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초에 말씀이 있었건만 너는 말을 못 하는구나. 작은 물고기처럼 말야.”
영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한 수도승이 제자에게 죽은
나무 한 그루를 심어 매일같이 물을 주고 가꾸라고 말하고 제자는 이를 그대로 행했더니, 마침내 나무가 다시
살아나 꽃을 피웠다는 이야기. 주인공 알렉산더는 들판에 죽은 나무를 심으며 자신의 아들 고센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지만 고센은 말을 하지
못한다. 건강에 문제가 있는 듯하다. 여기서 우리는 알 수 있다. 맨 처음부터 끝까지 <희생>은
언어학에 관한 영화다. 이런 고센에게 알렉산더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건만 너는 말을 못 하는구나. 작은 물고기처럼 말야.”라고
말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성경을 여는 이야기이자 철학에서 말하는 ‘로고스’와 관련된, 아주 중요한 문장이다. 이 문장은 신이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뜻이자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된다. 이 ‘말’을 듣고도 고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말은 존재의 근원인데 고센은 이 근원에서 잠시 멀어져 있다.

“안경이 없으니 편지를 좀 읽어줄 수 있겠나?”
뒤이어 중요한 대사가 또 나오는데, 아들과 함께 나무를 심던 알렉산더에게 우체부 ‘오토’가 자전거를 타고 다가온다. 알렉산더에게 온 생일 축하 편지를 건네주자 알렉산더는
이렇게 말한다. “안경이 없으니 편지를 좀 읽어줄 수 있겠나?” 안경이 없는 알렉산더는 글을 읽을 수 없고 그의 아들 고센은 말을 하지 못한다. 편지를
전달하러 온 오토는 알렉산더에게 소리 내어 편지를 읽어 준다. 그렇게 말로 글의 내용을 전달해 준다.
전통 서구 철학에서 지배적이었던
로고스 중심주의는 말은 현존이고, 글은 부재이며 현존의 부정이라고 여겼다. 신은
말씀으로 우리를 창조했으며, 말은 즉각적이고 직접적이나 글에는 지연(délais)이
생기고 간접적이기 때문에 영혼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인공 알렉산더는 전직
대학교수이자 연극배우다. 극 또는 예술 자체가 어떠한 기호인데 알렉산더는 이 예술에서 언어라는 기호, 즉 매개로 무언가를 전달하는 역할을 일로써 했던 사람이다.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어떤 의도로 이런 장면을 넣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글로 쓰인 각본을 대사(말)로
변환해 전달했던 알렉산더는 여기서 안경이 없어 글을 곧바로 읽지 못하고 오토라는 전달자가 대신 글을 말로 변환해 준다.
편지를 읽어준 뒤 이어지는
대화 중 오토의 대사, “모든 선물엔 희생정신이 담겨 있죠.” 영화의 제목인 ‘희생’은 어떤 선물에 담겨
있을지 궁금하게 하며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게 이어진다. 알렉산더의 생일을 축하해 주러 집에 친구들과 이웃들이
찾아와 옛 유럽의 지도를 선물로 주고 이야기를 나눈다.

“말, 말, 말… 정말 중요한 건 말로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던 중 알렉산더가 괴로워하며
이런 대사를 내뱉는 장면도 나오는데, 연극배우로서 말로 무언가 전달하던 그가 정말 중요한 것은 말로 전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에서 밝힌 발터 벤야민의 생각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벤야민은 언어가 전달하는 것은 다른 사물이나 의미가 아닌 언어 자기 자신이며 그것이 언어 전달의 본질이라고
했다.
“누가 이렇게 했지? 주님?”
이때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고스란히 영향을 주고 있는 전쟁
트라우마가 이 부분에서 발현한다. 라디오와 TV의 연결이 끊어지고 집이
흔들린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이 위기에 대응한다. 극도로
예민한 증상을 보이며 소리를 치는 아델라이드, 그에게 안정제를 주사하는 빅터, 큰
동요 없이 시니컬한 모습을 보이는 마르사, 독한 술을 마시며 이 두려움을 견뎌내려 하는 오토. 폭탄이 날아오는 소리에 밖으로 나간 알렉산더의 시야에는 작은 집이 보이는데, 알렉산더는
혼잣말로 “누가 이렇게 했지? 주님?”이라고
묻는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하녀 마리아에게 이것을 누가 만들었냐고 묻자 마리아는 “고센.”이라고 답한다.
고센(Gossen)은 사실 이름이라기보다 호칭에 가깝다. 스웨덴어 ‘Gossen’을 영어로 하면 ‘Little Man’, 즉 작은 사내라는 뜻이다. 작은 사내 고센은 영화 내내 여러 번 등장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동방박사의
경배>에서 동방박사가 경배를 올리는 대상인 아기 예수가 아닐까.

“그를 깨우지 않을 겁니다! 그럴
생각 없어요.”
이 영화에는 두 명의 하녀, 율리아와 마리아가 등장한다. 앞선 장면에서 저녁식사 준비를 하는 도중에 마리아는
할 일을 끝냈으니 가도 되냐고 묻고, 부인 아델라이드는 몇 가지를 더 부탁하지만 결국 율리아가 나머지를 할
거니까 당신은 가도 된다고 말한다. 율리아는 집에 상주하고, 마리아는
자신의 집이 따로 있어 출퇴근을 한다. 둘은 다른 위치에 있다.
다시 집 안으로 돌아와서, 안정제를 맞고 아델라이드는 아까보다 진정했지만 자고 있는 고센을 깨우라고 하녀 율리아에게 지시한다. 그러나 율리아는 “그를 깨우지 않을 겁니다!
그럴 생각 없어요. 그리고 다른 누구도 그렇게 하지 마세요.”라고
답하며 지시를 거부한다. 전달자의 역할을 다하지 않는다.
신의 전령사 헤르메스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가? 송아지 떼를 훔친 헤르메스는 죄의 대가로 창작(음악)의 즐거움을 포기하게 되었다. 게다가 다른 신들을 섬기고 그들의 말을 충실하게
전달하며 영생을 살아야만 한다. 신의 말을 인간에게, 인간의 말을 신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아까 언급한 벤야민의 주장과는 상반되지만 예를 들어 언어가 전달하는 ‘본질’이 있다고 가정할 때, 그 본질이
신의 말이라면 언어라는 전달자, 즉 헤르메스가 그 본질을 인간에게 전한다. 인간은
결코 신에게 직접 닿지 못한 채 언어를 통해 본질의 껍데기만을 보고 듣고 뱉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전달자가 자신의 의지를 크게 내비치게 된다면. 번역학자 샤를 르 블랑은 『헤르메스 콤플렉스』에서
중개자는 메시지가 되고, 번역가가 번역이 되는 것이 헤르메스 콤플렉스의 징후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전달자인 하녀 율리아는 여기서 전달자의 역할을 하지 않고 중개자 그 이상이 되고자 한다.

“평생을 벙어리로 살겠습니다.”
뒤이어 알렉산더는 고센이
자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홀로 신에게 기도를 드린다. 무신론자였던 알렉산더가 재앙의
현실 앞에서는 신에게 모든 것을 어제와 같이 되돌려놓아 달라고 빌게 된다. 그러다 이런 말까지 하는데, “평생을 벙어리로 살겠습니다.”
말을 포기할 테니 대신
평화를 달라는 기도에서 알렉산더에게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적으로 알 수 있다. 정말 중요한 건 말로 전해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 건 그만큼 말과 언어에 진심이었다는 뜻이다. 그랬던 알렉산더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던 알렉산더가 평생을 벙어리로 살겠다고 말한다. 어쩌면
자신이 말을 포기하더라도 고센이 말을 다시 하게 되기를 바란 것일 수도 있다.

“불쌍한 알렉산더, 누가 당신을
그렇게 했나요?”
새벽과 함께 오토가 알렉산더의
방에 찾아온다. 그러고는 거룩한 존재인 마리아와 동침을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느닷없는 말에 혼란스럽던 알렉산더는 고민하다 결국 야심한 시각에 마리아의 집에 찾아간다.
알렉산더를 거부하던 마리아는,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알렉산더를 보고 “불쌍한 알렉산더, 누가 당신을 그렇게 했나요?”라고
물으며 그를 받아들인다. 이 장면은 마치 고대의 조각상처럼 흰 천이 덮인 채 승천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 난해하기로 유명한 영화가
여기서만큼은 아주 친절하게 알려준다. ‘마리아’라는 이름에서 인물의
역할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음악의 제목 또한 상냥하기 그지없다. 음악은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마태수난곡] 39번
<Erbarme Dich mein Gott(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이다. 그렇게 알렉산더는 구원을 받는다.

“아냐, 침묵을 지켜야지.“
아침이 밝았다. 정말로 구원을 받은 것인지 세상은 전날 아침과 같이 평화롭다. 어디선가 잠에서
깨어난 알렉산더는 사람들이 잠시 산책을 나가며 집을 비운 틈을 타서 집에 불을 지른다. 나무로 된 의자들을
한데 모으고 천으로 덮은 다음 불을 낸다. 불길이 커지며 집 전체를 뒤덮고 거세게 타오른다. 그때 집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알렉산더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지만 알렉산더는 몇 마디 말을 하다 결국 “아냐, 침묵을 지켜야지.“라며 말하기를
그만둔다. 곧 그는 때맞춰 온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된다.
알렉산더는 일본 문화를
좋아한다는 설정인데, 이 장면에서 세상의 만물이 음과 양의 공존과 조화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의 음양 문양이
그려진 도복을 입고 있다. 알렉산더는 결국 침묵을 선택하며 새로운 형태의 전달자로 거듭난다.
철학자 막스 피카르트의 『인간과 말』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신은 특별한 행위 없이도 항상 자유롭다. 특별한 결정 없이도 항상 결정적이다. 그래서 신에게 말과 침묵은 하나다. 신은 말을 통해서 침묵하고 침묵을 통해서 말한다. |
철학자이자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에서 지금까지는 저자가 책 이전에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졌으나 그렇지 않다고 썼다. 인간이
언어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저자(auteur)에 비해 현대적인
개념인 필사자(scripteur)는 자신의 텍스트와 동시에 태어나며 언술 행위의 시간만이 존재한다고 했다. 필자는 이것을 우리 인간들 개개인이 원래 저자나 필사자인 것이 아니라 글을 쓰고 말하는 순간에만 잠시 필사자가 된다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데 그게 무슨 뜻인가요?”
이 소동이 일어나는 동안
고센은 물을 길어와 죽은 나무에 물을 주고 있다. 그러고는 나무 그늘에 누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입을 연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데 그게 무슨 뜻인가요, 아빠?” 고센은 이 2시간 30분짜리 영화 내내 아버지 알렉산더의 말을 듣고 행하기만 하며 그 무엇도 전달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무도 듣지 못할 질문을 할 뿐이다.
타르코프스키는 하이쿠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하이쿠는 일본의 짧은 정형시로, 정해진 글자
수 안에서 쓴다. 서양의 많은 철학자와 기호학자, 예술가들이 하이쿠를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한다. 롤랑 바르트는 하이쿠에 대해 ‘반(反) 구술’이며, 의미를 야기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무의미 안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타르코프스키의
하이쿠에 대한 관심이 영화에서는 미니멀리즘으로 이어졌다. 이 영화도 대체로 많은 것을 설명해 주지 않는다. 하이쿠를 몇 편 읽어보면 이 영화의 구성과 닮아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이쿠는
짧은데 <희생>은 아주 길다는 것만 빼면.
기억을 되감아 영화의 앞부분으로
돌아가 보자. 숲 가까이에 고센이 알렉산더를 위해 우체부 오토와 함께 만들어 놓은 작은 집 모형이 있었다. 진짜 집은 불탔고 알렉산더는 병원에 보내졌지만 고센은 말을 하게 되었고 알렉산더가 ‘생일
선물로 받은’ 작은 집이 남아 있다. ‘전달자’ 우체부 오토가 ‘작은 사내’ 고센과 함께
만든 것이다.

이 글에서 인용한 막스
피카르트의 『인간과 말』의 서문이었던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시로 마무리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도 위험한 존재인 언어가 인간에게 주어졌다. 창조하고, 파괴하고, 멸망으로 치닫다가, 다시 영원한 어머니이자 최고의 명장인 자연에게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자연으로부터 무한한 신성, 모든 것을 포용하는 그 사랑을 상속받고 배운 자로서,
자기 자신을 증명하고 생성할 수 있도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