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자유는 타자를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파악하고, 자유를 부정하는 이론들조차 이해하려 한다.” -모리스 메를로-퐁티-
*동물원
거대한 역사의 줄기에 글귀 하나라도 새겨 넣으려는 자는 어떻게든 생존해야 하고, 그렇게 살아남기 위해선 승리해야만 한다. 사멸한 자는 모든 것을 빼앗긴다. 스스로 말할 수 없는 망자는 살아남은 승자가 주관적으로 왜곡하며 집필한 역사에 남게 된다. 선과 악에 판단은 고사하고, 객관적인 진실마저도 은폐되기 일쑤다. 승자의 손을 거친 왜곡, 이러한 집필이 극단화된 시대는 바로 서구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가 절정에 달한 근대다. 서구에 의해 침략당하고 규정되는 동양은 스스로 말할 수 없었다. 이슬람은 '마흐메트교'로 불렸고, 아시아의 무수한 종교와 언어는 자신들을 ‘월등’하다고 여기는 서구 체계와 멀고 가까움을 근거로 우열이 나뉘었고, 이국의 언어로 자신들의 역사가 집필되었다. 이러한 역사를 가시적으로 아카이빙하는 박물관의 역할도 마찬가지였다. 위대하고 찬란했으며 거대했던 국가를 자신들이 정복했음을, 그 찬탈의 포로인 유물로 자신들의 힘을 널리 전시하였다. 박물관은 국가의 영광 및 위업과 결탁한 선전의 시간을 담아낸다. 능동적인 맥락 하에서 발생한 유물, 그 기원의 시간은 침묵한다. 그리고 동물원도 마찬가지다. 박물관이 무 생명, 사멸한 것들을 전시했다면, 동물원은 살아있는 것들을 인위적으로 가두어 그들의 울음까지도 전시하였으며, 그 울음은 자신의 통곡보다도 압제자들의 위업과 힘을 알리는 수단으로 전락하였다. 인위적으로 형성된 좁다랗게 구획된 사육장은 본래의 서식환경을 보장하지 않아 자연 상태보다 수명은 되레 단축되었다. 교미에 특정 환경을 요구하는 종들은 동물원에서 자손을 남기지 못한 채로 쓸쓸히 죽어갔으며, 이에 최후의 멸종이 동물원에서 발생한 사례도 적지만은 않다. 그리고 이들은 되돌아갈 수도 없다. 인간이 그들이 살던 서식지를 짓밟았다는 증거가 바로 동물원의 그들이므로, 그렇게 황폐해진 종들의 서식지에는 이제는 혈족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서 있을 땅이 없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 동물원의 당위성이 생성된다. 희귀종들의 돌아갈 곳 없음에, 유일하게 그들을 보호할 수 있는 곳은 오직 동물원이라는 이유로…

*대쉬 쇼 감독소개
그리고 본 작품 <크립토주>도 이러한 동물원을 소재로 한 만화영화다. 세상에 그 존재가 의도적으로 은폐된 전설적 생물들의 노출을 두고 발생하는, 동물원을 둘러싼 여러 문제를 사유하게 해주는 애니메이션이다. 이를 1983년 미국 태생의 대쉬 쇼 감독이 다룬다. 그는 2016년 <나의 학교 전체가 바다로 침몰한다>라는 작품으로 데뷔하였다. 그는 본 작품에서 자전적인 학창 시절의 이야기를 웅장하고도 상징적인 만화영화로 승화해냈다. 그는 너드들이 학교에서 어떻게 생존했고, 또 어떻게 성인이 되어 심해에서 지상으로 올라왔는지를 기록한다. 학교는 사회가 축소된 하나의 소우주다. 이러한 사회에서 너드들이 버티기 어려운 이유는 소수였기 때문이다. 진실을 담고 전달하려는 저널을 추구하지만, 대중들은 자신의 흥미에 언론이 부합해주기를 기대한다. 이에 그들이 기사를 쓰면 쓸수록, 하강하는 연출에서도 감지되듯 편집부의 너드들은 추락한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저 꼭두각시로 여겨지고 기대되는 바가 없다. 학교생활에 진심을 다하고 자신의 경험과 능력을 쌓는 그들은 별종으로 불리기 일쑤다. 파티를 즐기거나 인맥을 넓히는, 외부의 요소들로 나를 드러내는 '파티걸' 등이 신봉 받는다. 하지만 다수가 그렇다고 해서, 특히 대다수가 진실을 외면한다고 해서, 거짓이 진실이 되지는 않는다. 대쉬는 외면당하더라도 꿋꿋한 카산드라가 될 것을, 자신의 능력을 통해 난관을 헤쳐나갈 것을, 그리고 기존 질서와 권력자들이 보인 부패상을 극복할 것을 종용한다. 이에 그들은 침몰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고, 자신의 이야기를 후대에 알릴 수 있다. 특히 정치인들의 행동은 학생들에게 흡사 도미노가 쓰러지듯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여정 속에서 성인이 돼서 학생들을 주무를 수 있는 위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올바르게 이끌어주고, 한 학년씩 올라갈 때마다 커다란 버팀목이 되어준 스승을 예찬한다.
*추상적 연출
이러한 대쉬의 데뷔작에서는 다채로운 연출이 대두되었다. 흡사 <환상의 마로나>와 같은 현란하고도 감각적인 유럽 아트메이션의 기조가 연상되는 다채로운 화풍을 통해 그의 기억을 옮겨온다. 특히 수평적 이동을 중심으로 삼다가 수직적 이동으로 그들의 좌절과 성장을 나타내는 연출 그리고 추상적 화풍을 통해, 왜곡되고 잔상만 남게 되는 기억과 자유로이 유동하고 변화하는 물의 속성을 그려낸 점이 흥미롭다. 그리고 이러한 대쉬의 감각적 연출은 본 <크립토주>에서도 이어진다. 본 작품의 추상적 경향은 오프닝과 후반부에 집약되어 나타난다. 인간에 의해 다양성이 훼손된 삭막한 문명의 현실을 보여주는 중반부의 경우, 다채롭게 변천할 수 있는 추상의 가능성은 전면 상실된다. 추상이 나타나는 본 작품의 오프닝부터 살펴보자. 히피 연인으로 추정되는 엠버와 맷은 어스름이 내린 밤에 으슥한 숲으로 향한다. 그들이 숲에 진입하자 나무들은 그 출입구를 봉쇄하듯, 널따랗던 풍경이 이내 곧 나무들로 빽빽하게 채워진다. 하지만 이는 마냥 닫힘, 폐쇄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극의 도입부에서 '존재가 입증되지 않은, 숨겨짐'을 의미하는 단어인 '크립티드'가 가능한 환경으로 이행된 것이다. 두 연인은 이윽고 나체가 되어 성교를 나눈다. 그들이 개방적인 외부에서 성교를 즐길 수 있는 이유는 나무가 타인, 세계의 시선을 차단함에, 그래서 수치심이나 부끄러움, 위협을 느끼지 않고 진정 자유롭게 '타자성'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크립티드의 상태는 곧 자유로움, 타자성의 존중이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성교는 그들의 이목구비, 표정을 클로즈업으로 포착하여, 시선에 얽매이지 않는 자가 저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성교를 즐기는 연인의 내면과 인식의 확장을 추상적인 이미지로 표현한다. 대지에 발이 묶여 있던, 삭막한 물질적 세계만을 인식하던 그들의 의식은 이내 곧 우주로 확장되고, 주어진 것 이상의 무수한 별자리들을 상상하고 창조하기 시작한다. 남들과 다른 타자가 되어,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펼칠 수 있는 자유란 곧 다채로운 창조력에 상응할 지다.
*상상된 실재의 크립티드
이렇게 두 연인은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은 채로 자유로이 성교를 즐길 수 있었다. 이윽고 두 연인은 동물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초식동물은 어떻고 육식동물은 어떻다, 그들은 인간의 시점에서 동물들을 판가름한다. 인간에게 좋고 나쁨을 바탕으로, 또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동물들을 판단한다. 하지만 이것이 곧 동물들의 실재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이 보지 못한 것, 또 그들이 바라보는 인간은 어떠할까. 과연 인간이 우호적으로 여기는 동물들이 마찬가지로 우리와 우애를 맺고 싶어 할까? 이러한 인간의 아집과 오직 자신만의 이기심을 바탕으로 동물들을 판단함에 동물, 그들이 사는 자연의 침범이 발생한다. 이윽고 두 연인은 철조망을 발견한다. 그리고 맷이 먼저 과감하게 넘기 시작한다. 철조망 너머는 그들의 영역이 아니다. 이윽고 영역의 주인인 유니콘을 발견한다. 유니콘은 인간에게 평화의 상징이요, 우호적인 동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는 인간이 상상한 유니콘이다. 실재 유니콘이 어떨지 우리는 직접 마주하지 않은 이상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맷과 엠버가 마주한 유니콘은 마냥 온순하지 않다. 설령 온순했다 할지라도,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 유니콘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인간이 먼저 유니콘의 영역을 침범하고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윽고 유니콘의 영역을 빠져나가려다 실수로 유니콘에게 해를 가하고, 유니콘은 이를 위협으로 느끼고 맷을 죽인다. 이에 분노한 엠버는 이후 유니콘을 살해한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유니콘과 그 영역을 존중했더라면 비극은 발생하지 않으리, 하지만 인간이 상상한 이미지에 맞춰서 실재를 침범하다가, 결국 살아 숨 쉬는 존재들이 목숨을 빼앗기는 비극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의 원죄일지 모른다. 초원에서 벌거벗은 상태에서 유토피아를 얘기하고, 이윽고 금기를 위반하는 두 남녀는 흡사 아담과 이브를 연상케 한다. 그리고 그들이 행한 금기의 위반이 결코 자유가 아니라, 누군가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었고, 이러한 아담과 이브의 자손들인 현생 인류가 자연스레 평화가 아니라 침입과 폭력을 일삼은 것이 아닌가.
*타자로서 크립티드
이렇게 시선에 발각된다는 것은 죽음, 최소 자유의 박탈이다. 이에 자유로운 상황에서 다채로운 타자성을 널리 빛내던, 저 하늘의 별자리들은 그 자취를 감춘다.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크립티드들이 드러난다면 이미지화를 거치거나, 극의 후반부에서처럼 무수한 죽임을 당할 뿐이다. 인간에게 드러나지 않은 존재여야만 자유로이 그 본성을 펼치며 살아갈 수 있다. 어째서 그들은 죽임당하거나, 또 타자성의 은폐를 강요받는가. 영화에서는 동물 형태인 크립티드에서부터, 빛에 가까운 크립티드, 그리고 반인반수 형태의 크립티드까지, 즉 크립티드의 모든 형태를 포괄하며 그들을 다룬다. 그리고 특히 반인반수 크립티드를 통해 타자성의 고찰을 행하는데, 그들은 인간과 유사하면서도 확연히 다르다. 얼굴이 없는 대신, 이목구비가 상체에 달린 크립티드 플리니의 경우 인간에게 바라는 기준에서 어긋나 있어, 인간의 미를 바탕으로 판단한다면 역겨워 보인다. 또 새의 몸에 여인의 얼굴이 달린 러시아의 크립티드, 알코노스트의 새끼가 알에서 깨어나는 장면은 대단히 그로테스크하다. 인간의 얼굴을 한 존재가 알에서 깨어난다는 이질성, 그 인간의 형체에 새의 깃털과 날개가 있다는, 우리가 그간 간직해온 통념, 개념에서의 어긋남이 혐오를 불러온다. 하지만 이는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생각이요, 자기중심적인 나의 판단을 넘어서지 못하는 행위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자의 무한한, 예측을 언제나 뛰어넘는 얼굴을 마주하며, 우리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고 무한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흡사 이러한 관점이 반영된 듯, 대쉬 쇼는 영화 속 타자인 크립티드의 각양각색의 얼굴을 '보기 좋게' 구성하지 않는다. 그는 신화, 전설 속에 묘사되었던 그들의 얼굴을 미화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반영한다. 이를 통해 우리의 인식을 뛰어넘는 충격을 선사하며, 결코 절대적이지 않은 판단에 대한 반성을 일깨운다.
(좌) 에드바르드 오쿤, 우리, 전쟁,1917~1923년 / (우)스타니스와프 이그나치 비트키에비치, 환상 - 동화, 1922년
*알레고리
작중에서 군인들이 크립티드를 위협적으로 여기는 것도 그들의 용모를 보고 지레짐작 겁먹거나, 우리와 다른 그들의 언어를 조금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레비나스가 말한 것처럼 그 얼굴이 나의 무능을 드러내고 두렵게 하므로, 군인들은 타자를 살해한다. 하지만 우리는 조안의 태도처럼 인간의 미적 기준과 타당성을 그들에게 대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각각의 고유한 미와 타당성을 긍정해야 할 지다. 이전 작품에서도 대단히 현란한 연출을 선보였던 대쉬 쇼는 본 작품에서 다양한 크립티드가 해방된 후반부를 표현하면서, 19~20세기의 민족 낭만주의,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등 다양한 사조의 무한한 화풍을 빌려오며, 각기 다른 특유성을 구현한다. 또 작중 고르곤 피비가 자신은 결혼 이후 혼혈아를 낳을 거란 말을 한다. 이는 익숙한 자신의 보편성을 자식에게 계승하지 않고, 자신으로부터 무한히 다를 수 있는 자식을 낳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보편성까지도 포기하며 타자성을 긍정하는 성숙한 태도가 타자를 거쳐 이어진다. 이러한 본 작품은 인도, 러시아, 그리스 등, 지리, 문화, 언어에 있어 무수하게 다른 국가들이 언급된다. 그리고 등장하는 크립티드도 각국의 설화를 반영하고 있는데, 이는 곧 본 작품의 배경인 미국의 기준에서 아주 다른 여러 국가의 사상, 관념이 육화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본 작품의 배경은 냉전이 한창이고, 특히 미국이 베트남전에 개입한 1960년대다. 이런 관점에서 다른 이념, 문화, 종교를 갖는 국가를 이해하기보단, 군대를 동원하여 무력으로 짓밟는, 오직 자신들만의 획일성과 보편성을 추구하는 시대의 알레고리라 할 수 있다. 또한 크립티드는 자연과학이 발달하기 이전, 인간이 자연을 상상하고 해석해놓은 결과물이라 할 수 있으며, 즉 불가해하고 예측불허한 자연의 공포에 상응한다. 하지만 과연 자연이 먼저 공격을 하였는가. 인간은 자연에 상응할 크립티드를 비보편적이라며 먼저 위협하고, 몰이해적인 태도로 침범한다. 인간 중심적인 태도는 자신은 자연을 훼손할 수 있으나, 자연은 인간에게 반격해선 안 된다는 불공정한 관계를 맺는다. 그래서 냉전시기의 우화임과 동시에, 자연과의 대화를 포기하고 파괴를 끊이지 않던 인간, 특히 서구사에 대한 비판적 우화로도 본 작품은 작용할 수 있다.
*은폐와 드러남
이러한 타자들은 어떻게 보편화되는가. 다시 영화의 도입부로 되돌아가 보자. 유니콘과 연인이 죽는 끔찍한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온다. 밤에는 넘을 수 있었던 철조망을 이제는 넘을 수 없다. 엠버가 맷의 주검을 등에 이고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낮이기에 철조망을 넘는다는 것은 눈에 띄어, 쉬이 감행하기 어렵다. 더욱이 나체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자유롭게 넘기 보다는 헬리콥터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자유롭게 결혼하고 혼혈아를 갖길 원하던 피비가 연인과 함께 놓인 장면도 살펴보자. 피비는 우선 주체적으로 다른 크립티드를 구하러 가는 데 힘쓰고 싶다. 하지만 그녀와 결혼을 바라는 연인은 가족을 신경 써달라며, 즉 피비에게 자기희생을 바란다. 이에 다른 크립티드를 구하러 간다는 그녀의 자유는 타인, 공동체에 소속됨으로써 제한될 수밖에 없다. 소속되어 경계를 넘지 못한다는 것, 철조망에 갇혀 시선을 신경 쓴다는 것은 곧 자유의 상실이지만, 한편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 타자는 소속에 대한 선택을 내려야 한다. 능동적으로 소속을 바라는 크립티드들은 몸소 타자성을 포기한다. 판은 자신의 뿔과 발굽을 숨기고, 메두사는 항시 뱀이 달린 머리를 가리며 그들에게 마취제를 놓는다. 바라보는 타인을 돌로 굳게 만드는 눈동자에는 렌즈를 낀다. 보편과 다른 타자들은 결코 동등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크립티드가 자신의 생명을 위해 인간에게 저항하는 것은 대죄이며, 인간이 그들을 다스릴 명분을 제공한다. 하지만 인간이 크립티드에게 저항하는 것은 언제나 정의다. 이에 그들은 인간이 되고자, 그들과 동등해지고자 타자성을 포기하지만, 이는 다만 은폐한 것이기에 그들은 거짓으로 살아간다. 타자이지만 아닌 채로 살아가는 그들은, 유사한 크립티드가 착취당할 때 거짓말한다는 양심의 가책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타자성을 드러낸 이들은 이내 곧 보편자들에게 소유 당한다. 인간과 동등하지 않은 크립티드는 자연스레 발견한 사람이 그들의 소유권을 지게 되어 플리니의 어머니처럼 주종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크립토주의 한계
그리고 그 타자성을 소유한 자가 거래를 일삼으며 부당한 이익을 챙기고, 이렇게 인간과 자본에 소유 당하며 그들은 자유를 박탈당한다. 타자성을 지니고 있지만 결코 제 자신을 위한 타자성이 아니다. 그렇기에 크립티드를 위하는 조안과 로런은 그들을 위한 '크립토주'를 구축하고자 한다. 각기 다른 대륙, 문화권에서 온 그들을 위해, 크립티드를 위한 개개의 환경을 구축한다. 자연에서는 사냥당하고 붙잡힐 위협이 가득하기에 그들을 위해로부터 분리해 안전을 보장한다. 그리고 대중들에게 크립티드들을 좀 더 많이 드러내, 그들이 사회에 편입되는 과정을 자연스레 형성하고, 또 대중들이 이질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인격 함양 교육을 도모하고자 한다. 어쩌면 이는 멸종 위기종을 보호하고, 동물과 교감하고 소통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동물원의 목표와도 유사하다. 하지만 진정 동물원이 이러한 미명을 오롯이 수행할 수 있는가. 이러한 주장, 즉 청각과 다르게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은 관람객을 의식하는 크립티드들의 모습이다. 그들에게 보기 좋은 모습으로, 즉 인간 중심적인 모습으로 실재 크립티드의 본성과는 다른 이미지가 형성되지는 않은가. 대중들은 상품화되어 자본주의적으로 본성이 뒤바뀐 크립티드들, 그리고 그들의 본 서식지에서 벗어나 습성을 잃어버린 작위적인 이미지의 크립티드와 관계를 맺는다. 이에 유니콘의 비극은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지 않겠는가. 또한 널따란 자연, 어디든지 향할 수 있는 자연과 달리, 크립토주는 아무리 섬세하다고 말한들 협소할 수밖에 없으며, 몇몇 종들은 우리에 갇혀있다. 이렇게 자유가 박탈되어있는 그들은 과연 창조력을 꿈꿀 수 있을까. 엠버와 맷이 진정 자유로운 상황에서 성교를 나누고, 무수한 상상력을 싹틔울 수 있었음을 생각해보라. 이러한 동물원이 과연 크립티드의 본 서식지와 환경을 적확히 구현한다 할 수 있는가. 크립토주의 크립티드들은 자유롭게 꿈꾸지 못한다. 꿈꿀 시간은 관객들에게 박탈당해있다. 이에 꿈을 먹는 크립티드인 바쿠가 크립토주에 간다면 과연 꿈을 먹을 수 있을까. 즉 아무리 좋은 이상을 지니고 있어도 크립토주의 설립자들에게도 크립티드는 이상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자유는 박탈당한다. 영화의 말미에 아무리 이상적이라 해도 크립티드의 ‘갇힘’에 연민을 느끼는 로런처럼, 우리는 나의 입장에서의 불쌍함과 타당함이 아닌, 그들의 처지에서 바라는 자유, 날 것의 얼굴을 생각해야 한다.
*인간은 야만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러한 크립토주와 군인들이 충성하는 국가는 과연 얼마나 다른가. 크립토주의 이상을 위해 크립티드의 자유를 박탈하고, 국가의 야심을 위해 크립티드를 무기로 활용하는 군인들의 태도가 과연 얼마나 다르냐는 것이다. 조안이나 로런은 분명 크립티드들을 위협하는 문명을 극복하기 위해, 이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크립토주를 설립한 것이지만, 실제로 크립티드들을 자신의 이상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킨 점은 국가와 같지 않냐는 것이다. 이러한 국가는 크립티드가 필요할 때는 동맹을 하여 무기로 사용하고, 자신을 팽창하고 확장하고자 하는 야욕에 헌사 하게끔 만든다. 이내 곧 그 이용 가치가 다하면 크립티드는 처분당한다. 이러한 군인과 크립티드의 관계는 본 작품을 냉전 시기의 미국에 대한 알레고리로 보았을 때, 동맹, 타 국가들을 이념 확장의 야욕의 수단으로 삼는 외교의 비판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국가는 폭력적이다. 국가는 크립티드의 폭력성을 싫어하고 두려워하지만, 마찬가지로 자신도 호전적이다. 자연을 극복하고 몰아내고자 하지만, 그것과 닮아있는 모습, 이는 철학자 아도르노의 이론을 연상케 한다. 아도르노는 인간이 계몽을 통해 자연의 공포, 폭력성을 몰아내고 인간을 주인 삼아, 자연을 극복한 문명을 추구했다고 본다. 하지만 그 시도는 실패로 귀결되었는데 자연의 인간 지배는 곧 인간의 자연 지배, 곧 인간의 인간 지배로 넘어서며 그 과정에서 자연으로부터 거세하려던 인간의 폭력성은 여전히 뒤따라왔다. 또한 자연으로 자유롭고자한 인간들은 보편적인 계몽에 의해 다시금 자유에서 멀어졌는데, 본 극에서 자연과 국가, 타자성의 박탈도 이와 유사하지 않은가. 자연에서 벗어나고자 한 국가는 그 어떤 자연보다 더욱 호전적인 형태로 자연을 모방한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를 몰아내야 할 것이다. 그간의 몰이해가 자연과 인간의 불통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이제는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카젤레의 돌팔매가 위협이 아니라 어긋난 행위를 경고하는 것이라는, 그 언어의 뜻을 알고 서로는 존중을 받아야 한다. 대화를 시도하여 상대방의 뜻을 읽고, 나의 의도를 이해시켜야 한다. 이러한 인간과 크립티드 소통이 성공할 때, 영화는 크립티드의 색깔을 이상과 동경의 파랑으로 뒤바뀌게 만든다.
*정리
이렇듯 우리는 그 모든 모순을 극복해야만 한다. 평화를 바라던 히피는 유니콘의 행위에 분개하여 도살을 일삼지 않았나. 하지만 진정한 평화는 모든 타자의 존재, 그 자유 자체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이를 위해 힘쓰는 것이니, 비로소 에버는 진정한 평화를 알아가며 한층 성장한다. 무엇보다 엠버와 맷을 아담과 이브의 상징으로 본다면, 첫 단추부터 '침범'하며 잘못 꿰어진 인류의 시초를 바로잡는 것이랴. 아담과 이브가 해야 할 진정한 위반은 타인의 침범이 아닌, 타인을 해방하기 위해서 금기를 넘을 수 있는, 유리창을 깰 힘이어야 한다. 이렇게 영화는 자연과 문명의 관계와 냉전 시기에 대한 비판적 알레고리를 크립티드로 선보인다. 엠버와 맷의 누드라는 도상과 그들이 놓이는 자유로운 동산이라는 환경을 생각했을 때, 그들의 행위와 반성은 보편적인 일원론 바깥의 타자를 이단으로 규정하여 박해하던, 이에 자애를 말하지만 자애롭지 못한 종교를 극복하는 알레고리로도 느껴진다. 무엇보다 이들은 인류의 시초이기 때문에, 선조의 행위를 바로잡아 후대의 인간이 바로 설 수 있는 가능성을 도모한다. 작금의 우리는 대화를 해야 하리라. 그리고 각자의 고유한 특질, 개성, 타자성을 널리 긍정하고, 이에 자유를 실현해야 하리. 비로소 각자가 향하고 싶은 곳에서 자신의 타자성을 널리 펼치게 되며, 저 우주는 다시금 무수한 별자리를 생성하게 되리니, 이렇게 대쉬 쇼는 동물원을 바탕으로 진정한 자유에 대해서도 되묻는다. 이를 일반적인 만화에 기대하는 낭만적이거나 말랑말랑한 요소가 전혀 없은, 적나라한 영화보다 더욱 처절하고 고통스러우며 비극적 요소가 점철된 특유의 화법으로 선보인다. 데뷔작에서도 하이틴 감성을 모두 소거하여, 특유성을 허용하지 않은 학교의 고통을 파격적으로 담아내던 대쉬 쇼는 자신의 날카롭고도 첨예한, 그 개성적 화법을 본 작품에도 이어오며 작가적 색채로 확립해간다. 이렇게 자신이 그 타자성을 몸소 실천하며 타자성을 말하는 그의 영화는, 그 타자성을 은폐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자유임을 몸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