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래하지 않은 장면[1]
공간은 늘 경계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닫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벽도 틈을 품고, 분리되는 순간에도 어딘가로 이어진다. 나눔은 단절이 아니라 다른 세계를 여는 방식이며, 펼침은 그 틈 사이에서 스스로의 자리를 찾는 행위다. 이번 전시는 그러한 흐름 속에서 태어났다.
박그림은 파티션 위에 그림을 놓는다. 파티션은 보통 공간을 가르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또 다른 장면을 열어주는 장치가 된다. 그 위에 얹힌 이미지는 같아 보이나 다른 것, 분명 다르지만 또 닮은 것들로 짝지어져 있다. 생활의 기물과 작업의 재료가 교차하면서 경계는 무너지고, 보는 이는 익숙함 속에서 낯설음을 발견한다. 나뉘어 있으되, 동시에 서로를 비추는 관계. 그의 그림은 단절보다는 교차를, 차단보다는 반향을 품는다.
장승근은 작은 종이에 그린 드로잉을 차곡차곡 모아 나간다. 각각은 고립된 조각처럼 보이지만, 모이면 흐름을 이루며 커다란 장면으로 펼쳐진다. 그의 화면은 구체와 추상 사이를 오가며, 형상은 흩어지고 붓질의 운동성만 남기도 한다. 이는 최근 그가 경험한 물리적·정서적 고립의 풍경과 맞닿아 있다. 고립을 거부하기보다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다른 관계를 만들어내려는 태도. 파편으로 보이는 드로잉들이 모여 또 다른 질서를 만드는 과정은, 곧 삶을 다시 소화하고 재맥락화하려는 작가의 방식을 은유한다.
《나눠지고 펼쳐진》이라는 제목은 단순히 두 작업의 병치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서로 다른 길을 걷는 두 작가가 한 공간 안에서 나눠지고, 또 다른 방식으로 펼쳐지는 과정을 드러낸다. 나눠진다는 것은 개별의 언어와 시선을 존중하는 것이고, 펼쳐진다는 것은 그것들이 충돌과 반향을 거쳐 새로운 장면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전시는 완결된 결과물이 아니라, 이러한 과정을 드러내는 장면 그 자체로 머문다.
공간 역시 이 흐름 속에 놓여 있다. 이곳은 스스로를 전시장이라 부르지 않는다. 대신 생활과 작업, 결과와 과정이 포개지고 겹쳐지며 그때그때의 장면을 만들어 낸다. 전시는 그런 공간을 배경 삼아, 틈과 균열을 드러내고, 나눔과 펼침을 통해만 형체를 갖는다. 그렇기에 《나눠지고 펼쳐진》은 하나의 전시이자 동시에 하나의 사건,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과정이다.
나눠진 것들이 흩어지지 않고 서로를 비추는 순간, 펼쳐진 것들은 단순히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관계로 엮인다. 이번 전시는 바로 그 지점을 가리키려 한다. 경계는 완전히 무너지지도, 단단히 고정되지도 않은 채, 잠정적으로 열려 있다. 그 열린 틈에서 우리는 회화가 평면을 넘어서는 방식이 아니라, 평면이 공간 속에서 다시 작동하는 방식을 본다. 그리고 그것이 곧 생활과 작업, 고립과 관계, 파편과 확장이 교차하는 동시대적 조건을 비추는 또 하나의 거울이 된다.
정찬용
[1] “아직-도래하지 않은 배열”에서 하이픈(-)은 단순한 문법적 연결이 아니라 철학적 간극을 드러내는 표기다. 이는 ‘아직’(현재의 미완)과 ‘도래하지 않음’(미래의 불확실성)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적 긴장을 시각화한다. 들뢰즈나 데리다의 저작에서 종종 활용되는 방식처럼, 하이픈은 단어를 고정하지 않고 그 사이의 틈과 중첩된 의미를 강조한다. 따라서 이는 《나눠지고 펼쳐진》이 지향하는, 완결이 아닌 과정과 균열 속에서 열리는 장면과 맞닿아 있다.
☆Donation: 
UNOCCUPIED GAPS are a place where some substance or object can exist or where something can happen.
공간은 어떤 물질 또는 물체가 존재할 수 있거나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장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