘얼굴가리기’혹은 ‘얼굴돌리기’의 한 종류하고 할 수 있겠다. 그룹 퍼포먼스가 바꾸어 놓는 새로운 장소성의 개념은 나중에 실제로 그 장소에 가보면 존재하지 않는 증발하는 허구의 장소특정성을 지닌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에서 거짓은 마치 판타지 같아서 존재하지 않지만 있을 것이라 믿게 되는 유토피아의 내면적 속성을 가지는 매력이 있다. 비록 인스턴트 음식처럼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휘발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라진 장소에 대한 끈임 없이 환영을 가지고 믿고자 하는 이러한 현상은 시각적으로, 또는 심리적으로 이미 초기 영화 시대부터 검증된 바 있는 ‘결여를 매우는 욕망’에 기인한다. 이것은 현대 시각매체시대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모든 현대인들이 심리적으로 겪는 공통된 감각이라 할 수 있다. 부재를 채우려고 하는 심리는 초기 영화 시대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초창기 활동사진 시기 사람들은 인물이나 사물의 일부가 화면에 잘려나갔을 경우 실제라는 사실로 착각을 하여 금기시 하였다고 한다. 화면에서 잘려나간 부재를 실제 존재 사이에서 존재의 유무를 두고 혼돈을 느낀 것이다. 뤼미에르 형제의 초기 영화 중에 고양이를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의 장면(2)이 있는데 이 장면에서 어린아이의 신체 일부가 화면 바깥으로 나가 있는 것을 보고 신체의 일부가 없어도 움직인다는 것을 당시 사람들은 매우 신기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로소 화면에서의 움직임에 대한 인식이 완벽한 생명체를 가진 것으로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잘려진 신체를 연장해서 상상하려는 욕망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독일의 미디어 미학자 랄프슈넬(Ralph Schnell)은 히치콕 감독의 <사이코>에서 젊은 부인이 목욕하던 중 괴한의 습격을 받아 칼에 찔리는 장면을 예로 들면서 촬영되지 않는 실재 신체의 부분들이지만 관객의 머리 속에 영화가 부재를 메우는 상상력으로 인해 더 자극적인 환상효과를 이끌어 내었다고 보았다.(3)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연상하게 하고 상상을 통해 실제 존재하는 것으로 지각한다는 상상력을 제일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바로 영화이다. 우리가 장소성을 만들어 가는데 있어 또 하나의 적지 않은 영향을 주는 것이 영화적 상상력이기도 하다.

<그림1 > 뤼미에르 형제 영화 개봉 포스터 <사진3> 영화 사이코 샤워 살인 장면
이러한 것을 입증해주는 좋은 예가 바로 세트를 만들어 찍기 시작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세트와 편집이 사용되기 이전의 뤼미에르 시대 초기 영화들은 배우들이 카메라 앵글 안에 안전하게 들어가 마치 무대 위에 연극하는 장면을 찍듯이 촬영했고 배우가 프레임 너머로 사라졌다 나타나는 것을 신기한 것으로 여겼지만 부재를 느끼고 나름대로 상상력을 터득한 다음에는 인위적인 조작을 가하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바로 편집의 시작이 된다. 가령 문손잡이를 잡은 샷이 나오고 그 다음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실내장면이 나왔을 때 자연스럽게 인물이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간 사실을 아는 것처럼 부재를 메우려는 힘은 영화만의 상상력이 되었다. 사진은 이미 멈추어진 명백한 진실이지만 영화는 움직이는 존재와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이 서로 동일하게 흐르고 있으므로 중간에 불연속적인 끊어짐(부재)이 있어도 이것을 이으려 하는 작용을 하게 된다.

부재를 메우는 상상력 (필자 그림)
부재(점선부분)을 상상력으로 메우려고 한다. 여기서 점선부분은 우리가 학습되어지고 경험되어진 정보들, 신체와 공간에 대한 기억 등의 복합적 역동성을 필요로 하며 부족하고 분절된 요소들은 몽타쥬를 통해 결합된다. 이것은 영화사에 연구에 기록된 몽타쥬와 별개로 우리의 지각작용에 기인한 생리적 몽타쥬에 대한 관찰과 연구를 필요케 하는 대목이다.
장소특정적 미술의 기술적 함정- 빔프로젝터 영사+미디어 파사드
장소 특정적 미술은 로잘린 크라우스가 언급한 포스트-미디엄 시대에 접어들면서 올드미디어를 대체하던 뉴 미디어적 영향력에 힘입어 강한 재현성을 가지고 미술시장에 등장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산업화와 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빔프로젝터의 소형화가 진행되면서 뉴미디어 매체들의 편재성은 오히려 재현의 리얼리티를 삭감해 가는 스스로의 모순에 걸려있다. 흔히들 전시장에서 보게 되는 사진과 영상을 이용한 장소성의 표현은 장소(스크린을 사용하는)와 재료가 동일하고 그 수가 증가되면서 패턴 화되어 어디서나 보게 되는 보편성 앞에 서 있다.
이러한 문제점의 시기에 요구되어지는 것은 유일하게 미디어 매체의 사용함에 있어 ‘기술우선 순위와 거리두기’를 하여 기술을 늘 선택해서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만을 취하는 방식을 취해야 한다는 점이다. 1970시대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 빅토 아콘치Victo Acconci, 브루스 나우만Bruce Nauman, 리쳐드 세라Richard Serra 등의 초기 비디오 작가들에게서 나타났던 나르시스적 경향과 신체집중현상을 살펴보면 무비판적인 매체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영화와 구분되는 독창적인 미장센을 연구하려 했던 의지에서 기술을 선택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롱 테이크로 이루어진 지루함과 사실주의에 대한 접근은 필름릴로 촬영하는 한계적 영화와 구분 지으려 했고 촬영과 함께 모니터링이 가능한 비디오는 테입 방식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러한 방식을 채택한 것이었다. 또한 그들이 주목했던 나르시스적 신체를 공간에 확장시켜 갤러리 공간을 벗어나려고 하는 장소성의 욕망 또한 내재되어 있었다. 기술의 선택 이면에는 반드시 이루어야 할 미학적 담론이 전제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최근 도시공간은 여러 장소성 들이 겹쳐 있는 구조를 띄고 있다. 영화관이 도시로 나오기도 하고 미술관이 도시로 나와 벽 한 켠에 작품을 틀어놓고 있기도 하다. 마치 카메라옵스큐라가 일시적으로 생성되고 소멸되는 일시적 장소특정성이 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건물에 레이져로 그래피티를 그리면서 도시 공간을 변화시키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4) 현존하는 공간 위를 백색으로 칠해놓고 몇 분전에 있었던 내러티브를 그대로 공간위에 덧씌우는 맵핑작업(Micheal Namark의 작업 <Displacement>)이 등장한다.(5)

Micheal Namark의 작업 <Displacement> 설치장면
물질적 현존 위에 얹어지는, 중첩되는 또 하나의 매질은 이중의 현실을 안겨주며, 빛으로 이루어진 거짓 현실이지만 시뮬라크라를 생성하여 우리에게 또 하나의 현실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하다. 장소 또한 하나의 이미지로 치환되면서 실제 장소와 가상의 장소가 혼재되는 방식이 일반적 양식으로 변화되는 경향을 보인다.(6) 이러한 현상은 산업자본주의에서 활용하는 광고성 이벤트로 전락해 버려 장소 특정적 미술의 효과적인 매체라기보다 순간 마술의 효과처럼 판타지와 스펙터클로 장소를 변장시키는 기술로서만 존재한다. 대기업들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건축 표면을 변화시키는 미디어 파사드의 형태로 표출되는 광고나 엑스포에 등장하는 미디어아트 쇼 등의 예가 그러하다. 장소 특정적 미술의 견해로 보아 이러한 매체의 편재성에서 오는 균일된 패턴은 선택해서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장소 특정적 미술의 범위에서 거리두기를 해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
프로젝션은 라틴어 어원으로 projectionem(pro+jacere), 으로 ‘전방으로 던지다, 확장하다, 영사되다’의 의미를 가진다.-이 의미는 이동, 전위(轉位), 전송을 가리킨다.(7) 참고로 LED로 이루어진 미디어 파사드는 광원의 방향이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 것에 비해 빔 프로젝터의 광원은 반대로 밖에서 건물의 표면 쪽으로 그 방향이 진행됨을 비교해 볼 수 있다. (아래그림)

Led와 Projector의 투사방향 비교 (필자 그림)
미디어 파사드에서 전달되는 언어의 방향성으로 보면 LED스크린의 경우는 IN→OUT, Projector 영사방식은 OUT→IN으로 진행됨을 위의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다. 관객이 보는 결과로는 둘 다 건물의 표면에서 나오는 이미지이므로 큰 차이는 없지만 프로젝터의 사용은 그 방향성으로 인해 빛이 건물 외벽을 완전히 감쌀 수 있는 맵핑의 구조가 가능해짐으로 건축의 외피에 덧입혀진 미디어 스킨에 있어 LED 스크린과 차이점을 가진다. 이 때 건물의 외피는 영화관 스크린의 역할을 하게 된다. 확장된 빛이 도달하는 스크린에서 느끼게 되는 또 다른 현실은 영화가 오랜 역사동안 우리에게 던져주는 사각형 프레임의 판타지와 닮아 있다. 확대된 옵스큐라인 시네마 건축에서 스크린이 내부가 아닌 외부로 오픈되면서 변화되는 관객의 환경은 신체의 자율성에 대한 유무로 그 차이점을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프로젝터를 활용한 장소특정성의 표현은 바로 이중적 재질의 모호함과 거기에서 오는 판타지 효과를 쉽게 효과적으로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만약 이러한 장점이 매너리즘이 된다면 장소특정성이 아니라 장소 보편성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2009년 9월3일~9월25일까지 국군기무사령부 터에서 열린 전시 ‘플랫폼 인 기무사(Platform in KIMUSA)의 예는 이러한 사실을 반증해준다. 유독 프로젝터의 사용이 많았던 이유는 바로 이 공간이 기존의 기무사가 지닌 역사성이 중요했고 그 공간에 대한 작가들의 재해석이 서로 이중의 레이어를 형성하는 효과를 내야 했기 때문이 아니 었나 추측해본다. 피터 바이벨이 2006년에 조심스럽게 언급한 뉴미디어의 특권이 희석되고 있다는 점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염두 해 두고 한 말이 아니었을까.
모든 장소 특정적 미술의 표현이 개입이나 저항적 성격을 가질 필요는 당연히 없다. 장소라고 하는 것은 이미 공간을 점유한 사람의 내적 추상성을 기반으로 한 유동성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장소특정의 선택에 있어서는 자율성을 보장받아야 함이 마땅하다. 어떤 특정한 장소에 맞는 재료를 선택함에 있어 모든 작업들이 프로젝터와 비디오 플레이어를 선택할 이유는 없다. 이러한 선택적 자율성은 외부에 의해 제도적으로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것이므로 더욱더 중요하다. 모두 프로젝터만을 사용하여 장소 특정적 작업을 하는 오류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새로운 대안적 미디어는 무엇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포스트-미디엄 시대의 중심에 서서 다시 한 번 되새겨 봐야 할 것은 과연 뉴미디어의 한계를 대체할 새로운 미디어의 발명이 이루어질 것인가?(8) 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이다. 여기에서 새로운 미디어라 함은 컴퓨터나 여타의 비디오 매체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폭넓은 선택권을 가지고 모색함이 이 시대의 예술가들에게 요구되어진다. 이러한 요구에 대해 장소 특정적 미술은 시대적 요구에 반응하며 계속 변화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장소 특정적 미술의 사유방식이 올드 미디어-뉴미디어-메타 미디어의 상투적 진행에 국한되지 않을 수 있다면 지속적인 사회 발전과 호흡을 맞춰 나 갈 수 있는 탄력성을 부여받을 것으로 전망한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문화적 경험이란 시장과 상품화 논리에 잠식되지 않은 주변부 문화를 통해서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포스트-미디엄 시대의 기술은 자본과 함께 예술을 생산기능을 담당한다. 특정한 장소에 대한 접근은 특정한 재료만이 가능할 것이다. 자본위주의 중심부는 보편적인 영역으로써 대량의 상품과 대량의 소비를 통해 존속해 나간다. 장소 특정적 관찰자의 자세는 이러한 보편성과의 거리두기를 통해 특정한 그 무엇을 찾아내야 한다.
장소 특정적 미술이 선택하는 장소는 이제 프로젝터, 비디오 플레이어 등의 세트화된 기술로 재현되고 있는 상업화된 또 다른 백색 공간White Cube에서 벗어나 ‘그 어떤 곳’에 대한 장소 특정성을 향해 다시 찾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찾아낸다면 그 사람은 일시적이지만 유토피아의 섬에 머무는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1) 한국의 다음지도, 네이버 지도가 제공하는 거리뷰와 마찬가지로 자동차 지붕에 360° 촬영카메라를 가지고 지도를 만들기 위해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촬영한다. 오픈되는 지도이기 때문에 대부분 개인정보가 최소화된 시간대를 찾아 촬영한다.
(2) http://www.youtube.com/watch?v=S1G6v4Ycmnk
(3) 실제로 이 시퀀스에서는 칼이 배우의 살을 찌르는 장면이 한 컷도 나오질 않았다.
(4) http://www.graffitiresearchlab.com/blog/projects/laser-tag/
(5) http://www.naimark.net/projects/displacements.html
(6) 혹자는 이러한 경향에 등장한 작가들을 일컬어 미디어파사드 크리에이터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7) 「Art and the moving image」, video projection; the space between screens . Liz Kotz p. 371
(8) 로잘린드 크라우스도 이 질문을 『Two Monment from the Post-Medium Condition』(MIT Press, 2006)에서 지속적으로 던졌지만 아직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