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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탑> - 인간은 무엇을 쌓아 올리는가 | ARTLECTURE

홍상수, <탑> - 인간은 무엇을 쌓아 올리는가


/Art & Preview/
by 박정수
Tag : #홍상수, #영화, #감독

홍상수, <탑> - 인간은 무엇을 쌓아 올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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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스스로 인간 자신을 되찾아야만 하며, 또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인간을 인간 자신으로부터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확신해야만 합니다.” -장 폴 사르트르- 


탑은 높다. 오늘날의 높은 탑들은 500~600m 단위로 창공으로 뻗어가며, 기술력이 미흡했던 과거의 석탑, 목탑도 40~50m 높이를 자랑했다. 오늘날의 탑은 종교적 성격과 무관하지만, 과거의 탑은 신념을 실천하고 교리에 닿으려는 의지를 드러냈다. 높으면 높을수록 하늘에서 우릴 굽어보고 지배하는 절대자, 신적 존재에 조금이나마 닿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단번에 높을 순 없었다. 모든 탑들은 처음에는 낮았다. 벽돌 하나하나, 단 하나하나 쌓아 올라지며 구름에 걸렸으니, 막대한 노력의 산물이 탑이다. 홍상수의 신작 <탑>도 그렇지 않을까. 그의 영화는 처음부터 높진 않았을 것이다, 높기 이전의 과정을 보여주겠지, 그렇게 높게 쌓아올려진 탑이자 영화를 통해 홍상수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줄까. 최근 홍상수의 경향, 일단 그는 현실과 작품의 경계선을 매우 극단적으로 흐린다. 그의 자전적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한 작품이 <밤의 해변에서 혼자>였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김민희가 맡은 영희는 유부남과 사랑을 나누고 있었고, 끝끝내 그녀는 남자에게 붙들려간다. <그 후>에서 마찬가지로 김민희는 불륜에 휘말리고, 홍상수는 자신을 권해효에게 투영한다. <도망친 여자>에서 결혼 후 몇 년 만에 집을 나서서 여행을 떠난 감희 또한 김민희라는 배우의 자전적 내용일까. 그렇게 제 삶이 영화와 밀접해가던 홍상수는 이윽고 올해 내놓은 신작, <소설가의 영화>에서 '배우 김민희'가 느끼는 감정과 그녀와 결혼을 하지 못해 미안한 '자신'의 감정을 더욱 과감하게 내비친다. 2010년대 홍상수의 영화가 꿈과 현실의 경계, 알 수 없는 시간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면, 이제는 현실의 경계를 자유롭게 오고 간다. 김민희와 교제 이후 홍상수의 작품은 매우 단조로워진 것이 사실이다. <북촌방향>이나 <자유의 언덕>과 같은 작품에서의 비선형적 구성,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 각자의 표상을 구현한 형식적 실험은 모두 사라진다.   

  

즉 홍상수의 구작에서 등장하던 영화적인 형식은, 근작에선 익히 가능한 타자의 표상에 잠식되어 간다. 그럼에도 프레임 안팎으로 경계를 넘나드는 홍상수의 실험은 여전히 일상, 현실의 영역에서 진행되고 있다. 또 최근 홍상수의 작품에서는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등장한다. <강변호텔>과 <당신얼굴 앞에서>가 대표적이다. <강변호텔>에서 죽음을 앞둔 아버지는 '소속'에 관한 자신의 소설을 읽어주며, 가장의 죽음으로 그간 소속되던 아들과 딸의 해방을 은유한다. <당신얼굴 앞에서>의 상옥은 시한부판정을 받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죽음 앞에서 일상을 반복하지 않는다. 약속되어 닫히지 않은 여지를 사랑하며 웃는다. <소설가의 영화>의 결말, 준희가 연출한 영화에서 길수의 남편은 그녀를 뒤따라가지 못한다. 이를 종합해보건대 그에게 죽음이란 오히려 해방인가. 죽음은 더 이상 얽매이지 않고 소속되지 않으며 뒤따라가지 않는 것, 그래서 남겨진 자는 쓸쓸하지만 자유로운가. 이러한 해방, 홍상수의 근작에서는 터전을 떠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오랜 지인들을 만나러 여행을 떠나는 <도망친 여자>, 마찬가지로 이사를 간 후배를 만나러 갔다가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 <소설가의 영화>, 세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이야기 전부 다 만남이 관통하는 <인트로덕션>이 그렇다. 이렇게 터전을 떠나서 대화하는 사람들은 주로 여성이다. 그녀들은 포용력이 있다. 하지만 남성들과는 항상 충돌한다. <도망친 여자>에서 여성은 항상 남성과 충돌하는 반면 여성끼리는 온화하고, <소설가의 영화>에서도 준희는 자기중심적인 남성들과 불화를 겪으며, <풀잎들>에서도 자신을 배려하지 않는 남동생에게 아름은 토라진다. 성 계급이나 섹슈얼리티로 남과 여를 고찰하던 2010년대의 홍상수와 달리, 이제는 대화를 통해 성별을 고찰한다. 이러한 홍상수의 최근 작품은 대부분 흑백이다. <인트로덕션>에서 조야한 필름을 연상케 할 정도로 낡고 거칠었던 흑백, <강변호텔>에서 차가운 죽음의 세계로서 흑백, <소설가의 영화>에서 무언가 중요한 것을 앗아간 듯한 흑백, 비로소 그것이 되찾아진 듯한 컬러로의 전환이 도드라졌다.      





이러한 홍상수의 흑백 영화, 그리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공간을 유랑하는 영화가 <탑>에서 반복된다. 본 작품에서 가장 먼저 감상자의 감각을 자극하는 요소를 꼽으라면 단연 '청각'이 아닐까 싶다. <탑>의 도입부터 감상자의 호기심을 신비롭게 자극하는, 추상적이고도 모호하며 어딘지 낡은 느낌을 주는 배경 음악이 영화 내내 반복된다. 맨 처음 삽입된 배경 음악은 서로 잘 모르는 상태였던 병수·정수를 해옥과 잇는다. 이러한 추상적인 배경음악처럼 아직 건물 내부에 진입하지 않았을 때, 영화의 음향은 불명확하다. 외부 소음이 뒤섞이고 인물들의 발화도 정확하게 녹음되지 않았다. 그러나 실내에 들어가서 추상적이던 서로는 자기소개하며 명확해지고, 이에 따라서인지 사운드도 정돈된다. 사운드의 차이를 만드는 외부는 모호함, 실내는 명확함인가. 그렇게 영화감독 병수, 미술을 전공하다가 인테리어가 하고 싶어진 정수, 인테리어 업자이자 건물주인 해옥의 대화가 일단락되고, 해옥은 부녀에게 건물을 소개한다. 각 층을 보여주기 위해서 닫혀 있던 실내를 나간다. 이후 사운드는 다시 붕 뜨기 시작한다. 메아리치는 느낌, 웅웅거리는 듯한 느낌으로 음향은 다시 추상적으로 변한다. 각 공간에 대한 정보가 무지한 실정, 그 생경한 느낌을 추상적인 사운드로 청각화하는 것일까. 이러한 추상적인 사운드는 감상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명확하게 듣고 싶은 욕구를 말이다. 그러나 명확해지면 지루해진다. 이후 병수는 본 건물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선희와 사귀게 되었다. 그리고 선희가 친구 준이를 만나러 나갔다. 일찍 오겠다고 했는데 병수의 예상과 달리 늦는다. 병수는 지루해진 모양인지 침대에 눕는다. 그리고 침대에 누운 병수와 일치하지 않는 말소리가 울려 퍼진다. 선희가 도착했고, 그녀는 병수에게 준이랑 노는 것은 별로 재미없었다고 말하며, 자기랑 있는 것이 최고라고 말한다. 여기서도 구체적인 시각에 비한다면, 추상적이고 웅웅거리는 청각은 병수의 바람, 가능성이 스며있다. 그러나 대사가 없는, 이로써 언어로 규정되지 않음에 비규정적인 배경음악과 달리, 병수의 상상은 기존 사랑을 지리멸렬하고도 따분하게 반복하고 확인할 뿐이다.     


즉 홍상수는 구체적인 청각, 추상적인 청각을 대비하며 후자의 변화 가능성을 긍정한다. 이후 병수는 잠들었다. 선희가 도착해서 그를 부르는 것 같지만, 그는 깨지 않는다. 그를 호명하는, 그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구체적인 청각에 불응한다. 선희의 병수의 상태는 잠이 든다. 이후 추상적인 배경음악이 울려 퍼진다. 이윽고 선희와 사귀던 병수가 지영과 사귀는 숏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추상적인, 비규정적인 배경 음악은 변화무쌍한 인간의 가능성에 상응한다. 배경음악은 본래 해옥에게 정수를 소개하려던 병수가 이젠 해옥에게 사과하는 관계로의 변화, 방문자에서 세입자로의 변주, 만나는 대상의 뒤바뀜에 상응한다. 그래서 추상적인 배경음악은 명확하게 인과적이지 않은 본 작품의 편집과 같이 작동한다. 조악한 사운드의 한계에서 추상성이라는 나름의 가치를 길어낸 점은 <클레어의 카메라>나 <인트로덕션> 등이 연상되지만, 비인과적인 편집이 사용된 점은 <북촌방향>이나 <자유의 언덕>을 연상케 한다는 점에서, 영화 구조를 실험하던 홍상수로의 회귀가 일련 반갑다. 영화의 비인과적인 편집, 가장 먼저 해옥과 와인을 마시던 정수는, 이윽고 술이 다 떨어져 편의점으로 사러 나간다. 그렇다면 그 이후 이어질 숏은 당연하게도 술을 사오는 정수로 이어져야 되지 않을까. 그러나 홍상수는 정수를 그녀의 말 따라 '실종자' 상태로 내버려두고, 대신 똑같은 구도에서 걸어오는 병수를 이어낸다. 또 영화 말미에 병수는 지영과 드라이브를 하러 가기로 한다. 그런데 공인중개사인 지영의 사무실에 손님이 와서, 그녀가 잠시 자리를 비우고 병수는 기다린다. 건물 맨 아래에서 기다리는 병수는 건물을 쓱 본다. 그 과정에서 숏이 잘린다. 이후 인과적이라면 사무실에 다녀온 지영과 병수가 재회하는 숏이 이어질 것이라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정수가 나타난다. 이렇게 홍상수는 예상하지 못한 것, 기대에서 벗어난 것들을 쌓아올린다. 영화는 분명 현실과 유사하다. 병수, 정수, 해옥 셋이서 술을 마시는 숏, 또 병수, 해옥, 선희가 술을 마시는 롱테이크는 아주 지독하리만큼 길다. 현실의 시간을 환기한다.      


또 홍상수는 <소설가의 영화>에서는 배우 김민희를 환기했다면, <탑>에서는 별거 중이자 최근에 큰 상을 탄 자신을 환기한다. 그렇게 영화에서 현실이 반복되는 것 같은데, 심지어 영화 내에서도 똑같은 구도가 반복되고, 전혀 다른 날의 개성, 정보를 지워내는 흑백에 의해서 모든 것이 따분하고 똑같아 보인다. 더군다나 홍상수는 2010년대 중반까지 다양한 배우들을 기용하면서 그들이 동일한 젠더를 수행하고 있음을 비췄다면, 최근에는 권해효, 이혜영, 송선미, 박미소, 신석호, 조윤희가 반복된다. 여기에 서영화, 김민희 정도가 추가되거나 빠질 뿐이다. 심지어 그들이 각 작품에서 연기하는 배역도 유사하다. 권해효는 감독이나 홍상수가 투영되고, <인트로덕션>에서 유학생이었던 박미소는 이번에도 무언가를 배우려고 한다. 현실에서도 부부인 권해효-조윤희는 홍상수의 작품에서도 부부이거나 연인이다. 그런데 이렇게 현실, 형식, 배우가 똑같다면 영화를, 그리고 새로운 영화를 봐야할 이유가 있을까. 홍상수는 그 차이, 개별성을 본 작품에선 청각과 편집으로 만들어낸다. 그렇게 기존, 이미 있는 것에서 달아나는 영화는 실존한다. 사물이나 생산은 실재나 본질이 존재한다. 종교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실존적 인간은 사물, 생산, 종교처럼 본질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무엇이다. 본질에 따른 선택이 아니라, 매 순간순간 새롭게 발명하는 것이 실존이다. 본 작품은 이번에도 흑백이다. 색이 아주 꽉 차있는 현실이나 컬러 영화에 비해서 흑백 영화는 분명 '결여'다. 한편으로 기존 색채가 결여됨으로써, 새로운 색채가 발라질 수 있는 가능성의 상태에도 해당한다. 본 작품에서의 흑백이 후자에 가깝다. 병수는 차를 가져왔다. 그러나 해옥의 권유에 와인을 마신다. 그리고 기타를 친다. 기타를 치는 자신은 익히 가능한 것이긴 했지만, 그간 잊혔고 해옥과의 만남에 의해 가능해진 것이다. 해옥과 술을 마시다가 전화를 받는다. 본래 계획으로라면 해옥과 미팅하는 병수여야 하지만, 타인과의 접촉에 의해 계획에서 이탈하여 영화 제작사에 가는 병수로 뒤바뀐다.      


정수 또한 마찬가지다. 소심했던 그녀는 해옥과 술을 마시며 대담해졌다. 해옥 또한 마찬가지로 병수에게 호감을 느껴, 그가 자신의 건물에 입주한다면 월세를 반으로 깎아줄 것이라 말한다. 즉 타인과의 만남에 의해 기존 색이 지워지고, 또 다른 색이 덧칠해진다. 무에서 유로 쌓아올려지는 탑, 그 유는 언제나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고 홍상수는 말하는가.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병수가 해옥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그리고 해옥은 원테이블만 운영하는 선희의 식당에 즉흥 방문한다. 그것 또한 계획에 없었고, 심지어 운이 따라서 선희가 받았던 예약이 취소되었다. 이러한 즉흥, 우연, 우발이 새로운 것들을 첨가하여, 익히 계획대로 흘러가는 뻔한 나를 드높인다. 이는 사랑과도 연관한다. 선희와 사귀던 시절 병수는 샐러드를 먹으며 건강관리를 했다. 육식을 하지 않으며 소화를 따졌다. 그러나 이후 지영과 사귀는 병수는 고기를 먹는다. 해옥, 선희와의 만남에서 즐겨 마시던 와인을 지영과 만나며 소주로 뒤바꾼다. 해옥에게 병수는 방문하는 사람, 선희에게 병수는 기다려주는 사람, 지영에게 병수는 찾아가는 사람으로, 즉 병수는 어떤 사람과 만나느냐에 따라서 뒤바뀐다. 정수와 해옥, 단 둘이서 술을 마시던 당시, 30분에서 1시간이면 미팅을 마치고 돌아올 것이라던 병수가 복귀하지 않는다. 정수는 병수를 두고 '실종자'라고 규정한다. 실존하는 우리는 기존 우리가 생각했던 계획, 정보로부터 벗어나는, 그것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실종자가 맞다. 한편 이렇게 실존을 지향하기 때문에, 익히 가능하거나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을 홍상수는 비추지 않는다. 영화에 쌓여질만한 벽돌이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정수는 해옥에게 아부한다. 자신의 의도대로, 그러나 그 의도대로의 흘러감을 비추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의도대로 흘러갈 정수 대신, 전혀 예측하지 못한 병수가 방문한다. 또 첫 방문에 이어서 두 번째 만남에도 해옥은 병수에게 기타를 연주해달라고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뻔해진 듯 홍상수는 그의 연주를 이어내지 않는다. 대신 새로운 선희와의 연애를 포착한다. 그리고 계획대로 위스키를 가지러 가는 해옥을 따라가지도 않는다.      


즉 익히 지닌 것, 계획을 충실하게 따르는 뻔한 것들은 쌓지 않는다. 한편 그 뻔한 계획이 불발되기도 하기에 영화는 포착할 수 없다. 정수는 해옥에게 그토록 애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달 만에 때려 쳤다. 자기가 예측한 일에 대한 생각, 해옥에 대한 생각이 전부 다 불발한 것이랴. 그래서 기대는 나타나지 않는다. 병수의 기대대로 딱딱 나타나주길 바라는 선희, 아마도 자기가 도착했을 때 깨어있기를 바랐을 병수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해옥이 기대한 영화감독 병수의 모습, 해옥의 말 따라 월세를 삭감해주는 그녀를 기대한 병수, 양자 모두 마찬가지다. 기대한 바는 나타나지 않아서 포착할 수 없기도 하다. 이렇게 기대해서 이탈하는 대상들은 '이동'한다. 약속에서 이탈하는 병수, 갑자기 미팅이 잡힌 지영, 항상 막무가내로 방문하거나 편지를 뜯어보는 해옥, 모두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방식으로 이동하지 않던가. 카메라는 대체로 멈춰있다. 흡사 본 건물의 CCTV라도 되는 듯이 멈춰서, 트래킹 숏이나 달리 숏이 전무하다. 건물 밖으로 차를 타고 떠나면 그저 무기력하게 그 모습을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카메라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틸트, 패닝으로 움직인다. 처음 보는 공간으로 이동할 때, 기타를 치는 병수를 보러 방에 들어갈 때, 준이와 만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파기한 지영과 언쟁할 때, 건물에 도착하거나 멀어지는 인물들을 포착할 때, 해옥에게 누수를 따질 때가 그렇다. 기존 앎이나 계획, 예측에서의 달아남과 변화, 그 실존이 틸트나 패닝의 '이동'으로 가시화한다. 그런데 이동하면서 틸트, 패닝이기에 고정된 상태로 되돌아온다. 변화했지만 나로서는 고정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동이 비단 대상의 변화에서만 기인하는가. 대상은 그대로 머물러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에 의해서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흑백은 내가 칠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기도 하지만, 내가 대상을 칠하는 가능성이지도 않겠는가. 줄은 정수에게 해옥이 권위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이며, 이기적이라는 말을 남긴다. 정수는 해옥과 만나면서 느낀 감정, 정보와 다른 그녀의 모습을 본다. 정수 또한 해옥에게 영화감독으로서의 병수가 아니라,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서의 병수에 대해 얘기한다. 직접 만난 해옥, 진술에 의한 해옥,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에서 차이가 있는 병수, 우리는 양자를 참/거짓으로 구분하고 싶은 욕망에 빠진다.     


그러나 해옥이 말하듯, 이는 단지 내가 모르는 부분들일 뿐이지, 모두 그 대상의 요소다. 참/거짓이 아니라, 둘 다 참이다. 흑백은 컬러에 대해서 닫히지 않았다. 어떤 색으로든 가능성이 있다. 마찬가지로 실존하는 인간 또한 닫혀있지 않다. 어떤 장소, 어떤 사람, 어떤 시간이냐에 따라서 변화한다. 대상에 대한 정보를 취합하더라도, 그 정보에서 대상은 또 달아난다. 그래서 영영 칠해지지 않는다. 해옥은 줄이 언질을 준 모습과 서서히 일치한다. 이와 동시에 병수에게 열정적이었던 해옥의 모습이 변화한다. 그래서 우리는 영영 모른다. 이렇게 영화는 서서히 쌓여간다. 그런데 각자는 혼자로는 두렵다, 그래서 실존하는 나로서만 쌓는 것은 아니다. 선희와 병수는 현재 혼자다. 서로는 혼자로서의 두려움에 대해서 말한다. 선희는 본래 미술을 전공했다. 그러나 학벌, 소비자들이 애호하는 취향에 자신의 색채가 부합하지 않아서 미술을 그만두고 요리사로 전향하였다. 요리사로서 선희는 그래도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최근 손님이 없어지자 다시 살길이 막막하다. 병수도 해외에서 촬영하기로 한 영화가 엎어졌다. 제작사가 후원하는 자금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지영과 연애할 때, 그는 영화를 찍는 이유를 ‘하느님이 계시’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타인의 인정, 타인의 지시에 의해서 그들은 쌓아올린다. 홍상수는 종교를 믿고 의존하는 심리를 언급한다. 선희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병수 또한 마찬가지로 보인다. 하나님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의존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를 위하기도 하지만, 병수가 선희에게 사랑받고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대상에게 의존하고자 애타게 기다린다. 지영이 병수를 사랑하는 태도는 숭배에 가깝고, 병수는 여러 불만에도 불구하고 집주인 해옥의 건물에서 떠나지 못한다. 지영과 병수는 사귀기 이전, 각자가 점심을 사겠다고 말한다. 돈을 써서 상대방에게 확신, 믿음을 얻고 싶은 것일까. 병수에게 선물을 공세 하는 지영도 그러한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대상에게 듣고 싶은 말을 염원한다. 병수는 선희에겐 소화가 안 되는 말은 하지 말라고 하고, 지영에겐 고기 먹어도 좋다는 말을 듣는다.     


즉 상대방에게서 어떤 확신을 듣고 싶은 것이랴. 병수는 해옥에게도 누수, 화장실 막힘 문제를 고쳐달라고 얘기한다. 그런데 개인은 그것을 고칠 수 있을지 확신이 없거나, 능력이 미미하다. 해옥은 언제나 말을 흐린다. 지영은 병수를 통해서 하느님에 대한 확신을 얻는다. 병수는 선희에게 사랑과 건강을 확인받고, 선희는 병수에게 보험 명의자를 빌렸다. 정수가 해옥을 여긴 태도도 마찬가지였으리. 그런데 높게 쌓여지면 누수가 생긴다, 규정된 바와 실존 사이에서의 균열이 나는 것일까. 또 쌓인 것만 고집하면 고착화되어 화장실에 물이 내려가지 않아 썩는다. 씻어도 씻은 것 같지가 않다. 그런데 포기하진 못하겠다. 선희는 월세 상승, 식당 운영이 잘 안 되서 이사 계획을 세웠음에도, 지금까지 리모델링까지 해놓은 '탑'을 놓기 어렵다. 하지만 영화는 그럼에도 '나'로 돌아가야 함을, 내려와서 다시 올라가야 함을 역설한다. 개방성에 의해서 새로운 것을 알아간다. 그러나 너무 열어두면 해옥이 병수를 좌우하고 잠식한다. 선희를 기다리는 병수는 그녀에게 너무 의존하는 눈치인지, 또 그녀가 준이를 만나겠다는 말에 휘둘리는지, 결국 혼자가 편하다고 말한다. 병수는 영화 내내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영화 결말에서는 도입부와 다르지만 유사한 맨 아래로 다시 내려온다. 오르기 전에는 오르고 싶었다. 그런데 오른 이후에는 내려와야 하거나, 올라와 있는 위치가 너무나 낮아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오른다. 그것이 홍상수의 실존이다. 실존해야 함에도 불안한 인간은 영화를 하라고 계시한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의 길을 걸어가지만, 막상 그것이 쌓이면 안식년을 바라며 내려놓고 실존한다. 만나기 전에는 만나고 싶었지만, 만난 이후에는 이제 떠나고 싶다, 실종되고 싶다. 만났던 대상은 사라지고, 만나기를 꺼렸던 정수는 영화 말미에 찾아온다. 그것이 곧 순환한다, 밑에서 오르고 또 내려오고… 그것이 곧 홍상수의 영화이기도 하다. 현실과 밀착하여 포착하면서도, 이후에는 현실이나 마땅한 인과에서 이탈하는 편집으로 달아나며, 또 현실과 밀착한 배역 설정에서도 달아나며 숏을 쌓아 올린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홍상수를 알면서도 다 알지 않는다, 영화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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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박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