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장은 검열되었습니다
이길빈 (전시기획)
제도적 암묵성, 친밀한 위계, 반복된 실패 경험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에게 검열을 내리는 법을 인생 전반에 걸쳐 학습한다. 이 문장이 삭제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은 곧 사회가 표현을 다루는 방식이며, 우리가 무의식중에 체화한 침묵의 기술이다. 오늘날의 검열은 알고리즘, 플랫폼의 기준, 익명성 뒤의 비난과 자기검열이라는 형태로 더욱 미세하고 교묘하게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억압의 장치는 한국 사회라는 특수한 맥락 속에서, 특히 지역 예술 생태계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지역은 자주 ‘너무 잘 아는 관계’들로 이루어져 있고, 특히나 전주는 상대적으로 많은 예술가가 포진된 도시로 적은 기회 속에서 모두가 행동에 조심성을 더해가며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분위기가 뿌리 깊게 조성되어 왔다. 유교적 전통이 남긴 공동체 중심적인 분위기 안에 보이지 않는 검열과 계산된 온기가 이중적으로 얽혀있다는 점은 이 안에 속한 이라면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술은 사회의 감각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그로 인해 도전과 실험을 반복하는 영역이지만 오늘날의 언어들은 지독한 복잡성을 띠며 PC 주의 (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 그리고 ‘ㅇㅇ감수성’ 등을 말하며 끊임없이 자기 검열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예술은 본래 불편함에서 출발한다. 관객의 인식에 파열을 내고, 익숙한 질서에 금을 긋는다.
이 전시는 지역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불편함을 감각하고 삶의 주변부를 수면 위로 드러내는 5명의 작가를 조명한다. 그들의 말하기 방식을 통과하며 주체 없이 제지당한 ‘어떤 감각’을 되살리고자 한다.
버려진 공간, 소외된 사물, 불편한 진실, 방치된 생애, 형체 없는 규율… 살아가며 마주하고 있지만 마주 보이지 않는 면면을 작업으로 불러들이는 다섯 작가의 작품은 ‘없음’에 주목하여 ‘있음’을 감각하게 한다. 직접적으로 진술되지 않은 그들의 문장은 관객에게 교묘히 접근해 스스로 불편함을 조율하며 서사를 감지하여 언어와 표현의 경계 너머를 탐색하게 한다.
이 전시가 제안하는 지점은 외침이 아니라 사라진 감각의 회복이다. 우리는 더 이상 명시적인 형태로만 검열을 경험하지 않는다. ’불쾌함’과 ‘불편함’을 제거한 발화만이 공적 공간에 안착한 이 시대에, 이 전시는 말하지 않은 감정들, 주워 담지 못한 문장들, 설명할 수 없는 조형들에 귀 기울인다.
전시 기획 의뢰를 통해 제시된 키워드는 두 가지였다. 관계미학과 전북미술의 묵시적 태도. 우리는 전시를 통해 검열되었다고 여겨지는 문장들이 과연 검열된 것인지 질문해 본다. 검열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목에 핏대를 세우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절대로 ‘소리 없는 아우성’만은 아니다.
기관을 벗어나 유휴공간에서 발생하는 이 전시가 무조건 살아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다. 제도권에 의해 착취되는 예술가의 노동력은 자주적으로 그러나 몹시 흔들리며 지탱되어 왔다. 매해 새롭게 요구되는 정량 성과와 목표치에 맞추어 변화하고, 양산되는 사업을 쫓으며 자아 박탈감과 무력감에 사로잡힐 이들을 대변할 수 있길 바란다. 부디 이러한 움직임이 또다시 시작점에 머물지 않도록 끊임없이 문제를 야기하는 기관과 동료들, 그리고 예술가들이 늘어나길 바란다.
이번 전시는 지워졌던 문장 사이, 침묵과 발화의 경계에서 다시 관계를 묻는 실천이다. 끝내 내뱉지 못했던 말들을 건네고, 침묵이라는 검열을 공동의 감각으로 되돌려 놓는 자리이다. 이 글을 나가며 관람을 마친 관객들에게 묻고 싶다. 이 작품은, 이 도시는, 이 문장은 검열되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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