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와 관계를 맺기 위한 '말하기'에 요령이 있을까? 유려하게 말하는 이를 달변가라 칭하지만, 수사는 말의 진위를 의심하거나 가볍게 여기게도 한다.한편 말의 본새가 서투른 이는 쉽게 얕보게 되지만 그렇게 꾹꾹 눌러 전하는 말의 무게 역시 쉬이 넘기기 어렵다.
눌변의 무게는 그럼 어디에서 오고 왜 오래 남을까. 혼잣말을 더듬는 이는 드물다. 말을 더듬는다는 것은 말이 밖(타인)으로 나가는 과정에서 공백이 침투하는 것, 모호함을 맞닥뜨리는 일이다. 그것은 단순히 속도의 문제일 수도 있고 긴장의 발현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 늘어지고, 끊기고, 급기야 사라졌던 그 시간으로 말의 목적이 성급히 달성되는 것을 지체시킬 수 있다. 다른 여지를 상상하는 것,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다. 전시 《눌변가》에서는 관계맺기를 위한 기존의 통념과는 조금은 다른,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개인들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이곳의 말하기는 입을 통해 나오는 소리 언어를 넘어 리듬이 되고 행위가 되며 조형이 된다. 제목으로 더듬거리는 말씨를 뜻하는 눌변에 '가'를 붙여 눌변을 능숙하게 하는 사람(家)과 눌변의 노래(歌)라는 다의적인 해석을 유도했다. 전시에는 리듬과 행위, 조형성, 분절된 언어로 발화된 개인의 이야기를 다루는 회화, 영상, 설치 등 6여 점의 작품을통해 말이 안에서 머무는 순간, 그로부터 사유를 발생시키는 말하기의 다양한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소통을 둘러싼 기존의 통념에 대한 문제제기이자 외형 아래에 담겨있는 개인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풍부한 훈련이 될 것이다.
무진형제의 영상작품 <여름으로 가는 문>(2018)은 한여름, 매일 쉼 없이 줄넘기를 하는 소년을 조명한다. 성장기에 있는 소년은 외형적으로는 다 자란어른처럼 보이지만 아직 세상과 어떻게 소통을 해야 할지 어렵기만 하다. 어른들의 물음에 "지금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그건 그냥 하는 거야"라고 말할 뿐이지만, 지독하게 더운 날씨에 매일 4000개씩 넘는 줄넘기는 단순히 '그냥'으로 넘기기 어려운 어떤 수행 혹은 선언처럼 보인다.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정서적 긴장은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반복적인 리듬과 근경에서 부감으로 이어지는 시선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줄넘기의 줄이 공간을 가르고아스팔트 바닥을 쳐 낼 때 발생하는 소리와 화면 가득 포착된 땀에 젖은 셔츠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매우 복합적이다. 언어가 지극히 배제된 영상은 행위의 결과인 소리와 땀, 그로부터 연상되는 냄새와 같이 청각, 시각, 후각을 자극하는 감각을 극대화하여 언어가 아닌 몸을 통해 세상과 관계 맺고 발화하는 인물에 대해 보다 깊이 있게 살피도록 한다.
노은주가 줄곧 관심을 가져온 대상들에게는 별다른 이름이 없다. 이름이 붙여지길 기다리고 있거나, 혹은 본래의 기능과 역할이 탈각된 것들이다. 작가는 어디에도 포섭되지 않는 대상들로부터 주변을 인지하고 그 경험을 형태로 재현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 꽤나 지난한 과정을 거친다. 작가는 찰나의 경험을 재빠르게 드로잉으로 기록하고, 다시 손으로 더듬으며 조각으로 만든 뒤에 비로소 캔버스 위로 옮긴다. 매일 마주한 고층 아파트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주변의 풍경을 뒤바꿔버린 경험에서 그려진 <야경>, 끈적하게 녹아내리고 있는 액체가 무엇의 전신을 덮어 가고 있는 <녹는형태연습>, 틈 사이로 액체가 뿜어져 내리고 있는 <Dropping>처럼 단단한 물성이 극적인 변화의 과정 안에 있는 장면은 파편적 경험에서 비롯된 감각을 점진적으로 발전시키며 매우 촉각적으로 재현되어 있다. 작가의 조형은 지난한 우회의 과정으로 만들어지며, 고정된 상태가 아닌 흐르는 이야기로써 더듬더듬 드러난다. 이름 없는 것에 서사를 만드는 작가의 시도는 그래서 대상을 보다 유연하고 깊이 있게 보도록 이끈다. 말을 입안에서 오래 고르다 묵직하게 뱉어내는 눌변가처럼.
이윤이는 개인의 경험과 기억에서 쏟아져 나온 상이한 감각들을 재현하기 위해 언어, 음악, 움직임을 가져온다. 영상작품 <메아리>는 친구와 떠난 여행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각각의 요소들은 완결된 형태로 관객에게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분절되어 있거나 반복해서 발화된다. 메아리는 자신에게서 던져진 소리가 어딘가에 부딪혀 다시 자신에게 되돌아온 소리이다. 영상에는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하지만 두 사람은 다수의 목소리, 화자, 문체, 그러니까 다중적으로 재현되어 있다. 이들은 서로의 말을 반복하거나 조금씩 변주하기도 하며, 시공을 단숨에 넘나들기도 하고, 느닷없는 외부의 소음도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아름다운 리듬을 갖고 있다. 메아리와 같이 주체는 없고 서로가 서로의 반영의 결과로 존재하는 이 짧은 여행기는 한 번에 파악하기 어려운파편의 다발이며 결론에 도달해도 하나로 모이지 않는다. 하지만 끝끝내 묵직하게 마음에 남는 단어의 조각들이 있다. 그리고 관객은 이들 단어가 조금의 시간차를 두고 여러 의미로 파생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전시는 행위의 반복이 언어의 전복으로 이어지는 영상, 정교하고 능숙하게 다루는 언어가 그 의미를 초월해 가는 과정, 공백이자 그 어디에도 포섭되지않았던 감각들을 길게 뽑아내며, 언어 안에 작동하고 있는 감정과 사고의 미시적인 역학을 흔들고자 한다. 본 전시는 구기동에 위치한 전시공간 아트 스페이스 풀과 낙원악기상가 4층에 자리 잡은 d/p가 새롭게 시도한 공간 교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d/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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