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미술은 20세기에 탄생했다. 실제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한 사람의 머릿속에 있는 사상 혹은 현상이나 형태를 캔버스에 옮긴 그림을 추상미술이라 하는데, 그 개념자체가 없었다기 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그 장르가 더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라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눈에 담을 수 있는 세상 그 너머에 있는 것을 탐하고 싶어했던 예술가들의 욕심 때문이었을까?
19세기 이후 인상주의까지 구상 미술이 큰 인기를 끌었지만, 사진기가 발명된 이후 존재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미학자인 허버트 리드(Herbert Read)는 ‘추상 주의는 허무의 심연에 직면한 인간의 반항이요, 유기적 원리를 거부하면서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인간의 창조 자유를 긍정하는 불안의 표현’이라 말한다. 이 표현에 따르면 더 이상 현실의 세계에서 모방해 그릴 그림이 없어졌을 때 느껴지는 허무의 표현이 바로 추상의 발달 근원이라 볼 수도 있겠다. 추상이 탄생하게 되며 더 이상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한 개인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허버트 리드(1893~1968)
추상 미술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비정형의 불규칙한 조형 요소로 이루어진 뜨거운 추상과 직선, 원, 다각형 등의 정형적인 요소로 이루어진 차가운 추상이 있다. 뜨거운 추상으로는 추상 미술의 선구자이자 아버지로 불리는 바실리 칸딘스키와 잭슨 폴락 등이 있으며 차가운 추상의 대표 인물은 몬드리안이 있다.
Composition VIII, 1923, 캔버스에 유채, 구겐하임 미술관 소장
Composition With Red, Blue, and Yellow, 1930, 캔버스에 유채, 아먼드 P 바로토스 부부 소장
바실리 칸딘스키는 화실에 거꾸로 세워진 자신의 그림을 본 후 알 수 없는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추상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점과 선, 면을 써 자신의 사상을 그림으로 표현했는데, 칸딘스키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음악을 가장 순수한 추상으로 여기고 이를 그림으로 옮기려 하는 시도를 여러차례 시도했다.
독일의 낭만주의 작곡가인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Wagner)와 오스트리아 출신 음악가인 아놀드 쇤베르크(ArnoldSchoenberg)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
Impression III (Concert), 1911, 오일 페인팅
피아노를 형상화한 위 그림은 독일 뮌헨에서 열렸던 쇤베르크의 콘서트를 직관한 후 그에 영감을 얻어 작업한 그림이다. 그는 또한 ‘위로 솟아오르는 선은 빠르고 경쾌한 리듬을, 부드럽고 완만한 선은 느리고 조용한 리듬을 느끼게 하며 색채 중 색조는 음색, 색상은 가락, 채도는 음의 크기를 연상시킨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반면 몬드리안은 직선과 수평, 조형 요소로 추상 미술을 그렸다. 그는 ‘그림이란 비례와 균형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라 말하며 자신만의 미술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의 그림을 보면 균형과 조화가 독보적으로 눈에 띄는데, 이는 세상에 대한 조화, 자연계와 인간계의 조화, 여성과 남성의 조화 등 다양한 형태로 해석될 수 있다.
그는 미술계에 입문하며 피카소의 그림에 큰 영향을 받고, 입체주의에 들어서려 하지만 이미 입체주의가 너무 왕성한 인기를 얻고 있었을 때라 그는 입체주의에서 영향을 받은 자신만의 새로운 스타일을 구축하게 된다. 그렇게 탄생하게 된 것이 바로 수직과 수평의 대립이었다. 그는 수직과 수평의 대립으로 평화로운 조화를 말하려 했고,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에는 대칭이 거의 없다.
“회화의 기본 요소는 삼원색과 무채색의 직사각형 평면 또는 프리즘이다. 요소의 동등성이 중요하다. 크기와 색상이 동등한 가치를 가질 때 평형이 발생한다.”
그림으로 조화와 화합을 이루려 했던 그의 바람은 현재 2020년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수많은 패션, 건축 회사에서 그의 그림을 모방하고 표방하여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고 있다.
칸딘스키와 몬드리안 모두 이미 너무 유명한 예술가들이다. 미술을 잘 모르는 이들 또한 그들의 그림은 평생 살면서 한 번쯤은 마주하게 된다. 둘 같은 거장이 추상이라는 형태로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는지는 사실 자세하게 알 필요는 없다. 복잡한 시대, 어지러운 세상에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그림을 보고 크게 감명받는 것도 굉장히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가끔은 추상으로 도피해, 그저 전달되는 느낌 그대로, 제멋대로 해석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알 수 없는 조형 언어 속에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바라는 대로 그 안에서 의미를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