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노트-
시간의 은유
“시간, 그게 뭐지?”
“할아버지가 시간은 해변에서 주사위 놀이를 하는 아이라고 하셨어”
영화 <영원과 하루>에 나오는 대화이다. 이것은 시간에 관한 은유이다. 때때로 무엇을 설명하려고 할 때, 나는 ‘그 무엇’의 다차원적인 의미가 기표에 충분히 담겨지지 못하는 한계를 느낄 때가 있다. 이는 실체의 외연이 너무 넓어서 말 안에 딱 맞게 들어앉지 못하고 그 의미가 넘쳐 흐르는 것인데, 이 때은유라는 수사는 의미가 확장될 수 있도록 여백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그 여백의 공간으로 흘러 넘친 것은 무엇인가. 기표를 꽉 채우고 넘쳐 흐른 여분은 앎의 연장인가, 아니면 명확한 기표에 가득 담기고 남은 것이니 미지의 나머지로서 모름에 속해야 하는 것인가. 은유의 공간에서 발생되는 잉여분은앎과 모름의 중간 정도나 양자가 구분 없이 뒤섞인 모호함 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은유는 의미를 이 모호함 쪽으로 열어두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간’은 은유나 상징 같은 대체물에 기대지 않고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철학은 시간을 그 특유의 방식으로 수천 년 동안 사유했고, 현대 물리학은 수학과 상상력을 동원하여 시간의 실체를 증명하고자 여전히 씨름하고 있다. 동아시아인들은 ‘시간’이라는 개념을 상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이해하는 우주와 인간론에는 순환적인 시간성이 흡수되어 있다. 시간에 관한 끈질긴 탐구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한 사실은, 삶의 축이 되는 ‘시간’이라는 것에 대해의심할 여지없이 일상을 살아가고, 시간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우리는 정작 시간이 무엇인지 명백하게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인류가 그토록 긴 ‘시간’을 써서 ‘시간’을 탐색해 왔건만 인류의 ‘시간’ 안에서 이 주제를 완전히 이해하고 마침표를 찍게 될 ‘시간’이 도래할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시간은 아마도 그 안에 거주하는 자가 그것을 도무지 통합적으로 알 수 없도록 은유적이고 모호한 방식으로 실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라는 진실은 철학이나 물리학이, 혹은 예술가나 한 개인이 짐짓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에도 동시에 새로운 모름의 장소로 달아나면서 그것을 알고자 하는 이를당황스럽게 만든다. 시간이 앎의 영역에 온전히 포획될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시간 안에 거주하는 자는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그것을 감각하고, 직관하고, 때로는 상상을 동원하여 시간의 일부만을 증명할 뿐이다. 시간을 사유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정도가 우리에게 허용된 범위 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을 잊고 시간이 만들어내는 리듬을 따라 춤을 추듯 사는 것이 ‘시간’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일 수도 있다.
공백을 짜는 일
‘거의 모름’인 시간에 대한 인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공백에 가깝다. 공백은 ‘이름 붙일 수 없음’이라는 장소이다. 시간은 삶과 세계 안에 공백으로 실재한다. 그러나 공백은 허무적인 공백이 아니고 역설적이지만, 세계라는 실체를 분명하게 해주는 기능적 장소이다. 나는 모든 실체에 모종의 ‘알 수 없음’이 내재하고, 그 영역의 힘으로 사물의 존재가 도리어 분명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과학과 철학은 만물을 ‘알 수 있는 대상’으로 전제하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분절하고 통합하는 과정을 반복하는데 반하여, ‘비어 있음’이 만물의 근원이라는 도가의 성찰은 우주와 인간에 내재하는 근원적 공백을 인정함으로써 만물을 다른 감각으로 인식한다. 이러한 ‘비어 있음’의 발견은 정신분석의 영역에서도 언급된다. 라깡은 인간의 정신에서 부성적이고 타자적 권력과 지배적 상징이 무력화되는 지점인 ‘대상a의 공백’이라는 것이 끊임없이 출현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돌발적으로 마주치는 공백은 외부의 규정으로부터 자유로운 본연의 주체를 만나는 가능성의 순간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난포착적이고 불확정적인 형태의 실존이 존재의 실체라고 사유하는 현대 철학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텅 빈 공백이라는 것 안에 무수한 우연성과 모름을 끌어안는,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관념적이고 통찰적 개념인 ‘공백’에 대하여 내가 이미지로 만드는 공백은 ‘알 수 없음’ 혹은 ‘미지’에 가깝다. 그럼에도 나는 과학적인 앎의 세계에 늘 매료된다. 사물을 수치적인 증명을 통해 알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명쾌한 일인가. 그러나 앎의 명징한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대상을모름의 영역에 놓아 두는 것이 내가 이미지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공백’이다. 다시 말해, 내가 공백에 주목하는 것은 사물의 중심에 내재하는 알 수 없음을 그대로 둔 채로 대상을 대하는 태도이며, 모름을 포함한 앎이 오히려 온전한 앎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물코를 뜨는 행위는 곧 ‘공백을 짜는 일’이다. 시간의 흐름을 따르는 ‘구멍 짜기’는 알 수 없는 시간을 짜고 있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것은 페넬로페이아처럼 시간의 지루함을 견디기 위한 반복 행위가 아니고 허무주의자의 의미를 거부하는 제스처도 아니다. 실의 선적 형태는 흐르는 시간을 암시하기에적합한 사물이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는 실의 또다른 특징은 유연함과 가벼움이다. 실의 유연함은 공백을 감싸고 가벼움은 질량이 없는 구멍을 긴장감있게 지탱해 줄 수 있다. 짜여지는 것들은 공백의 연속과 쌓임일 뿐, 결과물은 효용가치가 있거나 기능이 있는 사물이 아니다. 그저 얇은 실로 조금 두꺼운 줄(리본)이나 만다라와 같은 크고 작은 원들이 끊임없이 짜여진다. 짜는 행위의 핵심은 무목적성에 있다. 이것이 드러내는 것은 단지 시간이라는 비가시적 실재가 최소한의 형태로 물질화 되는 것이다.
<…where…>시리즈는 실로 그물코를 짜서 공간을 아우르는 원형 조형물인데, 이는 공간에 펼쳐진 시간에 관해 은유하는 이미지이다. 가벼이 흐르는 듯한 시간을 심리적 측면에서 보면 시간은 사건과 기억이 켜켜이 쌓이면서 특유의 무게를 갖는다. 무수한 공백들로 이루어진 투명한 시간의 만다라가 역설적이게도 육중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유는, 아마도 반복 노동을 통해 축적된 시간의 무게 때문일 것이다. 이는 그물코들이 겹겹이 쌓여 시간의 결이되고 공간으로 펼쳐지면서 드러나는 시각적인 무게이다. 시간은 공간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실체가 모호한 시간이 경험적으로 전개되는 곳은 바로 삶의 현장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로써 실제로 중력에 의하여 시-공이 함께 휘어진다고 한다. 거대한 시간의 원이 짜여지는 동안에는 그것을 이루고 있는 구멍들의 최종적이고 완벽한 조형을 예측할 수가 없다. 수공 그물이 공간에 펼쳐지는 순간, 중력과 실의 장력이 서로를물리적으로 잡아당기면서 긴장감이 생긴다. 이 긴장으로 인해 마침내 ‘공백들’의 모양이 완성되고 전체는 완만한 곡선의 형태로 중력을 따라 늘어진다.
실로 짜는 작업은 포착 불가능한 시간에 관한 인상으로 시작하여, 그 모름의 과정을 담담히 몸(손)으로 통과하는 제작의 과정을 거치는 ‘시간-이미지’이다. 이는 알 수 없는 시간을 재료 삼아 그물코를 떠가는 과정 전체를 포괄하는 이미지이다. 그물코를 짜는 일은 시간을 외부에서 정의하려 하지 않고 시간 안에서 그 미시적인 리듬을 따르는 과정이다. 시간에 대한 헤라클레이토스의 고전적 사유는 ‘흐르는 물에 두 번 발을 담궈도 그 물은 같은 물일 수 없다’라는 말로 시간의 흐름을 정의하려고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는 현상인지, 현대 과학자들의 말처럼 ‘시간은 흐르지 않는 것’인지 경험과 증명 사이에서 여전히 모호하다. 시간에 대하여 내가 알 수 있는 바는 단지, 내가 시간 안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발을 담근 강물의 시원한 감각과 발가락 사이를 간지럽히며 지나가는 물살의 감촉, 그 즐거운 경험이 어쩌면 ‘시간’ 그 자체 일지도 모르겠다.
‘해변에서 주사위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라는 시간의 은유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또 다른 시간의 비유인 ‘아이들에 의해 가장 아름답게 놀아지는 게임’이라는 말과 중첩된다. 그리고 시간을 가지고 노는 아이가 있는 풍경은 내가 알고 있는 시간으로부터 나를 환기시킨다. 내가 도무지 알 수 없는 시간에 대한 감각이 낯선 방향으로 열리고, 새로운 여백의 방향으로 슬그머니 밀려 들어간다. 해변의 이미지 안에는 무한의 경우의 수가 조합되는 주사위 놀이에빠져있는 꼬마 아이의 시간, 그의 배경으로 끝도 없이 밀려드는 잔잔한 파도, 그 무한한 운동에도 불구하고 마치 정지 화면이 되어버린 영원 같은 풍경이 중첩되어 있다. 그 모든 것이 시간이다. 그러나 이 은유의 공간을 유영하는 나는 여전히 ‘시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편지>의 시간의 무게, 그리고 ‘사라짐’
장 보드리야르는 사물을 명료하게 이해하고 싶다면, 그 사라짐과 연관 지어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거의 매일 1, 2장의 편지를 만든다. 이것은 작업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물코를 뜨며 시간을 축적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시간의 흐름을 따르는 삶의 루틴이기도 하다. <편지>를 ‘인생 작업’이라 정하고 시작한 때로부터 나의 존재가 사라지는 시점까지, 편지를 만드는 매일의 작업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반투명한 실크 천과 얇은 종이로 만들어진 <편지>는 13년 동안 켜켜이 쌓여왔고, 2019년 말에 10,000장이 완성되면서 그만큼의시간의 무게에 도달했다. 앞으로도 <편지>는 평생을 걸쳐 반복적인 리듬으로 조용한 결을 만들어내며 쌓여갈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이르러 <편지>가 더이상 시간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을 만큼 쌓이고 ‘임계점’에 다다르면 모든 편지가 연기처럼 사라지는 상상을 한다. 실재성이 극도로 과잉되면필연적으로 사라짐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소실의 순간이 오면 편지의 낱장들이 순식간에 수만 마리의 새처럼 날아올라 흩어지는 이미지 같은것이다. <편지>의 무게가 무너지는 힘으로 쏟아 내리지 않고, 연기처럼 사라지는 에너지로 환원되는 화학변화가 가능할까. 이런 상상은 편지가 제작과축적되기를 반복하다가 어느 시점에 익명의 사람들에게 모두 발송되어 흩어지게 하는 아이디어로 발전되었다. 수만 장의 편지는 그런 방식으로 사라질것이다. 모든 존재의 의미가 그것의 사라짐으로써 온전해지는 것처럼, 작품 <편지>도 사라짐에 도달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로그물코를 짜는 작업과 마찬가지로, 인생 작업 <편지> 역시 시간을 따르는 반복적인 행위와 축적의 무게를 거쳐 그 이후에 흩어져서 사라지는 텅 빈 상태까지 포함하는 ‘시간-이미지’가 된다.
편지의 내용은 매우 간단하다. 얇은 종이 한 장 위에 하루에 한 단어, 때론 두 세 음절 정도의 단어를 반복해서 타이핑 한다. 글자의 의미는 일상적인 것부터 관념적인 단어까지 날마다 다양하다. 단어를 타이핑 하면서 내가 즐거워하는 지점은, 말의 의미 보다는 단어의 반복이 그려내는 선적 형태이다. 이모양은 <리본짜기>의 형태와 유사한데, 문자의 의미는 타이핑이 반복되고 글자가 중첩되는 과정에서 가독성이 결여되면서, 마치 실로 짠 그물코의 연속인 선의 형태처럼 쓰여진다. 이 과정을 통과하며 단어의 의미는 일정하고 반복적인 수동 타자기의 소리 뒤로 숨고, 기호는 점차적으로 이미지로 바뀐다.결국 의미는 ‘침묵’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알랭 코르뱅은 침묵이 '성스러운 무 효용성'을 지닌 유일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내가 주목하는 침묵된 공간, 즉 ‘공백’을 닮았다.
<…where…>의 그물코 짜기와 <편지>를 통해 지속적으로 만들어지는 진행 형태의 이미지들은 ‘시간’을 중심에 둔 하나의 은유이다. 은유는 의미를 앎과 모름 사이에 열어두고 그 중간 지역을 유영하는 즐거움을 준다. 보드리야르는 ‘시적인 언어가 주는 강렬한 쾌감은 언어가 그 물질성, 글자 그대로의 해석 속에서 의미를 통과하지 않고서 그 자체로서 기능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의미가 사라지는 언어의 소실점에 이르면 그 언어 자체에 매혹될 것이라고도 했다. 이처럼 나는 ‘시간-이미지’가 그 지속의 과정과 함께 열린 은유가 되어 언어가 소실되고 의미가 침묵하는 텅 빈 순간이 도래하는것을 기대한다. 한 줌의 ‘앎’과 열린 가능성으로서의 ‘모름’의 공간, 다시 말해 이미지가 그 자체로 은유되는 여백의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 내가만드는 ‘시간-이미지’이며, <시간을 은유하는 작품 제목>이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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