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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전주국제영화제 특집기사: 연재리뷰 4편
“숨긴 곳이 트여 있을수록 아이디어가 풍부한 것이다. 그리고 사방에서 볼 수 있는 곳일수록 더 낫다.” -발터 벤야민-
*『자에는 자로』와 감독 소개
셰익스피어의 희극 중 하나인 『자에는 자로』(내지는 『법은 법대로』)는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문제적이고 복합적인 작품으로 손꼽힌다. 본 작품은 분명 현실을 어느 정도 배경으로 삼고 있다. 많은 학자들은 본 작품에서 공작 빈센티오가 당대의 스코틀랜드-잉글랜드의 국왕이었던 제임스 1세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라 주장한다. 본 작품에서 빈센티오가 안젤로에게 대신 민심을 파악하게끔 명령하는 것처럼, 제임스 6세는 스스로 변장하여 백성들의 삶을 파악하여 이를 정책에 반영했기 때문이다. 공작임과 동시에 그 신분을 숨기고자 하는 인물, 빈센티오는 본 작품에서 1인 2역을 맡고 있다. 그리고 본 작품이 문제작으로 손꼽히고, 그 복합성과 입체성에 의해 아직까지도 학계에서 화두가 되는 이유가, 빈센티오와 더불어 거의 모든 극 중의 인물들이 1인 2역과도 같은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빈센티오가 명령을 내린 안젤로는 대단히 원리원칙적인 법관임과 동시에, 용의자의 여동생 이사벨라에게 성상납을 요구하는 파렴치한 인물이다. 그리고 클라우디오는 분명 악인임에 다름 아니지만, 한편 그의 행위는 빈센티오 치하에서 대단히 해이했던 사회적 풍조에서 가능했던 것이었다. 그는 진정으로 죄가 엄중 하여 재판에 회부된 악인인가, 아니면 백성들을 향해 엄중히 경고하기 위해 내세운 시대의 희생양인가. 이와 같은 남성 캐릭터들과 더불어 가장 흥미로운 배역이 바로 이사벨라다. 클라우디오의 여동생인 그녀는 오빠의 죄를 선처해달라고 안젤로에게 호소한다. 이윽고 안젤로가 그녀에게 잠자리를 요구하고, 이에 이사벨라는 침묵한다. 여기까지는 마치 그리스 신화 속 안티고네를 17세기를 배경으로 옮겨온 것 같으며, 수녀라는 그녀의 위치와 관련되어 성녀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이사벨라는 그 잠자리에 안젤로의 옛 약혼자인 마리아나를 제물삼아 대신 보내게 되며, 그녀조차 피해자임과 동시에 약자인 다른 여인을 권력을 가진 남성의 희생양으로 바치는 공모자의 위치로 전락한다.
이러한 본 작품은 권력, 특히 남성 중심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한 도덕의 타락과 방종, 그리고 정의의 불확실성을 포착한다. 가면을 쓴 대리인이 아닌 실재의 빈센티오가 행차하고, 이윽고 대단히 자애롭게 회개라는 방법을 필두로 판결을 내리지만, 안젤로와 빈센티오의 상반된 태도 자체가 법의 객관성을 훼손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이후 본 극의 결말은 빈센티오가 이사벨라에게 청혼하며, 사실상 이사벨라는 공작에게 두 번씩 청혼 받고 그것을 거절하지 못하며 마무리된다. 원전은 해피엔딩 같은 분위기를 내지만, 한편 이것은 하나의 대순환에 다름 아닌데, 이사벨라는 공작이라는 남성 권력자로부터 자신이 마리아나가 되거나 아니면 또 다른 마리아나를 세워야만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이며, 다른 선택은 존재하지 않는 채로 이데올로기는 팽창한다. 그래서 『자에는 자로』는 마치 20세기 태동한 부조리극의 시초처럼 결코 이성적이지 않은 인간의 결함과, 그들이 이룩해놓은 성취, 신화들에 어지러이 균열을 일으키는 작품이다. 이 같은 『자에는 자로』를 1982년생인 아르헨티나의 젊은 청년감독, 마티아스 피녜이로가 옮겨온다. 그는 데뷔작인 <도둑맞은 남자>와 그 이후에 내놓은 <그들은 모두 거짓말하고 있다>와 같은 정치적인 작품세계를 보여주기도 하였고, 이후에는 셰익스피어 연작으로 필모그래피를 이어나가고 있다. 하지만 두 경향이 결코 단절된 것은 아닌데 그가 셰익스피어 연작을 현대적으로, 심지어는 어떠한 연관도 없이 해체적으로 모티브 삼으며 옮겨오는 것처럼, 이전 작품들에서도 과거의 '경전' 및 역사가 현재와 맺는 관계에 대해서 탐구해왔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들의 참/거짓의 판별 어려움을 선언하는 경향은, 대단히 자유분방한 태도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해석하고, 동시대의 삶의 곳곳에 이식해오는 태도와도 연관된다. 실연하는 방식이든 아니면 번역하는 방식이 되었든, 원전을 충실하고도 고스란히 옮겨서 영상화하지 않더라도 이를 거짓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듯이 말이다. 이러한 그의 작품 속 풍경이나 군상들은 아르헨티나의 도시 곳곳을 누비는 청년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노아 바움백이나 알렉스 로스 페리 등의 느낌이 물씬 풍기곤 한다. 풍경과 주인공뿐만 아니라, 그 또한 대화에 중점을 두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오프닝 시퀀스
하지만 피녜이로는 이 같은 일상적 숏들의 시간을 비선형적으로 뒤엉키기도 하며, 갑작스레 꿈이 침투하면서 의식과 무의식의 차원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또한 장편의 중간에 단편이 갑작스럽게 인서트되기도 하는 등, 피녜이로는 대단히 급진적이고 자유분방한 방식으로, 원전과 영화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비관습적인 영화를 전개한다. 이 같은 그의 작품 경향을 고려할 때 『자에는 자로』야 말로, 또한 그 속의 이사벨라야 말로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자 인물일지 모른다. 원전과 배역 자체가 특정한 해석으로 귀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애초에 차단하고 있다는 듯이, 맘껏 열려있다는 태도로 여전히 우리를 맞이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부터 살펴보자. 메인타이틀과 크레딧이 미처 다 언급되기 전부터 영화는 자주색이 오묘하게 변하는, 마치 <페인 앤 글로리>의 추상적 오프닝과 유사한, 색채의 변화가 강조되는 숏을 펼쳐낸다. 이후 영화는 자주색의 속성에 대해서 논한다. 자줏빛은 ‘식은 빨강’이자 ‘데워진 파랑’이기에 복합적이고 오묘하다고 말한다. 그의 말 따라 실재로 자주는 칸딘스키에게서 얼어붙은 빨강으로 여겨졌다. 또한 자주의 상징성 자체가 희귀한 바다달팽이에 의해서만 채집될 수 있었기에 로마 귀족들의 색채나 그리스도의 성혈에 상응하는 고귀함에 상응함과 동시에, 독약이나 우울과 같은 부정적인 뉘앙스도 함의하였기에 대단히 양가적이다. 이렇게 하나로 얽매이지 않는 자주의 색채론을 영화는 밝기와 온도의 변화를 통해서, 분명 자주임에도 불구하고 다 같은 자주가 아닌, 본질을 유지한 채 자유로이 변화하는 색채를 비춰낸다. 이후 영화는 아주 찰나적인 순간에 볼 수 있는, 지평선이 자줏빛으로 물드는 순간이 있다고 말한다. 마치 에릭 로메르의 <녹색광선>의 결말을 연상케도 하는 이 같은 시퀀스는, 그와 유사한 인고의 시간 이후에 다가오는 ‘확신’을 논한다. 이 시간은 불확실성으로부터 결단해야만 하는 시간으로, 이를 위해선 12개의 의심에 다름 아닌 12개의 돌을 하나씩 던지면서 확신에 근접해야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모든 돌이 사라져도 우리의 손안엔 하나의 돌이 남으며 확신은 의심으로 뒤바뀐다.
*시간의 포개짐
확신과 의심의 끝없는 굴레, 오프닝 시퀀스의 자줏빛도 마찬가지고, 익스트림 롱숏으로 보였지만 어떤 인물의 형체가 근거리에서 잘려나간 클로즈업이기도 한 오프닝 쇼트의 규정불가능한 성질 자체가 이 같은 확신과 의심에 대한 논지를 강화시킨다. 이와 같은 영화의 모호함은 오프닝 시퀀스 이후에 더욱 복잡해진다. 만삭의 임산부가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숏과 여러 채도의 자줏빛 색종이를 뒤집고 정리하는 장면, 한 여인이 수영장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숏이 연이어 펼쳐지고, 여기에는 어떠한 연속성이나 연관성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같은 세 차원의 숏들이 중첩됨에 따라서 각각의 세 차원의 진위가 서서히 밝혀진다. 이는 세 단계로 나뉜 시간인데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마리엘이 포착된 숏은 오디션을 보러 온 현재이며, 자줏빛 색종이를 만지작거리는 숏은 현재로부터 가까운 과거, 그리고 수영장 인근을 떠돌던 마리엘이 루시아나를 만나는 장면은 1년 전 가량의 먼 과거다. 영화는 이를 통해서 과거가 현재를 어떻게 구성하는지, 또한 현재로부터 과거 영향을 끼치는 과정을 탐구한다. 현재는 과거에 루시아나와 함께 이사벨라의 대사를 읊는 장면으로부터 서서히 확신을 갖고 이뤄진 것이다. 확신을 갖기 위한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임산부인 그녀의 상태처럼 확신은 하나의 잉태와 출산일 것이다. 그리고 현재로부터 대사를 연습하는 먼 과거, 오디션을 봐야겠다고 다짐하는 가까운 과거는, 현재의 필요에 따라서 뒤죽박죽 비선형적으로 연상된다. 또한 이러한 과거 하나 하나가 앞서 언급한 12개의 돌과도 같을 것이다. 과거라는 의심이 하나씩 떨쳐짐에 오디션이라는 확신이 생겨난다. 하지만 이 같은 오디션이라는 확신이 곧 의심으로 뒤바뀌고, 또한 현재라고 확신한 것조차 믿을 수 없다. 영화의 시간은 한층 더 복잡해지는데 기획자로 전향한 마리엘이 루시아나와 극장에서 오디션을 진행하는 현재와, 출산 이후 루시아나와 재회한 비교적 가까운 과거, 그리고 오디션을 봄과 동시에 낙방한 한때는 현재였던 것을 먼 과거로 뒤바꾸며, 영화의 끝자락에서 현재와 과거의 층위는 약 5개 정도로 확장된다.
*배역과 역할의 포개짐
확신하던 현재가 순식간에 과거로 뒤바뀌는 것, 이것이 인고의 확신 이후에 재빨리 의심으로 뒤바뀌는 현상을 함축하는 것일지 모른다. 확신하는 현재는 너무도 재빨리 지나가며 과거로 뒤바뀐다. 이 같은 시간의 뒤바뀜에 따라서 인물의 상태, '배우의 역할'도 결코 같지 않다. 마리엘은 '클라우디오'의 여동생인 이사벨라에 가까운 위치이자, 무대의 스태프요 임산부이자 어머니, 기획자를 '연기'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루시아나는 클라우디오의 약혼자였던 줄리에타에 가까우며, 연극 및 영화 배우이자 수학 강사를 맡고 있다. 이들이 기다리는 남자는 마리엘의 남매임과 동시에 루시아나의 연인이다. 이들은 첩첩히 쌓여진 과거로부터 현재로 거슬러 올라오며 각각의 역할로 변화무쌍하게 변화해온 것이며, 현재의 역할도 관계망에 따라서 결코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마리엘이 오디션에서 지금의 몸무게가 1달 반 뒤 정도면 달라질 것이기에 말하기 어렵다고 한 것처럼, 이들이 현재 연기하는 배역과 표현은 언젠가 과거가 되고 미래와 같지 않을 것이다. 한편 그 변화는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오디션은 열망하는 변화가 불발될 수도 있는, 타인의 선택에 의해 승인이 결정되는 장이다. 배우이고 싶은 마리엘은 이 오디션에서 루시아나에 의해 낙방이 예고됨에 그 존재가 투명하게 상실된다. 무수한 가능성을 바탕으로 변화무쌍한 자유를 실현하는 실존적 대자를 논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지만, 한 인물은 절대적 대자가 아니라 제한되고 승인되는 상대적 대자인 것이리라. 그녀들의 삶을 백지의 스크립트 속에서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에는 자로』와 이사벨라라는 기준점을 두고 그 변화를 포착하는 영화의 태도처럼 말이다. 이러한 두 여인은 하나의 대사를 읊는다. 『자에는 자로』 속 이사벨라가 안젤로에게 클라우디오의 선처를 청원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역할에 따라서 느낌은 다르다. 마리엘의 대사는 원전의 이사벨라에 근접하여 보인다. 하지만 루시아나의 대사는 마치 줄리에타가 클라우디오를 용서하고 안젤로에게 선처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같은 대사임에도 각자의 위치와 역할에 따라서 달라지는 대사의 맥락은, 시대성과 주관성에 따라 지금까지도 무수한 해석을 낳는, 원전의 텍스트와 이사벨라의 모호성에도 상응하듯 보인다. 문학 평론가들은 이사벨라의 침묵을 두고 당대의 남성성에의 순응이라 논하기도 하지만, 여성 주의적 관점에서는 나름의 방법으로 저항했다고 평하기 때문이다.
*나와 타자
이렇게 영화는 『자에는 자로』와 이사벨라의 입체성을, 하나의 대사를 읊는 두 명의 입체적인 인물을 통해서 드러냄과 동시에, 그것을 통해서 결코 같지 않은 개개인의 주관성, 인생을 환기시킨다. 이사벨라라는 배역이 인물에 따라서 다르게 포착되는 것처럼 영화도 각 인물의 성격에 따라 그들을 달리 포착한다. 마리엘은 본 작품의 주인공으로서 언제나 카메라로부터 멀어지지 않는다. 수영장을 떠돌던 그녀는 멀리 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래서 그녀는 패닝으로 포착되었다. 떠도는 그녀는 옆으로 멀리 나아갈 듯 했지만 결국 중앙으로 돌아온다. 더불어 그녀를 비추는, 카메라와도 같은 거울에 천천히 근접해가며 마리엘은 클로즈업으로 포착된다. 하지만 마리엘으로부터 루시아나는 타자다. 마리엘의 기억과 의식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는 작품이기에, 루시아나는 줄곧 떠나가며 형체가 모호해지는 롱숏으로 포착되거나, 아니면 프레임 바깥으로 나가곤 한다. 마리엘이 아이를 낳은 이후에 재회하기 직전의 장면에서 이들이 향하는 길은 방향이 서로 달랐던 것처럼, 자신과 타자, 기다리는 자와 찾아 헤매는 자들은 서로에게 귀속되지 않는다. 카메라가 마치 그녀의 시선이자 의식이라면, 루시아나는 그녀에게서 멀어지는 타자요, 오빠는 그 시선에서 포착되지 않는 부재한 자로서 그녀가 제어할 수 없다. 친숙한 자신과 언제나 낯설어지는 루시아나를 연출로 대비한 것은, 마리엘이 그녀에 의해서 오디션에 확신을 가졌다할지라도, 그것은 루시아나가 아닌 마리엘의 선택이기에, 낯선 루시아나에 의해 마리엘의 친숙성과 확신이 무너질 수 있음을 형식으로도 암시한 것이리라. 결국 오디션은 불발되었고 그 기회는 루시아나가 가져간다. 그래서일까 영화 속 어머니들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녀들은 처음에는 남편의 존재를 헤매다가, 이후에는 크게 얽매이지 않는다.
*자연과 공간의 포개짐
즉 처음에 그녀들이 함께 향하던 곳이 남매이자 연인이 돌아올 타자를 바라는 길목이었다면, 기억이 축적됨에 따라서 확신을 갖는 것은 타자에 얽매이지 않는 일련의 자립이다. 그래서 마리엘의 선택을 규정하던 과거의 루시아나는, 이제는 각자의 위치에서 동등한 자격으로 만나게 된다. 그를 찾던 두 여인의 여정과, 이러한 발길 속에서 이사벨라의 대사를 읊던 장면들은 경이로운 대자연 속에서 펼쳐졌다. 영화의 오프닝에서부터 강조되었던 바다, 이후 그녀들이 향하는 풀숲, 들판, 강가, 여울목, 동굴 등 본 작품은 익스트림 롱숏을 이용되어 대단히 숭고하고도 경이로운 세계를 드러내고, 풀냄새가 가득할 것만 같은 싱그러운 감각성을 세밀히 구현한다. 이러한 영화는 『자에는 자로』를 재현하는 작품이 아니다. 피녜이로의 이전 작품이 그랬듯 고전이 어떻게 동시대의 일상에 녹아들고 있는지를 포착하는 작품이다. 이 같은 동시대성을 구현하기 위해선 현재성을 차단할 수 있는 무대가 아닌, 지금 여기가 느껴지는 일상과 자연을 포착해야만 하리라. 동시대에 『자에는 자로』를 옮겨온다는 것을 압축할 수 있는 숏이 흐르는 개울물에 그녀들이 고정된 발을 담군 장면이 아닐까. 고정된 대사로서 발은 어떤 흐름으로서 시원하고도 간지러운 개울물 내에 위치하여, 그 형상이 흐릿하게 보일 수도 있고 다르게 표현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또한 루시아나가 마리엘의 손에 돌덩이를 올려놓고, 이를 통해 대사에 실린 감정과 억양을 연습하는 장면은, 연극을 이루는 요소가 고정되어 있는 대본이나 통제될 수 있는 무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의 돌에 의해 어조와 감정이 달라지는 것, 돌이라는 의심과 변화의 재료를 부여하는 자연은 고정과 확신에 의심을 부여한다. 고정된 것처럼 보이는 장소에도 영화는 호기심어린 의문을 부여하니, 오디션장이라는 무대는 결코 하나의 차원이 아니다. 평가하는 안젤로와 연기하는 이사벨라는 두개의 차원으로 나뉘어 있고, 그 사각형의 차원이 서로 포개져 있다. 손에 포개진 돌이나 자연과 포개져있는 책(『자에는 자로』 내지는 루시아나의 수학책), 그리고 시간의 포개짐 등 그 무수한 중첩 속에서 고정되어 보이는 것들도 다른 결과를 자아내는 것이리라.
*인생의 포개짐
이렇게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양한 인물들에 의해 『자에는 자로』와 이사벨라가 반복되고 있는데, 이와 동시에 영화 속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반복하기도 한다. 루시아나도 마리엘처럼 아이가 있다는 바가 그녀들의 대화 속에서 언급된다. 임산부와 미혼모의 삶은 루시아나로부터 마리엘에게 반복된 것이다. 그리고 한때 그녀의 오빠가 클라우디오를 연기하였으나, 마리엘의 재정이 악화됨에 따라서 그녀가 오빠의 선처를 받아야하는 클라우디오로 뒤바뀐다. 오디션을 보던 마리엘은 이제 오디션을 집행하는 위치로 뒤바뀐다. 그래서 개인은 무수하게 변화하지만, 커다란 틀에서 보면 누군가의 인생이 다른 누군가에게서 그저 유사하게 반복되고 있다는 인상을 피할 수 없다. 영화에 인서트되는 무대 배경인 사각형은 주로 자줏빛이었지만, 후반부에는 여러 원색의 포개짐으로 다채롭게 뒤바뀐다. 하지만 그 원색으로의 변화는 절대적인 변화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겪었을 법한 다른 인생으로서의 원색은 아닌가. 영화의 말미에 마리엘과 스태프는 그 사각형 사이사이를 오가거나, 아니면 층과 층 사이를 뛰어넘는다. 이처럼 변화는 거대한 틀 안에서 이뤄질 뿐, 근본적인 뛰어넘음은 없을지 모른다. 영화는 이 같은 틀이 제작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무대 및 영화가 촬영되는 공간을 거시적으로 비춘다. 그리고 거기서 연극과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메타영화적인 속성을 가짐과 동시에, 그것이 곧 피녜이로가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지속적으로 영화화하며 논하는 바가 함축되어 있을지 모른다. 시간에 의해 무대도 뒤바뀌고, 특히 상대적인 우리들도 지속적으로 배역을 뒤바꾼다. 하지만 그 배역은 과거부터 이어져 내려온 우리가 벗어나지 못하는 하나의 거대한 구조와도 같은 틀 안에 놓여있어, 억겁의 세월동안 틀과 틀을 오가며 반복되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즉자에서 대자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대자로서 여러 즉자를 유랑하는 것은 아닌가.
*꿈의 포개짐
이러한 틀로 구성된 배경이 『자에는 자로』를 구성하는 무대 중 ‘의식’ 파트에 상응한다는 구성원들의 말처럼, 영화는 여러 시간을 오감과 동시에, 의식과 무의식과 같은 내면의 차원도 현란하게 오고간다. 그것이 바로 꿈이다. 피녜이로는 이전 작품들에서도 현실과 구분되는 꿈을 단편영화라는 방식으로 인서트한 적도 있다. 본 작품에서도 꿈은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허구인 영화처럼 '영사'된다. 그리고 꿈은 현실과 온당 유리된 것이 아니라, 루시아나의 회고가 꿈의 지양분이 된 것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이 같은 꿈도 현실 속 다른 시간들과 함께 사각형의 틀로 포개진다. 그리고 꿈에서 깬 우리의 의식에 의해, 무의식의 기억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가는 과정을 무수한 포개짐을 통해서 보여준다. 그것이 곧 기억이 축적되는 방식이자 확신이 의심으로 뒤바뀌는 과정일 것이다. 확신이 의심으로 향하는 것은 그 기억이 점점 더 포개지며 작아져서 망각되기 때문이요, 그렇게 쌓인 의심들 또한 포개지고 포개지다 보면 쌓여있던 확신이 샘솟을지 모른다. 그래서 의심과 확신은 상실이 아니라 다만 작게 망각되는 것이리라. 이렇게 잊힌 것들은 오디션을 보던 마리엘의 현재에서처럼 특정한 상황 속에서 떠오르고, 기억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샘솟고 저물며 의심과 확신은 무수한 순환을 이루며 반복되는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이 같은 포개짐 속에서 의식과 무의식, 꿈과 과거, 현재 등은 명확히 구분되는가? 구분되지 않은 채로 비선형적으로 축적되어, 점점 더 작아진 현실과 꿈, 의식과 무의식을 명쾌히 구분할 수 있을까? 그래서 믿을 수 없는 이 같은 기억들에 의해 현재는 의심이라는 방황에 가득 차는 것은 아닌가. 즉 현재의 그녀가 긴밀하게 과거로부터 영향을 받고 확신에 차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그것이 의심의 맹아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화의 결말은 수미상관을 이룬다. 결말에 다시금 자줏빛 바다가 나타나고, 전망대에 선 인물들이 포착되며 그들은 이 오묘한 빛깔의 대양에 돌을 던진다. 하지만 영화의 시작과 끝이 결코 같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의심으로 되돌아온 그녀들은 과거에도 돌을 던졌고, 현재에도 돌을 던지며, 앞으로도 돌을 던지리라.
*정리 및 다른 작품과의 연계성
그래서 우리는 마리엘이 『자에는 자로』의 낙관적인 해결을 좋아한다는 것처럼, 확실한 종결을 바라곤 하지만 우리에게 정녕 그 끝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은 개인적인 차원부터 세계의 차원으로까지, 포개지고 또 포개져서 다만 작게 망각 될 뿐, 결코 상실되지 않음을 영화가 보여주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실의 기억뿐만 아니라 꿈까지 포개놓으며 영화는 감상자가 확신했던 순간에도 더욱 의심을 증폭시킨다. 그녀가 현실의 과거라고 착각하는 것 중에 혹 꿈이 섞여있지는 않은가, 무의식의 장난이 있지는 않은가, 하는 그런 의심 말이다. 하지만 영화 속 의심에 의해 발전해온 인물들처럼, 우리의 삶이 곧 의심과 확신의 연속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뛰어넘기 위해 노력해야 하리라. 또한 끝없이 의심하며 작품을 유희하는 즐거움, 믿을 수 없는 해석의 팽창이 곧 예술의 미덕이 아니겠는가.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과거로부터 동시대까지 포개고 또 포개던 피녜이로는 그의 가장 문제적이고 복합적인 작품, 『자에는 자로』를 이렇게 자유롭게 포개고 팽창시켜 영상화한다. 이를 통해서 시간이 포개지고, 역할들이 포개지며, 자연과 삶이 포개지는 우리의 인생을 포착한다. 또한 이 같은 포개짐 속에서 변천하는 자줏빛처럼, 같지만 결코 같지 않은, 또 무수한 배역들이 서로에게서 반복됨에도 그것을 온전히 같다고 말할 수 없는 우리의 삶이 느껴진다. 또한 피녜이로는 이전 작품들과의 연속선상에서 고전과 동시대의 관계를 바탕으로 즉자와 대자에 대해서 논한다.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인, 그러한 열려있는 상태 속에서 자유로운 연출과 해석, 일상에의 접목을 통해 대자적 가능성을 엿본다. 이 같은 결과물은 원전의 서사보다도 그것의 정신이나 승화될 수 있는 방향을 자유롭게 숏으로 엮어낸 샤오시엔의 <자객 섭은낭>이 연상되기도 하고, 아니면 타르코프스키의 <거울>과 같은 비선형적 시간과 몽타주가 일상으로 옮겨온 듯한 느낌도 든다. 이러한 작품들을 선호하는 감상자라면 분명 황홀하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시간성으로는 <미끼>와, 그리고 고찰하는 바로는 <이사도라의 아이들>과 접점이 있기에 이들과 함께 놓고 봐도 흥미로운 감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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