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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줘요 | ARTLECTURE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줘요

-뮤지컬 <레드북>-

/Art & History/
by 수인
Tag : #뮤지컬, #소설, #여성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줘요
-뮤지컬 <레드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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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뮤지컬 <레드북>이 말하는 바는 명확하다. 나를 말하는 사람이 되자는 것, 그 어떤 사회적 제약이나 편견을 넘어서서 나답게 나의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다. 이 메시지가 시간도 공간도 다른 21세기 한국에서도 이처럼 널리 울려 퍼진다는 것은 아직도 나를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안나는 시대를 앞서간 다른 여성들처럼 미치지는 않았다. 자신이 누구인지 혼란스러워하기는 했지만, 이내 글을 쓰고 그 글을 끝까지 지키는 용기를 보였다.

여전히 나를 말하는 대가로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미친 사람으로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원래 비뚜름한 법이어서 살짝 미쳐야지만 이 세상을 똑바로 살아갈 수 있다. 사람들의 몰이해 속에서 나를 찾아가는 건, 어딘지 어긋나고 중심에서 벗어난 위태로운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재미난 경험이다. 미치든 미치지 않았든 내가 사는 게 정답이다. 내가 말하는 내가 진정한 나다. 당돌한 붉은색이든 열정의 붉은색이든 자신만의 색을 말하기를, 그렇게 ‘나를 말하는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가기를, 뮤지컬 <레드북>은 안나의 삶을 빌어 우리에게 전한다.

나머지, 난 뭐지


아우울~~~

감옥에 갇힌 한 여자가 난데없이 올빼미 울음소리를 흉내 낸다.

“난 슬퍼질 때마다 야한 상상을 해.”


올빼미 소리를 내는 것도 모자라서 슬퍼질 때마다 야한 상상을 한다는 이야기를 거침없이 하는 한 여자가 있다. 이 여자는 일거리를 제공한 답시며 자신을 희롱한 남자와 맞서 싸우다 막 감옥에 들어온 참이었다. 이틀 전에 해고당한 구직자로 감옥에까지 들어왔지만 움츠러들기는커녕 슬픔을 이기기 위해 오히려 야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이 여자의 이름은 ‘안나’이다.



뮤지컬 <레드북> 포스터 (출처: 레드북 인스타그램) 


뮤지컬 <레드북> 포토존 (출처: 본인 촬영)



뮤지컬 <레드북>은 19세기 후반 영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위 말해 ‘빅토리아 시대’로 불리던 때로,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 재위 64년 동안 문화경제적으로 황금기를 구가했다.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으로 불리며 전 세계를 제패했고, 보수적인 도덕규범과 예의범절을 중요시하는 신사의 나라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심각한 빈부격차와 뒤틀린 성 의식에서 비롯된 여성에 대한 억압 등의 문제가 있었다. 이 시대 여성들은 순결을 종용 받았으며, 남성이 동행하지 않으면 외출조차 할 수 없었다. 중류층 이상의 여성들은 밖에 나가 일하는 대신 집에서 남편과 가정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덕목이었다. 이런 시대에 약혼자에게 자신의 첫 경험을 고백했다가 파혼당하고, 남자 없이 시장 거리를 돌아다니며 일자리를 찾는 안나는 한 마디로 이상한 여자였다. 




“여긴 오직 세 종류의 사람들뿐

신사 숙녀 그리고 여러분

우린 여러분 다른 말로 나머지

한꺼번에 싸잡아서 가난하고 볼품없는

하루 종일 일만 하는 나머지

.

.

.

나는 외톨이

사람들은 내게 그래 또라이

나 같은 애 처음 봤대

내가 너무 이상하대 외로워

​난 뭐지 난 뭐지

나도 아직 모르겠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도 나를 알고 싶어 난 뭐지”


  - 뮤지컬 <레드북> ‘난 뭐지’ 中



당시 영국 사회에서 신사와 숙녀가 아닌 사람들은 그저 나머지일 뿐이다. 그리고 안나는 그 나머지 속에서도 ‘천하의 못돼처먹은 년’, ‘또라이’라고 불리며 소외당하는 사람이다. 결혼도 안한 노처녀에, ‘일을 구해도 몇 달을 못가 쫓겨나는’, 만년 구직자 신세인 안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자신을 혼란스러워한다. ‘이해할 수 없는 세상’, ‘나만 혼자 다른 세상’ 속에서 나도 나를 모르겠는 자신을 노래한다. 



미친 여자들이 살아남는 법


하지만 안나에게는 한 가지 재주가 있었으니, 바로 이야기하는 재능이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담대하리만치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를 누구보다 재미있게 하는 것이 안나의 능력이었다. 이런 그녀의 재능은 이미 자신이 하녀 시절에 모셨던 노부인 바이올렛을 비롯해 주위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었던 안나는 결국 글 쓰는 여자들의 문학회인 ‘로렐라이 언덕’에 들어가 비로소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만난다.


로렐라이 언덕에는 안나만큼 이상한 여자들이 가득하다. 로렐라이 언덕의 회장인 도로시는 글을 쓴다는 이유 하나로 남편에게 양육권을 빼앗기고 쫓겨난 여자이다. 아이 대신 인형을 안고 다니며 이야기를 쓴다. 그녀는 안나의 재능을 알아보고, 안나의 꿈과 사랑을 적극 응원하고 지지한다. 로렐라이 언덕의 고문 로렐라이는 여장 남자이다. 글 쓰는 여성들의 모임을 만드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옛 연인을 잊지 못해 대신 그녀가 되어 그녀의 꿈을 이루고 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여자들은 이곳 로렐라이 언덕에서 스스로를, 그리고 서로를 위로하는 글을 쓰며 연대한다.



글 쓰는 여자는 위험하다.

마치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뱃사공을 유혹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로렐라이 언덕의 요정처럼- 로렐라이 요정 일러스트 (출처: 나무위키)




“우리는 로렐라이 (로렐라이)

언덕의 여인들 (여인들) 

낡은 펜으로 새로운 길을 찾아

​억눌려온 욕망을 일으켜

넘쳐나는 광기를 불태워

오직 나를 위한 길을 찾아

길을 찾아 (찾아) 길을 찾아

​진정 내가 나일 수 있는 (나일 수 있는)

진짜 나를 만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길을 찾아”

- ‘우리는 로렐라이 언덕의 여인들’ 中


 

글을 쓰는 여자는 어딘가 이상하다. 이상한 여자들만이 글을 쓴다. 요즘이야 여성 작가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지만, 여전히 ‘글 쓰는 여자’는 공공연하게 거론되는 주제이다. 남성들이 잠식해온 지성의 영역을 여자가 침범한다는 건 퍽 위태로운 일이다. 자기 자신과 사회 현상에 대해 생각을 한다는 건 위협이 되는 일이다. 그렇기에 글을 쓰는 여자들은 미치광이로 치부되었다. 글을 쓸 만큼 예리하고 섬세한 감성은 신경쇠약으로 폄하되었다. 보호라는 명목하에 남성과 사회의 감시를 받았다. 같은 여성에게조차 외면당했다. 20세기 초 미국의 작가 샬럿 퍼킨스 길먼은 소설 <누런 벽지(The Yellow Paper)>를 통해 글 쓰는 여성의 매드니스(madness)를 그려냈다. 소설 <누런 벽지> 속 화자는 요양 차 머문 집의 한 방에서 이상한 문양의 벽지를 본다. 헤진 벽지의 문양 속에서 자신을 닮은, 혹은 어쩌면 자신일지 모르는 벽지 속을 기어다니는 여성의 모습을 발견한다. 의사인 남편으로부터 글쓰는 것을 금지 당하고 신경쇠약이라고 진단 받은 그녀는, 어느 날 미친 사람처럼 벽지를 뜯어 헤쳐 벽 속에 갇힌 여성을, 자신을 구해낸다. 로렐라이 언덕 문학회의 여성들은 자신을 닮은 글을 쓰며 스스로를 구원한다. 사회에 자신을 드러낸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찾아간다.



샬럿 퍼킨스 길먼 지음, 임현정 옮김 /궁리 /2022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안나 또한 자신을 살게 한 첫사랑과의 추억을 글로 그려낸다. 적나라한 자신의 이야기를 굳이 글로 풀어내고자 하는 건, 그래야만 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표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자신을 위해 자신만의 내밀한 이야기를 책으로 전한다. 그렇게 사회의 주류에도, 나머지로 불리는 비주류에도 속하지 못하는 안나는 글 속에서, 책 속에서 자신을 찾는다. ‘난 뭐지?’의 물음표를 ‘난 뭐지!’라는 느낌표로 바꾸어 간다. 


한 여성의 사랑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안나의 <레드북>은 보수적인 영국 사회에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같은 여성들은 안나의 글을 읽으며 해방감을 느끼고, 남성들은 짐짓 아닌 체 하면서 호기심에 안나의 책을 접한다. 하지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양날의 검 같은 것이다. 나를 말하는 솔직함은 사람들을 끌어당기기도 하지만, 이를 터부시하는 사람들에게는 약점이 되기도 한다. 주류의 시선에서 본 안나는 작가라기보다는 자신의 사생활을 솔직한 발칙함으로 털어놓은 여자일 뿐이다. 그렇기에 당대 최고의 평론가 존슨 씨는 평론을 써준다는 이유로 안나에게 성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안나의 책이 사회적으로 악영향을 끼친다는 오명을 씌운다. 


다시 감옥에 갇힌 안나가 풀려나는 방법은 단 하나이다. 글을 썼을 때의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하는 것. 신경쇠약으로 인해 충동적으로 글을 썼다고 증언해야지만 자신도, 로렐라이 언덕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도 지킬 수 있다. 그러나 안나는 자신의 책을 읽은 독자들을 기만할 수 없었다. 누군가는 자신의 책을 읽고 희미해졌던 옛사랑을 떠올렸다고 했다. 소원해진 관계에 다시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했다,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 모든 사람들의 욕망과 마음을 안나는 부인할 수 없었다. 나아가 자기 자신을 부정할 수 없었다. 자신이 녹아 들어가 있는 글을 부정하는 순간, 안나는 다시 나는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돌아갈 터였다. 



“내가 나라는 이유로 죄가 되고

내가 나라는 이유로 벌을 받는

문제투성이 세상에

하나의 오답으로 남아


내가 나라는 이유로 지워지고

나라는 이유로 사라지는

티 없이 맑은 시대에

새까만 얼룩을 남겨

​나를 지키는 사람”


  -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中




뮤지컬은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안나는 끝까지 작가이자 한 개인으로서의 신념을 고수했지만, 안나의 연인이자 변호사인 브라운의 도움으로 풀려난다. 브라운은 <레드북>이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를 수집하여 법정에 제출한다. 독자들의 지지와 연대로 안나는 결국 법정에서 유리한 판결을 받게 되고, 유명한 작가가 되어 자신답게 살아간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줘요


뮤지컬 <레드북>이 말하는 바는 명확하다. 나를 말하는 사람이 되자는 것, 그 어떤 사회적 제약이나 편견을 넘어서서 나답게 나의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다. 이 메시지가 시간도 공간도 다른 21세기 한국에서도 이처럼 널리 울려 퍼진다는 것은 아직도 나를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안나는 시대를 앞서간 다른 여성들처럼 미치지는 않았다. 자신이 누구인지 혼란스러워하기는 했지만, 이내 글을 쓰고 그 글을 끝까지 지키는 용기를 보였다. 극 중 안나가 보여주는 특유의 당돌한 사랑스러움도 한몫했으리라. 지금 이 시대에도, 이 순간에도 수많은 안나들이 있을 것이다. 안나처럼 당돌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나를 말하는 대가로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미친 사람으로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원래 비뚜름한 법이어서 살짝 미쳐야지만 이 세상을 똑바로 살아갈 수 있다. 사람들의 몰이해 속에서 나를 찾아가는 건, 어딘지 어긋나고 중심에서 벗어난 위태로운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재미난 경험이다. 미치든 미치지 않았든 내가 사는 게 정답이다. 내가 말하는 내가 진정한 나다. 당돌한 붉은색이든 열정의 붉은색이든 자신만의 색을 말하기를, 그렇게 ‘나를 말하는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가기를, 뮤지컬 <레드북>은 안나의 삶을 빌어 우리에게 전한다.


 

“제2의 누군가가 아니라 제1의 내가 되세요! 

우리가 알고 싶은 건 바로 당신! 당신의 이야기니까요!”


   -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줘요’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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