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잡이를 잡기 전에
문틈 사이로 들여다본다. 고개를 기울이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가까이 다가설수록 경계가 흐려지는, 그런 장면이 있다. 송민서의 조각은 바로 그 장면에서 출발한다. 손잡이를 앞에 두고 잠시 멈추는 몸, 그 순간을 기다리는 구조. 이번 전시는 문을 여는 행위보다, 열기 전의 망설임과 머뭇거림을 응시한다. 손잡이는 기능이라기보다 하나의 제스처이며, 문은 단순한 경로가 아니라 관객을 머뭇거리게 하는 경계다.
Grab 시리즈는 처음, 손에 쥘 수 있는 크기의 오브제로 시작되었다. 팬데믹 시기, 타인과의 접촉이 제한되던 시절에 ‘손’은 더욱 상징적인 신체가 되었고, 그 안에서 잡는 행위는 단순한 감각을 넘어 관계에 대한 질문으로 작동했다. 작가는 이후 이 시리즈를 통해 조형 언어를 ‘감응의 조건’으로 확장해왔다. 이 전시에서 그는 조형적 제스처를 완결된 동작이 아니라, 접촉 직전의 불확실성과 지연된 몸의 상태로 되돌려 세운다.
작가는 어린 시절 문틈 너머를 엿보던 기억에서 이번 작업의 실마리를 찾았다. 그때의 몸짓은 단순히 ‘본다’는 행위에 머무르지 않았다. 살짝 열린 틈에 귀 기울이며 가까이 다가가던 몸, 조용히 열리길 기다리던 시간. 그의 조형은 바로 그 시선과 태도에서 시작된다. 이번 작업은 확신 없이 다가가는 움직임, 손이 닿기 직전의 거리, 보이지 않는 것과 마주하는 방식을 되묻는다. 틈은 구조물이 아니라, 잠시 머무는 자리이고, 관계가 맺어지기 전의 조용한 준비 상태다. 관객은 그 틈 앞에서 속도를 늦추고, 다가서며, 어떤 해석보다 신체의 리듬으로 전시에 접속한다. 이 전시는 그런 머뭇거림 자체를 하나의 조각적 조건으로 간주한다.
이번 작업은 작가에게도 하나의 귀환이었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서의 첫 작업을 준비하며, 자신의 언어를 다시 꺼내어 시험하고 조율해야 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간, 닿았지만 아직 이어지지 않은 감각들 속에서 이를 ‘한국과의 악수’라고 불렀다. 그 악수는 종종 어긋나고, 타이밍이 맞지 않으며, 의미 없이 지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악수라는 행위 자체는 분명한 접촉의 의지이고, 그 실패조차 관계 맺기의 한 방식이 될 수 있다. 이번 작업은 손잡이를 단단히 쥐기보다는, 일부러 놓쳐보려는 제스처에서 출발한다. 어긋남을 통해 생겨나는 거리와 여백, 그 가능성에 집중한다.
조각은 눈에 보이기 전에 먼저 몸에 닿을 수 있다. 작동하지 않는 손잡이, 어딘가를 암시하는 틈, 혹은 닫혀 있는 경계 앞에서 관객은 멈추고, 돌아서거나 다시 서본다. 전시는 관람자에게 해석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질문이 생겨나기를 기다린다. 이건 열리는 문일까, 나는 지금 무엇을 붙잡으려는가. 작가는 그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그런 질문이 떠오르는 순간, 관객은 이미 작품의 일부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드러낸다.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시도는 늘 그 자체로 완전하지 않다. 전시는 형태를 완성하려 하기보다는, 그 이전의 망설임, 작동하지 않는 구조들 속에 머무르는 몸의 상태에 주목한다. 손이 닿지 않지만 멈추는 위치, 그 안에서 피어나는 낯선 감정들. 송민서의 이번 작업은 그러한 순간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전시는 완성보다 과정에 가깝고, 조형이라기보다 흔들리는 몸의 위치에 더 가깝다. 문이 열리기 전, 손이 닿기 전, 그 어딘가에서 발생하는 짧은 움직임들. 그것이 시작점이며, 동시에 목적지다.
정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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