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시간의 자리를 고수하면서 서로를 돕는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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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와 시간의 계보학, 호소다 마모루
호소다 마모루의 <미래의 미라이>를 보며 느꼈던 것은 거대한 이질감이다. 무언가 다르다는 느낌이 아니라 낯선 건물의 벽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가시지 않는 이질감에 계속 질문을 던져본다. 가족의 계보를 다루는 이 영화의 계보를 흘러 올라가다 보면 무엇이 나올까. 나는 지금 등장인물의 목소리나 이야기의 빈틈을 지적하려는 게 아니다. 호소다 마모루가 가족의 계보를 표현하기 위해 언급했던 이미지와 시간의 계보학에 물음을 던지고 싶다.

영화 <미래의 미라이>의 작품 포스터 © 얼리버드픽쳐스
증거를 제시하는 것, 촉을 제공하는 것
호소다 마모루는 (대부분 일본 매체가 그러하듯) 우리가 같은 심상의 세계에 속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흔히 ‘붉은 실’에 빗대는 이것은 신카이 마코토가 <너의 이름은>에서 채용한 것이기도 하다. 다만 호소다 마모루는 그 인연의 끈이 과거나 미래에서 온 게 아니라 ‘지금-여기’에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우리들의 워 게임!>에서는,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동시에 관람하는 전 세계의 수억 명으로부터 편지가 도착하고, 그 힘으로 위기는 극복된다. 이때 파국을 암시하는 핵미사일 투하의 카운트다운은 아슬아슬하게 정지된다. 말하자면 지금 이 순간에 그들을 관망하던 수억 명의 사람들이 없었을 때 이 카운트다운은 멈추지 않았으리라고 그는 말한다.
수 억이라는 사람이 주인공을 응원할 때 기적은 일어나고 이야기는 진행된다. 이런 기적이 현실에서도 일어나기를 우리는 간절히 바라기 때문에 이 영화는 감동적일 수밖에 없다. 사실은 수억 명이 하나의 순간을 간절히 염원하는 게 기적과도 같은 순간일 테다. 월드컵 경기의 종료 수 초를 남기고 들어가는 골이라던가, 악인이 처벌되기를 바라며 법정 선고를 생중계로 바라보던 이들이 판사의 선고를 들으며 내지르는 함성이 있을 테니.
바로 그 순간의 촉을 모두가 공유한다는 건 시냅스 사이의 신경전달물질이 세계를 가로지르는 느낌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본다. <썸머워즈>의 계보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된다. 우리의 뇌에서 정보를 전달하는 시냅스 사이에서 그 정보교환의 순간을 인터넷이라는 우주/뇌에 빗대어 도박이라는 형태의 ‘촉’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영화는 이미지가 아니라 심상의 세계에 들어선다.
눈을 감았을 때 촉이 오는 순간 눈을 뜨면 그곳에는 순간의 연장선으로 이어진 세계가 있다. 호소다 마모루의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소녀가 눈을 감았을 때 다가오는 시간의 압박감은 그녀가 타임리프를 하는 묘사로 이어진다. 그런 타임리프 속에는 순간의 연장선이 스쳐 지나가고 있으며 이 영화는 그런 순간들이 과거나 미래의 ‘순간’이 아니라 ‘지금-여기’에 존재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호소다 마모루에게 순간이란 시간 속에 박힌 것이 아니라 주체를 중심으로 구성되는 학습의 결과물이다. 즉 그는 시간이란 게 절대적이지 않는다고 믿는 것 같다.
그의 시간은 평행 선상에 나열된 과거-현재-미래의 모음집이 아니다. 그가 그리는 시간의 모습이란 해변에서 나라는 이름의 금속탐지기로 순간이라는 이름의 귀금속을 끌어당기는 것과도 같다. 이 해변에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고 서로를 알아서 피해가는데, 그들의 금속탐지기가 하나의 귀금속을 향해 비프음을 울릴 때가 그들의 순간이 이어지는 때라고 호소다 마모루는 말한다. 이른바 이것은 순간의 ‘촉’이다.
호소다 마모루의 후기작에서 ‘촉’에 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던 작품은 <늑대아이>다. 늑대아이의 큰 줄기가 인간과 늑대라는 다른 세계의 중재자로 설정된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이야기의 후반부는 인간과 늑대라는 상반된 세계의 법칙을 세우는 것에 중점을 둔다. 인간과 늑대를 중재하는 어머니 아래에서 중재자의 본성을 물려받은 두 아이가 갈림길에 서는 순간에는 늘 촉이 함께 했다. 아들은 늑대로서의 촉을 감지하고는 산으로 뛰쳐나가 버리며 딸아이는 남자아이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그 사랑은 동물적인 그것이 아니라 인간의 심성임을 깨닫는다. 여기서 방점은 그들이 갈림길에 선다는 게 아니라, 같은 순간을 살아온 이들의 삶이 다른 곳으로 향할 때라는 점이다. 부모로부터 자녀가 갈라져 나올 때가 아니라, 중재의 순간이 자발적으로 분열될 때 그것이 상처로 남지 않는 방법을 호소다 마모루는 말하고 있었다. 요컨대 <늑대아이>는 그전까지의 호소다 마모루의 영화와 다른 방향성을 지닌 셈이어서 나는 당황하고야 말았다. 그전의 영화들이 흩어진 시간을 모으는 서사라면 이 영화에는 어떻게 흩어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었다.
그러므로 호소다 마모루의 영화에 대해서 내가 다다른 지점은 과연 그 심상의 세계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의 문제였다. 그의 영화에는 심상의 세계라는 개인적이고 물질 및 표면화될 수 없는 시공간이 늘 존재했다. <우리들의 워 게임!>의 디지몬 월드나 <썸머워즈>의 오즈 플랫폼이나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타임리프 시간이나 <괴물의 아이>에서 아이가 들어선 동물의 세계와 <늑대아이>에서 부모와 자녀가 시골로 이사한 것을 나열해볼 수 있겠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 공간에 대해 인물의 본성을 바꾸어 놓는 신화화된 공간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심상과 신화의 경계는 구분하기 쉽지 않은데 구분하지 않으면 오독의 이유가 되기도 하므로 이 문제는 정말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것이었다.
<늑대아이>의 모성은 외딴 시골에서 기원하는 것일까. 영화를 보다 보면 자연스레 그런 물음이 떠오른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소녀의 행동은 사춘기이기 때문에 저런 것일까 하는 물음도 있다. <우리들의 워 게임!>이나 <썸머워즈>는 디지털 아바타가 자신에 비견될 수 있느냐고 묻는데, 만약 그들이 디지털 세계를 체현하지 못했더라도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괴물의 아이>는 완전히 단절된 세계에 자리잡아 아버지의 부재를 그곳에서 소환해보려는 시도가 담겨있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들이 세계에 진입할 때 부재를 실감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요컨대 나는 그들의 몸담은 심상의 세계란 그들의 부재를 물질화하는 곳, 시공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주인공의 부재를 물질화하는 게 심상의 세계이고 그것이 영화의 무대인데,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말하자면 주인공의 부재를 ‘체현’하는 게 아니던가. 이를테면 <괴물의 아이>의 후반부에 동화 속의 백경이 그들의 현실로 튀어나오는 장면이 있고, 소년의 뒤에 숨은 소녀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나는 이 장면이 애니메이션적인 상상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그들의 현실이다.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영화는 진행될 수 없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가 이 영화에 이입하는 게 어려워진다. 그건 그들의 세계이고 심상이고 그것이 공유되지 않는다면, 이 고래가 소녀의 눈에 목격되지 않았다면 소년은 그저 허공에 헛손질하는 것처럼 보일 텐데도 그 순간 소년의 세계는 무너져버린다. 다시 말해 그의 행동에 마땅한 당위성이 포착되지 않을 때 그의 행동은 이상하게 보이고, 그 당위성은 그의 세계 속에 있기에 사실상 그를 이해하는 것만이 이 영화를 이해하는 단초이다.
쉽게 말해 같은 세계에 있더라도 세계는 당신을 이해해주지 않는다. 고 호소다 마모루는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해답은 이것이 같은 세계라고 증거를 제시하는 것, 촉을 제공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공유 가능한 가치라고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숨을 쉬는 게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우리가 숨을 쉰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때 누군가가 당신은 숨을 쉬고 있다고 넌지시 말하면 어느새 숨쉬기를 인식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들의 워 게임!>의 클라이맥스에 자신의 세계에도 핵미사일이 떨어질 것이라는 점을 인지한 이들이 그들에게 힘을 보태게 된 것처럼, 같은 세상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려면 그만한 ‘촉’ 혹은 ‘충격’이 필요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나는 갑자기 서글퍼졌다.

영화 <미래의 미라이>의 한 장면 © 얼리버드픽쳐스
시간의 층계, 가족의 계보학
영화를 보고 나와 곰곰이 생각하는데 옆에서 지나가는 이들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모르겠다고 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말을 듣고는 이 이질감에 딱히 물음을 세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파편화된 시각을 가진 이 영화에는 여러 이미지가 서로 호흡하지 못하는 불협화음이 담겨있다. 요컨대 이 불협화음은 이야기로서는 거의 무책임한 것에 가깝다. 하나의 에피소드가 강한 자의식을 갖는데, 그런 것들 것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 영화에는 관객으로 하여금 해석의 길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한다. 따로 먹으면 맛있는 것도 한데 섞어 놓으면 맛이 이상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우리가 시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이미지의 이질감이다. 감독이 원하는 것은 그런 이미지에서 속뜻을 읽어내 가족이라는 맥락의 중심틀로 재배열하는 것이었을 테지만, 영화는 시각예술이기에 이미지를 걷어내고 속뜻만을 보기란 쉽지 않다. 더군다나 이것은 눈을 거치기 이전에 우리의 뇌에 있던 이미지의 산물이다. 요컨대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의 장점이 자유분방한 이미지의 실현이라면, 상상과 이미지 간에 어떠한 연결고리가 있어야 할 텐데, 그 연결고리를 끊고 사진첩과 같은 방식의 분절을 택한 이 영화는 일반 관객에게 그저 큰 이질감만을 남길 뿐이다.
아마도 이런 파편화는 옴니버스식으로 나열된 서사의 구조에서 기인하는 것일 테다. 나는 호소다 마모루가 그런 방식을 채택한 것에 대해 큰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호평하는 쪽에 가까웠고 왜 나와 그들의 의견이 다르게 되었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분명 감독의 전작이 크게 히트했고 그에 따라 대중에게 인기를 얻었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그의 전작들이 인물 간의 연대에 의존했다는 이유가 더 크다.
그러나 연대라는 표현은 많은 것을 담지 못한다. 나는 오히려 이 단어를 소속감으로 바꾸어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연대라는 표현을 쓸 경우, 그것이 <썸머워즈>나 <늑대아이>에는 적합할 수 있겠으나 <미래의 미라이>에 적용될 때는 큰 파국을 낳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는 가족의 계보학을 연구하는 이가 있고, 그런 계보를 거슬러 오르다 보면 2차 세계대전 시기의 증조할아버지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그 일뿐이라고 호소다 마모루는 이야기했지만, 일본과 인접한 국가이자 그보다 아래의 시점에서 역사를 겪은 우리에게 그 장면은 마냥 웃으면서 볼 수만은 없다. 즉 그것은 가족의 계보가 아니라 폭력의 역사를 연대로서 긍정하는 게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가족의 계보학을 연대로서 말하는 게 아니라 소속감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것도 가족의 소속감이 아니라, 가족의 계보에 소속되어 있음을 긍정한다. 조금은 서투르지만 나무를 색인에 빗대어 말하는 장면은 그런 것을 말하노라고 친절히 설명해주는 것일 테다. 이 묘사에는 이 나무도 뿌리만이 있었을 때가 있었다는 뜻과 그에 비견하는 가족의 뿌리가 있음이 담겨있다. 여기서 방점은 뿌리가 아니라 ‘때’이다. 뿌리가 돋았을 때 그 얇은 가지에는 최초의 나이테가 기록되어있다. 이 나이테는 계절마다 새겨지고 말하자면 그 계절은 나이테라는 둥근 띠로 기록된다. 다시 말해서 이 나무가 품고 있는 것은 시간의 층계이며 그래서 이것은 색인이다. 현재의 가족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시간의 층계, 가족의 계보학이라면서 호소다 마모루는 이 영화를 에피소드로 분리했다. 그리고 이 나무의 모습을 나이테의 연대로 보면 당연히 오독의 우려가 있고, 이 시간은 나무의 시간으로 종속되어 있다고 보는 게 맞을 테다.

영화 <미래의 미라이>의 한 장면 © 얼리버드픽쳐스
어린아이는 ‘걱정 없이’ 사는 것
호소다 마모루는 어린아이가 길을 잃고 그 세계에서 사라져버리는 게 아니라 그것 또한 성장의 한 과정이라고, 오히려 어린아이는 그런 혼란스러움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긍정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유달리 투정부리는 쿤의 모습이 강조되는 것 같다. 나는 나이에 맞지 않게 구태의연한 아이가 어떤 성장담을 풀어내기에 좋을 수는 있어도 그것이 자연스럽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호소다 마모루에 따르면 그들이 현재 존재하는 감정, 시간, 공간, 풍경, 위치, 자리는 변화가 아니라 고수의 지점이며 바로 이곳에서 다음을 예견해보는 게 호소다 영화의 주요 흐름이다.
하지만 쿤이 미래의 도쿄역에서 길을 잃고 로봇 역무원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깨우치라고 일갈 받는 장면은 다소 노골적이었다. 역무원에 따르면 어린아이는 자신을 인계할 사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 지옥의 형상을 한 열차에 실려 어딘가로 사라져버리는 존재이다. 요컨대 이 어린아이는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만큼 삶에 물들지 않았고 반대로 그만큼의 앎이 없기도 하므로, 이 열차가 향하는 곳은 지옥이 아니라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생각 외의 시공간 무(無)일 테다. 말하자면 이 열차가 향하는 곳은 시간의 계보, 자신이 여태까지 걸어온 삶의 발자취를 그 반대로 되돌려 보내는 것, 태초의 상태인 자궁보다 더 근원적인 위치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이것은 빅뱅 이전으로의 회귀, 그렇다면 이때 빅뱅에 비유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나는 그런 빅뱅이 ‘촉’, 혹은 ‘순간’으로 대변되는 단어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는 사진첩의 순간들을 따라가는 쿤의 모습과 그들을 뒷받침하는 외증조할아버지의 시대와 어머니의 어린 시절과 미라이의 미래시절이 있다. 말하자면 이것은 바르트의 논의처럼 우리가 사진 속에서 투영하는 내면의 순간, 푼크툼의 찌르기가 사진 속의 시공간으로 진행될 때 우리의 시공간이 그곳에 삽입될 수 있는지의 문제이다. 이때 호소다 마모루의 말에 따르면 그런 찌르기는 주사기의 바늘처럼 한번 찔렀다가 다시금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 주사기의 내용물은 우리가 그곳에서 찾은 삶의 의미이며 그래서 이 시공간은 자리를 고수하면서도 속에 받아들인 무언가를 통해 다음 지점으로 나아갈 힘을 얻게 된다.
말하자면 이 플랫폼은 철도 안에 담긴 개인의 시간을 하나의 공간에 담아 여러 개의 지점으로 실어 나른다. 나는 철도라는 것의 시간적 개념을 여러 개인이 하나의 객차에 모였다가 다시금 하나의 공간에 내려 여러 개의 출구로 나가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요컨대 플랫폼은 일종의 시공간 그물망이다. 또한 이것은 온라인 네트워크가 현실에서 존재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다르게 말하면 이 온라인 네트워크가 호소다 마모루가 <썸머워즈>에서 말했던 ‘오즈’, 그 심상의 세계의 표현이라고 가정할 때 쿤이 도달한 미래의 도쿄역은 쿤이 앞으로 나아갈 곳의 선택지, 수많은 이들의 지금-여기가 교차하는 지점일 테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의 도쿄역을 조금은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여태까지 호소다 마모루의 영화가 같은 세계에서 다른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이들을 하나로 불러모으는 것, 그 촉에 집중했다면 반대로 이 영화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에게 소중한 이, 미라이를 이곳에서 기억해내라며 일갈하고 있었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다. 이것은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게 아니라 개인이 교차하는 플랫폼 안에서 특정한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다는 점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그동안에 호소다 마모루의 영화가 공동체 속에서 고독해지는 자신이 공동체를 대변하는 무언가를 찾아 떠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이 영화는 자신이 그 공동체를 대변하는 것이며 공동체 속에서 고독해지는 그를 찾아 보듬어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늑대아이>의 그녀가 시골 공동체와 어머니 공동체 인간 공동체 가족 공동체를 대변해야 함을 느꼈을 때 어깨 위에 눌린 무게는 마치 그녀를 채근하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영화의 시점이 어른이 아니라 아이로 옮겨갈 때, 그 무게 또한 역전될 것만 같았는데 어린아이라고 다를 것은 없어 보였다. 말하자면 우리는 어른이기에 어린아이를 타자로 생각하면서 어린아이는 ‘걱정 없이’ 사는 것으로 여기지만,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고민과 고충이 있을 테다. 이것은 지금-여기 혹은 지금-이곳을 개인이 모두 갖고 품고 느끼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요컨대 우리가 플랫폼 안의 인파를 볼 때 그것은 거시적으로 인파에 불과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민족 얼굴 성별 나이가 모두 다양하고, 그들이 향하는 장소와 출발한 장소 또한 각각 다를 것이며, 그래서 이 플랫폼은 지금-여기가 수없이 뒤섞인 삶이라는 이름의 열차가 드나드는 장소이다.

영화 <미래의 미라이>의 한 장면 © 얼리버드픽쳐스
이미지와 시간의 계보학
그 무엇보다 호소다 마모루가 나무와 플랫폼이라는 두 가지 사실을 이어놓은 것도 신기하다. 나무가 분리된 층위의 시공간이라면 그것은 가족의 역사에 비견될 수 있는데, 플랫폼은 같은 시공간에서 개인의 시간과 공간을 살아가는 이들의 집합이다. 말하자면 그 나무는 하나의 층위마다 각각의 플랫폼을 지니고 있을 테고 그렇다면 쿤이 도달한 미래의 플랫폼은 그 나무 중 어디에 자리한 것일까? 그곳이 미래라고 해서 나무의 가장 바깥쪽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뒤에서 앞으로 향하는 선형적인 시간관을 가진 것일 테고, 그곳이 지금보다 어두운 미래일 때는 나무의 가장 안쪽에 자리할 수도 있을 테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어느 외딴 시공간에 떨어진 쿤이 자신의 앞에 도착하는 열차에 덥석 올라타게 된 그 장면에 바로 미래의 쿤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래의 쿤은 현재의 쿤을 알아보았으면서도 (습관을 알아챈다) 반가운 척은 하지 않는다. 게다가 현재의 쿤은 미래의 쿤을 알아보지 못한다. 이는 어쩌면 현재는 미래를 알 수 없고 미래는 과거를 알 수 있는 시간의 선형성, 즉 이 영화의 시간관은 안에서 바깥으로 향하는 나이테를 그리고 있을 것이며, 말하자면 플랫폼에서 쿤이 미라이와 함께 떠나 도착한 미래는 나무의 가장 겉 부분일 테다. 즉 이것은 표면이다.
그래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 영화가 그리는 것이 나무의 가장 겉 부분이라면 이 겉 부분의 정의는 우리가 나무를 인식할 수 있는 표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공간에서 눈으로 인지되는 부분을 뜻하는 게 아닐까 하고. 그런데 그 시선이 사진첩으로 향할 때 우리는 현재에서 과거의 순간을 목격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것은 나무의 표면에서 그 속의 나이테를 단박에 파악하는 작업이다. 심상의 세계에서 표면을 읽어내어 그 속에 담긴 시간의 여러 층위를 발견하는 것, 이것은 현재에서 과거를 흩어보려는 시도가 담긴 영화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현실에 있을 수가 없는 일이고 그렇기에 현실에 있도록 해야 한다고 호소다 마모루는 말하는 것 같다.
같은 맥락으로 나는 이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쿤 집안의 반려견인 유코가 사람이 되어 나타날 때 그것이 갑작스러웠지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애니메이션적 상상력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상상력이고, 요컨대 그것은 어른이 아이의 세계로 진입해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면 된다. <괴물의 아이>에서 어린 소년이 길을 잃어버린 장소가 횡단보도가 교차하는 대도시의 한복판이라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또한 이 다음 장면에서 소년이 다른 시공간으로 들어선다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그는 주어진 선택지대로 어떤 세계로 진입해야만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서 있기만 하면 된다.
예를 들어 이쪽에서 저쪽으로 향하는 열차가 있다면, 저쪽에서 이쪽으로의 열차가 있고, 이 과정이 반복되는 건 그저 같은 자리를 돌기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열차가 순환하는 과정에 시간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호소다 마모루는 바로 그 점을 말하고 싶었을 테다. 플랫폼 안에 모여든 이들은 이곳이 플랫폼이기에 모인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이 시간이기에 모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말하는 나무/색인/가족의 계보학은 그 마당에 나무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시간이 그곳에 담겨있기 때문에 성립하는 것이다.
요컨대 나무의 나이테는 나무가 어디에서 살든 간에 일단은 쓰여진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 이 자리에서 살아왔다. 계절과 지역에 따라 나이테의 두께가 달라질 수는 있어도 해마다 새로운 나이테가 생겨난다는 점은 확실하다. 이것이 바로 이 영화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이미지와 시간의 계보학이다. 나는 그것을 처음에 가족의 계보학이라고 오인했으며 결말에 근접해서야 뒤늦게 발견한 사실에 동의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며 과연 이 영화가 누구를 위한 영화인지를 생각해본다. 잘 모르겠지만 그러면서도 이 영화가 어린아이를 위한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마치 어린아이에게 사진첩을 열어놓고 과거의 순간, 이미지, 시간을 짚어가면서 그 시절을 학습시키는 듯한 구조라고 나는 생각했다. 마치 영화 속에서 쿤의 어머니가 쿤에게 사진첩을 짚어가며 알려주었듯이, 이 장면은 그다음 장면인 외증조할아버지의 시대로 넘어가기 위한 트리거에 불과한 게 아니라 이 영화의 마지막에 자리한 나무/색인 장면과 연결되었다. 말하자면 이 두 가지 장면은 시간 여행의 입구와 출구로 기능하며 이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야말로 나무의 나이테를 둘러보는 행위이다.

영화 <미래의 미라이>의 한 장면 © 얼리버드픽쳐스
여러 시간의 ‘자리’를 고수하면서 서로를 돕는 게 중요하다
쿤은 미라이가 싫다. 미래의 미라이가 왔다. 쿤은 여행을 떠난다. 쿤은 미아가 된다. 미래의 미라이가 왔다. 쿤은 미라이가 좋(아졌)다. 이것은 이 영화의 서사 구조이다. 나도 이 영화의 서사 구조가 그렇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마치 쿤이 바닥에 늘어놓은 장난감 더미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을 다시 한번 반복하고 싶다. 바닥에 늘어놓은 장난감인가 혹은 바닥에 늘어놓은 추억인가. 나는 쿤이 바닥에 늘어놓은 기차들이 그의 시간 여행을 견인하는 도구로 변환되는 과정에서 그것이 마치 사진첩 사이를 가로지르는 추억종단 열차처럼 보였다. 별개로 흩어진 그런 시간대를 뛰어다닐 수 있는 것은 쿤이 아니라 쿤이 몸담은 열차라고 그 이미지는 말하는 것만 같았고, 이 열차는 일본의 역사에서 비롯된 그것이라고 느꼈다. 즉 쿤이 열차 덕후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를 이해하려면 일본의 근대화가 열차의 역사와 평행하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이 영화가 말하는 가족의 시간이란 것이 일본이라는 국가의 확장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기차놀이를 하다가 미래의 자신을 기차역에서 만나 그의 말을 흘려듣고 미래의 도쿄역에서 미아가 되는 쿤의 모습에는 일본의 근현대를 가로지르는 함의가 담겨있다. 이때 가족 같은 국가라는 표현을 당신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것은 제국주의 혹은 국가주의의 그것을 뜻하게 되며, 이때 가족의 시간이란 국가의 시간이 된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가족의 시간에 대해 이렇게 물을 수가 있다. 이것은 국가의 시간인가. 그렇다면 이 시간대를 가로지르는 영화의 의도는 무엇인가. 미래의 미라이가 현재의 쿤을 과거와 미래로 견학을 시켜줄 때, 그것은 현재 이 영화를 보는 쿤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에게 과거의 미래가 ‘있었’노라고 말하기 위함은 아닐까.
위에서도 말했던 것을 여기서 받자면 이 ‘말하기 위함’이라는 부분에 대해 보다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이것이 과연 그것이 있었다고만 말하는 것인지 혹은 그에 부가적으로 어떤 이데올로기가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쿤의 외증조할아버지가 전투기 엔진 공장에서 일했었다고 말할 때 나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앞으로의 이야기에 따라 이 영화는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고 기리는 낡은 사진첩에 불과하기 때문이었고, 그러나 이 에피소드에는 전쟁이 남긴 잔해가 아니라 전쟁이 있었던 시공간에 할아버지가 있었다는 사실만이 있었다. 이것은 나무의 나이테 안에 둘린 시공간이므로 딱히 어떤 이데올로기가 있지 않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구태여 덧붙이면 쿤의 외증조할아버지 시점으로 전환된 카메라가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며 난파된 선박 잔해에서의 태양 빛을 바라볼 때, 그것을 취하려 뻗은 손바닥이 햇빛을 다 가리지도 못하고 집어삼키지도 못한다는 점에서, 그 전쟁(청춘)은 붙잡아지지 않는 것 손아귀에서 흘러나가는 것 부질없는 것이라고 느꼈다.
아마 당신은 지금쯤 나에게 이렇게 묻고 싶을 것 같다. 그래서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가. 또는 이 영화의 태도는 무엇인가. 나는 이에 그렇게 답할 예정이다. 나는 이 영화가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게 어린아이에게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역사탐방을 시켜주려는 게 아니라, 어린아이가 아니면 이 시간들에 감정을 이입하게 될 우려가 있다고 말이다. 어린아이는 세상에 대해 모르는 게 많은 만큼 백지상태의 이데올로기가 없는 순수한 상태이다. 그래서 이 어린아이는 전쟁을 보면서도 그저 스쿠터를 타는 멋진 아저씨라고만 칭할 수가 있고, 자전거를 타는 게 별것이 아님에도 그저 두려워만 하게 되는 것이다.
나무에 새겨진 나이테들의 집합이 하나의 플랫폼에서 사람으로 표현될 때, 그들의 열차는 각자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상상을 해보았다. 미래의 미라이는 자신이 사는 시간대에 온 쿤에게 이곳은 나의 시간대이며 오빠는 오빠의 시간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그녀에게는 지금-여기가 그곳이고 이렇게 명확한 기준이 없다면 그들의 세계는 혼동이 생길 테다. 여러 시간대에서 온 미라이 혹은 쿤이 한자리에 모여 그것들 모두가 ‘지금-여기’라고 말한다면, 그 많은 시간의 층위가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느냐는 질문이 될 테다. 최근에는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가 그런 물음을 던졌고 그 영화는 여러 시간은 여러 시간의 ‘자리’를 고수하면서 서로를 돕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즉 그곳의 스파이더맨은 이곳의 스파이더맨을 대체할 수가 없다. 즉 이곳 스파이더맨의 죽음은 이곳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그 스파이더맨은 이 시간에서 대체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곳의 문제는 이곳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쿤이 미래의 미라이를 좋아하게 되었더라도 쿤이 화해해야 할 대상은 지금-여기의 미라이다. 나는 이게 바로 호소다 마모루가 일본의 근현대를 가로지르는 열차에 빗대어 말하고자 하는 현재 일본의 현실이라고 느꼈다. 이것은 과거의 문제는 과거의 문제이므로 그곳에서만 잘못이 유효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우리가 지금 겪는 문제들이 과거에서 기원했거나 혹은 과거와 연관 지으려는 흐름이 ‘오빠의 시간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국가(일본)는 과거의 망령이 스멀스멀 현재에 틈새를 비집고 나오려는 것을 막아야 하고, 또는 그 유령을 현재에 강령시켜서는 안 된다고 호소다 마모루는 말한다. 나는 그래서 쿤의 외증조할아버지가 헛된 햇살을 손에 품으면서도 살아남아야 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가 있었기에 현재가 있을 수 있었다는 시간의 계보학, 과거를 답습하는 것은 같은 선로를 달리는 게 아니라 그사이에 흘러온 시간이 있었다는 점을 우리에게 말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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