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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 앤더슨(Roy Andersson), <끝없음에 관하여>(About Endlessness) | ARTLECTURE

로이 앤더슨(Roy Andersson), <끝없음에 관하여>(About Endlessness)

-무한, 과오와 현재의 대순환-

/Art & Preview/
by 박정수
Tag : #영화, #무한, #과오, #현재, #순환, #운명

로이 앤더슨(Roy Andersson), <끝없음에 관하여>(About Endlessness)
-무한, 과오와 현재의 대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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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1999년에 2000년대의 절망을 예고하고, 2010년대까지 변화하지 않던 역사를 포착하던 앤더슨은 여전히 과거와 현재의 길목에 서있다. 이제는 적나라하게 살인현장을 노출시키는 더욱 싸늘하고도 비관적인 시선으로, 2020년으로 변화 없이 넘어가는 2019년이라는 길목을 냉정히 조명한다....

2020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특집

영화제소개: https://artlecture.com/project/5140


"불가피한 죽음의 규정적 면을 넘어 자아가 타자로 스스로를 연장하는 '아버지됨' 속에서 시간은 자신의 비연속성에 의한 늙음과 운명에 대하여 승리를 거둔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인류가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난 원죄가 있다면, 그것은 성애도 아니요 악함도 아닌, 바로 우리가 탄생과 동시에 향해가는 죽음에 다름 아닐 것이다. 죽음은 까마득한 미지의 극한, 유한 너머의 끝없이 지속되는 무로서 우리에게 여겨지며, 이를 상상하는 것은 언제나 삶에 대한 허무와 까마득한 공포, 두려움을 일깨운다. 그 누구도 이 원죄를 거스를 수 없는 유한한 세계, 인류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낸 몇몇 시대와 역사도 이 인간과 함께 유한의 끝을 맞이했던 것처럼 보인다. 인류의 사멸처럼 특정 시대도, 이데올로기도, 가치들도 피상적으로 보면 종언을 맞은 것 같다. 허나 과연 그것들은 땅에 묻혔고, 또 세계는 과연 얼마나 달라졌단 말인가. 일례로 당장 파시즘의 상흔이 100년이 채 가시지 않았는데도, 그 영향력은 기만적인 탈을 쓰고 다시금 존재감을 과시한다. 지난날의 과오는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끝나지 않았다. 시대와 시대, 사상과 사상 간의 경계에 놓인 무수한 타인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사라져야 마땅할 망령들은 자신의 얼룩을 현재에 묻혀놓는다. 이에 새로운 천년이 시작됨에도, 지난 10년이 막을 내리고 새로운 20년으로 이행됨에도, 과거는 무한처럼 반복된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흘러왔고, 우리가 죽어서도 흘러갈 시간처럼, 결코 끝이 없어 보인다. 지난 천년과 새로운 천년의 사이, 1999년과 2000년의 사이에 스웨덴의 로이 앤더슨 감독은 <2층에서 들려오는 노래>라는 작품을 내놓았다. 사람들은 한 세기의 끝과 한 세기의 시작에서, 세계와 우리의 삶이 격동적인 방향으로 바뀌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시점에서 새로운 천년으로의 이행은 대단히 특별한 사건일지모르지만, 자연의 관점에서 그 이행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특별한 사건과 변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앤더슨은 20세기로부터, 더 나아가서는 근세와 중세의 과오들을 결코 청산하지 않은 채로 주저앉은 인류의 역사를, 2000년으로의 이행을 포착하였다.




 

*로이 앤더슨

이제 그는 2010년대에서 20년대로 넘어가는 그 이행 속의 무한을 포착한다. 1943년 태생의 로이 앤더슨은 잉마르 베리만과 함께 스웨덴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 중 한 명이다. <스웨덴 러브 스토리><길리압>에서 보여준 로이 앤더슨의 관심은 형이상학 및 종교, 무의식, 존재론에 기인한 욕망과 관계 등을 탐구하던 베리만의 관심과는 다른 유형이었다. 극적 전통에 놓여있던 베리만의 연출과 달리, 앤더슨의 연출은 리얼리즘에 가까웠다. 특히 <길리압>의 지독한 롱테이크는 타르코프스키나 앙겔로풀로스의 형식을 연상케 했다. 또한 세계에 대한 관심은 보편적인 군상을 바라보기 대신에 비교적 미시적인 개개의 초상에 집중하였으며, 특히 <스웨덴 러브스토리>에서 펼쳐지는 여러 유형의 인물 군상에서 이 같은 개인들과 거시적인 구조의 영향관계가 탐구되었다. 그는 <스웨덴 러브 스토리>를 통해 새로운 스웨덴 영화의 가능성을 증명하였지만, 한편 <길리압>의 흥행과 비평에서의 처참한 실패에 의해 약 25년에 이르는 길고도 긴 공백기를 가져야만 했었다. 마치 헤어 나올 수 없는 자욱한 동굴 안에 갇혀 있던 것과 같았던 공백기 동안, 그는 동시대에 전개되는 인간 시리즈의 모태가 되는 단편들을 내놓았고, 이후 2000년에 <2층에서 들려오는 노래>라는 장편 신작으로 복귀하였다. 이후 <유 더 리빙>, <비둘기, 가지에 앉아 존재를 성찰하다>로 이어지는 인간 3부작에서, 앤더슨은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인간은 결코 진전이 없으며 오히려 과거로 퇴보하고 순환되고 있음을 환멸적인 태도로, 마치 그들을 전시하듯 담아내었다. 그의 웃음은 따스하기보단 조소와 냉소에 가까우며, 삶의 희망을 놓치지 않듯 보이면서도 짙게 드리운 염세적인 태도를 감출 수 없다. 이 같은 조롱은 풍자화나 캐리커쳐의 영역을 영화로 옮겨온 듯한 앤더슨 특유의 영상미, 희멀건 회백색의 공간들과, 마찬가지로 얼굴에 허연 분이 칠해진 듯한 생기 없는 창백한 초상들을 통해서 수행된다. 그는 고정된 카메라를 통해 회화적인 영상미를 구축하고, 숏을 주로 롱숏으로 구성하여 공간과 인물을 유기적으로 포착한다. 이러한 연출은 대체로 플랑 세캉스로 펼쳐지며, 이렇게 정적인 숏 내에서 의지박약하고 우둔한 인간 군상들의 행동을 긴 호흡으로 집중한다. 그리고 이들은 이 고정된 프레임 바깥으로 나가려는 의지가 결코 보이지 않는다.

 

*비판적 거리 두기

그 게으르고 둔탁한 행태는 여전히 본 작품에서도 이어진다. 우둔한 인류의 모습을 형상화한, 희멀건 분을 뒤집어 쓴 것만 같은 파리하고 창백한 초상과, 어떠한 생기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풍경으로 이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상징화한 앤더슨의 미장센은 여전하다. 그리고 정지된 카메라 속에서 움직임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회화적인 프레임인 것도 유사하며, 이를 중앙구도 속에 배치한다는 것도 유사하다. 하지만 이전 작품들보다 더욱 숙연해진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이전 작품에서 그는 인류가 보일 수 있는 가벼운 실수나 추태를, 한심하지만 귀엽게 포착하곤 하였다. 하지만 본 작품에서 앤더슨은 더욱 염세적으로 변모하며, 그가 인류에게 갖는 일말의 긍정적인 감정은 거의 소거되다시피 했다. 이제는 노령에 가까워지는 앤더슨은 더 이상 일말의 경쾌함도, 가벼움도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더욱 냉엄히 암담한 현실의 정수만을 압축하여 보여준다. 또한 본 작품은 인간 3부작에 해당되지 않는, 그 이후의 작품이다. 그래서 유사성과 동시에 이전 작품들로부터의 변주가 분명 돋보이는데, 그것이 바로 나레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 본 극에서는 극에 목소리로만 등장하는 한 여인이 극의 외부에서 내부를 관찰하며 설명한다. 극의 내부에 담겨지는 인물들, 그들을 관찰하는 외부의 여인, 그리고 감상자의 세 단계의 차원이 나눠진다. 이렇게 겹겹이 나눠진 차원에 의해 감상자는 극의 내부의 인물들에게 직접적으로 감정이입하기 어려운, 그들을 매개하는 나레이터라는 벽이 생긴다. 오히려 관객이 스스로와 유사하게 느껴지는 것은 마찬가지로 관찰자이자 외부인의 입장인 나레이터로, 그녀처럼 대상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인류와 세상을 판단하게 된다. 이러한 외부에서의 나레이션 및 멀찍한 롱숏과 더불어, 본 작품은 내부의 인물들이 제 4의 벽을 뛰어넘고 외부를 향해 말을 내걸며,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브레히트적인 소격효과가 사용된다. 이를 통해 인물과 내가 물아일체 될 수 없는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며, 그가 펼쳐낸 인류사의 전시를 멀찍한 시선에서 가늠하게 된다.

 

*영화의 시간

영화 속 시간은 9월에서 시작된다. 본 작품이 처음 프리미어된 20199월의 베니스 영화제를 고려한 것일까, 이를 통해 시간을 동화시키려 한 것일까. 1999년에서 2000년을 바라보며 영화 속 시간이 허구가 아니라, 현실의 시간임을 환기하던 앤더슨의 경향은 2020년에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랴. 이러한 영화 내부의 시간은 롱테이크 및 플랑 세캉스를 통해 담겨져, 분절되지 않는 현실 속 시간의 속성과 더욱 동화된다. 그리고 이를 마주하는 감상자는 허구의 시간이 아니라 마치 현실 속 시간처럼 영화의 시간을 체험하고 파악하게 되리라. 그리고 그렇게 시간 속에서 체험되는 것은 '운동성의 부재'라 할 수 있다. 새로운 계절이 다가오며 변화를 예고하고 있지만 노령의 노부부로 보이는 두 인물은 이를 우두커니 앉아서 바라본다. 그리고 높은 고층빌딩 안의 한 여인도 그저 풍경을 덩그러니 서서 관조할 뿐이며,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영화 속 인물들은 이 같은 시간의 흐름과 흘러가는 세계를 나와 분리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앤더슨은 이 같은 무심하고도 게으른 태도가 곧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어진다는 것을 지적한다. 죽은 것처럼 보이는 나무에게는 관심을 보이지만, 한편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 한 여인이 포착된다. 그리고 다리를 잃은 참전군인을 바라보는 극 중 인물들의 태도는, 앞서 언급한 세계를 바라보는 무심한 사람들의 태도와 똑같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게으른 나에 의해 스스로의 발전만 도태되는 비운동성이 아니다. 마땅히 인도적인 관심을 표하며 움직여야할 상황 속에서도 인물들은 비운동성을 띠며, 이 무심함과 게으름에 의해 공동체 자체가 저무는 현실을 고발한다. 그리고 이 같은 인물을 보는 태도는 살아있는 대상이 아닌, 마치 허구의 연극이나 생명 없는 사물로 환원하여 바라보는 듯한, 이를 통해 삶에 대한 책임을 지워내려는 듯한 비인간적인 시선으로 확대된다. 2020년에도 반복되는 그리스도의 박해 행렬에서 감상자로서의 자신과 무대로서의 행렬을 분리하는 태도, 이를 통해 그를 외면하려는 비인간적인 시선이 강조된다. 박해를 마치 연극처럼, 거리 주위에서 이를 바라보는 행인들은 관객이 된 것만 같다. 하지만 이는 분명 가상으로 여겨지지 않는 현실이고, 이들에게선 분명 책임이 존재한다. 그리스도가 아닌 한 개인을 매질하고 수난하는 것을 말리지 않은 것에 그들은 분명 공모자다. 하지만 이 실재를 허구의 연극으로 여기는 그들에 의해 현실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불편한 현실은 반성의 차원으로 나아가지 아니하고, 허구나 거짓으로 환원되어 부정되고 외면되며, 이에 과오를 자각하지 못하는 의식은 악습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것이랴. 이 같은 연극성은 극의 중반부에서 포착되는 펍의 안과 밖을 기준으로, 내지인처럼 보이는 앉아있는 '관객'들과, 외지인으로 추정되는 음악에 맞춰 춤추는 '배우'들이 분리되는 듯한 장면에서도 포착된다. 박수를 치고, 그것을 받는 관계라는 점에서도 말이다.

 

*과오의 반복, 이어짐

한편 이 같은 연극성은 영화를 바라보는 우리인 감상자들과 영화 내부의 관계와도 유사할 것이다. 영화 속 날 것의 시간이라 할 수 있는 롱 테이크 내에서 어떠한 변화도 수반되지 않는 이유는, 바라보기만 할 뿐 개입하지 않는 무심한 나레이터에서 비롯하는 것이랴. 그래서 앤더슨은 단순히 바라보고 박수치는 관객의 차원에만 머물기를 바라지는 않아 보인다. 영화 속 인물들이 관객을 의심케 만드는 질문을 내던지고, 그렇게 답변을 사유함으로써 우리가 참여하게 되는 것처럼, 단순히 바라봄을 넘어서 현실에 개입할 것을 소격효과로 자극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 같은 소격효과를 통해 앤더슨은 관객이 놓인 현실의 차원과, 관객이 바라보는 허구의 차원의 경계를 허문다. 데뷔 이래부터 줄곧 리얼리즘을 강조해온 앤더슨은 단순히 현실을 풍자함을 넘어서, 가상과 현실의 벽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리얼리즘을 구현하는 것이랴. 이 같은 탈경계성은 현실과 가상을 넘어서서, 독립된 것처럼 보이는 영화의 숏들에서도 포착된다. 영화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플랑 세캉스, 하나의 숏이 하나의 시퀀스를 이루고 있기에 각각의 숏은 대단히 독립적이다. 한편 몇몇 숏들은 시각적으로는 분절적이지만 청각적으로는 이어지고 있다. 앞서 언급한 퇴역군인이 연주하는 음악소리가, 한 노파가 아이와 아버지가 함께 있는 사진을 찍어주는 숏으로 연결된다. 마치 후자의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관조적 태도가 전자에도 적용되고 있다는 듯이, 그런 식으로 종결되지 않고 무한히 이어지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수난 씬은 꿈이었는데, 한편 그 꿈에서 들려온 소리가 현실로 이어지며 마찬가지로 무한히 흘러온다. 이러한 차원 및 독립된 숏들과 더불어 시간도 구분이 혼미하다. 패전을 앞둔 히틀러를 재현한 숏은 과거처럼 보이지만, 그의 집무실은 무너질 여파만 보일 뿐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붕괴되지 않음에 역사가 종결되지 않는다면 이는 현재로 이어지는 것인가, 그것이 곧 무한히 이어질 과거인가. 패잔병들이 시베리아로 향하는 행군 또한 결코 끝이 보이지 않는다. 과거가 끝나지 않음에 무한히 이어지는 참담한 현실, 비극의 순환이라는 의미에서의 무한을 끝이라는 경계를 무너뜨리는 연출로써 보여준다. 무엇보다 히틀러와 행군의 역사는 앞서 언급한 제 4의 벽을 넘어섬으로써 상징화된, 곧 우리의 현실이다.



 

*본분상실

이렇게 꿈에서 포착된 그리스도의 고난 때문일까, 영화에선 그의 성혈에 다름 아닌 포도주가 더욱 강조되는 뉘앙스를 풍긴다. 영화 속 포도주는 두 층위를 갖는다. 하나는 본분과 본령을 다하지 않는 인물을 드러냄에 사용된다. 영화의 초반부, 식당에서 한 웨이터가 포도주를 따르는데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곳을 바라보며, 잔에 포도주가 흘러넘치는 실수를 범한다. 이후 포도주는 등장하지 않지만 대신 웨이터와 유사한 인물들이 반복된다. 박해행렬이라는 꿈에 지배당한 신부는 신도들을 이끌지 못하며 절망에 빠져있다. 영화는 이 신부와 신도의 관계를 중앙구도와 모서리의 소외된 구도로 대비하여, 그가 본분을 다하지 않아 버려진 듯한 집단의 대비를 일궈낸다. 이후 만나는 의사는 신부를 치료하지 못하며, 이후 다른 치과에서 만난 환자와 치과의사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환자는 고통을 치료에 수반되는 고통을 감내하기 싫으며, 이를 설득하지 않는 의사는 그저 방치한다. 그래서 포도주로 시작된 몇몇 직업군에 대한 논의는 역할을 지닌 인류가 본분을 다하지 않는 것을 상징하기 위함으로 확대된다. 이에 영화 속 초반부에 포착된, 자신의 돈을 매트릭스에 숨기는 남자가 생겨나는 것인가. 무능력한 인물들이 넘쳐남에 더 이상 서로가 서로를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로 자신의 피를 나눈 관용의 매개물인 성혈로서 포도주는, 그 정신이 망각되고 쾌락만을 추구하는 도취제로서만 작용한다. 포도주를 낭비하며 신부는 고주망태가 되고 오직 자신만을 연민어린 시선으로 바라봄에, 다른 인류들은 소외된다. 마찬가지로 와인에서 시작되어, 사물로서 샴페인을 좋아하는 것인지 그것을 따라주는 한 남자를 좋아하는 것인지 모호한 한 여인의 태도, 이미 죽어 사물이 되어버린 나무가 타 인류보다 중요해 보이는 한 여인 등, 포도주는 일련의 물신화로 인해 인류에게 작용해야할 아가페를 잃은 현실을 지적하는 상징이자 매개물이 된다.

 

*고립, 단절

이렇게 포도주를 통해서 드러나는 영화 속 관계는 단절이 강조된다. 제 역할을 다하지 않는 인물들에 의해, 다른 인물들은 방치되거나 추방된다. 그리고 스스로는 결코 반성하지 않거나 타인들을 질투한다. 한 남자가 우리에게 말을 거는 현재가 펼쳐짐과 동시에, 그가 이야기 하는 과거가 함께 공존하는 듯한 초반부의 기묘한 숏, 그 남자는 향후 시간이 흐른 뒤에 재등장하여 우리에게 진척되어야할 상황을 전한다. 하지만 그가 상대방에게 잘못을 용서구하지 않음에 과거는 끝나거나 극복되지 못하고, 현재에 반복되고 또 다시 침투하는 것이랴. 허나 그 태도는 여전히 개선될 줄 모르고, 오직 자신밖에 바라볼 줄 모르는 이기적 인물들은 자신만을 희생자로 만들며, 또 타인을 질투하기에 세계 속의 각자는 서서히 고립된다. 그리고 술집에서 마주하는 겨울의 눈 내리는 풍경과 성탄절, 계절과 해의 순환이 암시되는 그 시간에, 구성원들은 수동적으로 놓여있으며, 또한 그들의 대화는 형식적이고 고립되어 있다. 이 같은 고독과 외면은 작년에도 그랬을까. 그리고 영화는 극의 전개에 따라서 이 단절을 연출로서 더욱 강화하는데, 그것은 바로 페이드아웃이다. 플랑 세캉스이기에 숏 간의 유기성은 안 그래도 그 밀도가 낮은 편인데, 이음새를 더욱 투박하게 상실시키는 페이드아웃에 의해 더욱 분절적이고 단절된 느낌이 강조된다. 이 같은 페이드아웃이 가장 강렬했던 장면 중 하나는 바로 묘지에서, 전쟁에 참전하여 먼저 떠난 아들을 마주하는 노부부를 포착한 시퀀스였다. 본 장면에서의 페이드아웃은 아들과 대화하고 싶지만 결코 말을 전할 수 없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형식처럼 느껴진다. 과거로부터 극복되지 못한 야욕의 역사, 이에 의해 반복되어 나타나는 히틀러와 겨울의 행군에 의해 마땅한 삶이 죽음으로 갈라지며 개인들의 단절은 더욱 증폭되는 것이리라. 또한 페이드아웃을 통해서 분절된 숏들은 각자가 더욱 대비되며 강조되곤 한다. 사랑을 찾고자 헤매는 듯한 길 잃은 방랑자가 포착된 숏 이후에, 역으로 본인이 있어야 할 곳이 너무도 명확해 보이는 땅에 박힌 나무기둥과 포로의 모습이 포착된다. 그래서 전자의 경우 사랑은 필연적으로 떠돌아야만 하는 불확실성이 강조되는 반면, 후자의 경우 안착에 의해 확실한 것은 죽음과 고독임이 대비를 통해서 드러난다.

 

*희망, 나아감

한편 이 같은 숏의 구성이 언제나 암담한 현실을 드러내는 것으로만 작용하지는 않는다. 영화는 매치 컷을 이용해서, 두세 개의 숏들을 이어낸 이후 극복되어 가는 과정을 포착하기도 한다. 구두가 부러져 불편함을 겪는 한 여인을 바라보는 남자가 포착되는 장면에서는 무관심이 도드라진다. 이후의 숏에는 자신의 딸로 추정되는 여인을 명예 살인한 한 무슬림이 포착된다. 본 장면에는 칼이 있고, 숏의 화두는 전자의 무관심과 대비를 이루는 과도한 개입이다. 그리고 이후 다시금 칼로 매치 컷되어 수산시장으로 이어지는 숏에는, 이러한 무관심과 과도한 개입의 절충이 엿보인다. 한 여인에게 따귀를 날리는 남자를 타인들이 제지하는 것이다. 또한 사적인 사랑을 논하는 둘 사이에는 더 이상 개입하지 않는다. 더불어 버스 안에서 눈물을 흘리는 한 남자를 향해서 야유하고 냉대하는 숏이 펼쳐진다. 이후 흐르는 눈물의 속성과 유사하여 매치 컷되는 듯한 비가 내리는 장에서, 아버지가 아이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마치 그 슬픔을 극복하고 걸어가는 듯하다. 이 같은 장면은 곧 앤더슨이 본 작품에서 무한을 직접적으로 설파하는, 에너지는 사라지지 아니하고 다만 변화할 뿐이라는 질량보존의 법칙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이를 논하는 두 학생이 어떤 형태로 변하여 다시 만날 것이라 말하는 것처럼, 칼이 들려있고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어떤 상황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다만 그 형태만 바뀌어 지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앤더슨은 그것을 더 나은 형태로 변화하여 보존하고 지속해야 한다는 지론을 펼쳐내는 것이리라. 일련의 위트마저도 사라져서, 더욱 비관적으로 향해가지만 그는 그럼에도 희망을 아예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암막과 다를 바 없는 잿빛 하늘을 헤쳐 나가고 있던 두 연인, 그들이 날아가는 창공과 그 밑의 황폐화된 잿빛 도시는 별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연인은 아주 느린 트래킹 숏으로 포착되어, 무겁고 움직임 없는 세계와 달리, 어찌됐든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무관심과 냉대, 고독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다림에 끝끝내 해소될 수 있었던 한 여인의 외로움, 실재적인 행동에 우리의 현 상황은 진척되리라. 그가 본 극에서 숭고하게 포착하는 것도 재투성이 세계를 헤쳐 나가는 두 연인의 모습과, 결말에 차가 주저앉았음에도 이를 수리하며 펼쳐진 길을 향한 여정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한 남자의 초상이 아니던가. 그는 이러한 나아감을 포기하지 않는다.

 

*정리, 레비나스의 무한

1999년에 2000년대의 절망을 예고하고, 2010년대까지 변화하지 않던 역사를 포착하던 앤더슨은 여전히 과거와 현재의 길목에 서있다. 이제는 적나라하게 살인현장을 노출시키는 더욱 싸늘하고도 비관적인 시선으로, 2020년으로 변화 없이 넘어가는 2019년이라는 길목을 냉정히 조명한다. 그는 이전 작품에선 사용되지 않던 외부 관찰자의 나레이션과, 또한 <비둘기, 가지에 앉아 존재를 성찰하다>에서 사용된 시공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연출을 더욱 강화하여, 비판적인 거리의 형성과 현실에의 참여를 한층 더 역설한다. 4의 벽을 뚫고 나와 작품 내에만 놓이지 않는 시선이란, 마치 전근대의 비너스를 바라보다 <올랭피아>를 바라본 남성 관람객의 시선처럼, 이 세계가 간직한 무한의 불쾌감을 적나라하게 목도하게 만든다. 그 무한은 곧 과오가 다시금 잉태되고 출산되는 우둔함에 다름 아닐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20세기의 다른 철학자들이 인간의 유한한 한계 내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도모해야한다던 실존과는 다른 무한의 개념을 내놓는다. 그것은 내가 부모가 됨으로써 나의 분신임과 동시에 내가 아닌 타자인 자식들을 통해, 불연속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삶이 무한히 지속된다는 것이다. 레비나스에게서 무한의 실현은 곧 번식성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앤더슨이 이전 작품에서부터 지금까지 논의하는 무한이 바로 레비나스의 무한과 맞닿아있다고 볼 수 있다. 1999년에, 2000년대와 10년대에 포착하던 그 인물들의 과오가 마치 꼬리에 꼬리를 문 것과도 같은 번식처럼 대순환을 이룬다. 앤더슨의 눈에 인류사의 과오들은 고스란히 번식으로 무한히 복제되고 있는 것이랴. 하지만 또한 레비나스에게서 이러한 무한의 존중은, 탄생한 나의 분신은 부모의 일부가 점유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자식들만의 삶이 있는, 전적으로 타자임을 자각하는데서 비롯한다. 그래서 무례와 무심함을 번식시키는 절망적인 영겁의 무한 속에서도, 타자를 자각하고 기다릴 수 있는 이들에게서 희망의 무한은 등불처럼 작게나마 타오른다. 이렇게 그가 번식되는 무한으로 포착하는 것은 바로 과거의 우둔함, 그것도 나와 타자, 세계에 대한 암담한 무지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극복한 과거를 무한으로 낳아 이를 계승하는, 극복의 무한을 보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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