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전주국제영화제 특집기사: 연재리뷰 2편
“육체에서 분리된 영혼은 항상 고매하고 감수성이 풍부하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무엇에나 흥미를 갖는 상상력과는 반대로 항상 자기 이익에 철저한 듯이 생각된다. 살아 있는 육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육체는 생각 때문에 고통을 받고 행동에 의해 개운해진다.” -알랭-
감성을 괄시하고 이성만을 강조하던 고대 그리스의 풍토, 그리고 그것을 계승한 서구의 지성사, 이 같은 이데올로기 속에서 여성과 정념적인 예술들은 언제나 박해와 수모의 가시밭길을 걸어갔다. 남성을 이성적이라, 여성을 감성적이라 규정한 플라톤에 의해서 그녀들은 믿을 수 없는 존재로, 인간적인 존재가 아닌 동물적인 존재로 낙인 찍혔다. 그리고 예술 중에서 감성적이고 추상적이며 감성을 자극하는 음악, 춤 등이 이성을 위협하는 광신적이고도 불온한 것으로 여겨지며 수모 당한다. 이후에 점차적으로 예술의 권리가 복권되며 음악은 종교를 찬미하기 위해서, 춤은 발레와 같이 문법을 고안한 것처럼, 보다 이성적으로 승화되기야 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본성적으로 정념적인 예술들인 그것들은, 특히 우리가 그저 흥겨운 리듬과 박자에 즉흥적으로 몸을 내맡기는 춤이란 실로 감성적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정념적인 춤의 영역은 현대 무용의 어머니로 불리는 이사도라 덩컨에 의해서 복권되었다. 1878년 태생의 이사도라 덩컨은 당대의 발레로 규정되어있던 무용의 아카데미즘에 반대하였다. 그녀는 아카데미즘에 의해 도식화된 발레의 문법과 복식 등에 굴레 씌워진 규칙에 반기를 들었다. 자유분방한 고대 그리스식 복장과, 기교와 인위성에 반발한 자연주의, 육체를 강조한 경향 및 여성성의 해방 등 동시대까지도 이어져오는 현대 무용의 조류를 개척해왔다. 이 같은 개척자에 의해서 다시금 복권된 태초 육체와 태고적 인류의 자유분방한 감성은 과연 동시대에 어떻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을까. 댄서 출신의 프랑스 청년감독 다미앙 마니벨은 <이사도라의 아이들>로 그녀 이후의 무용을 포착한다.

*감독 소개
1981년 프랑스 태생의 다미앙 마니벨 감독은 애초에는 영화와 무관한 길을 걸어 나갔었다. 그는 2006년 이전에는 댄서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2006년에 그는 영화를 공부하여 2014년에 <어 영 포엣>으로 데뷔하였다. 데뷔한 이래로 그의 색채는 로메르를 연상케 하는 일련의 소박함과 미니멀리즘으로 작품세계를 전개해나갔었다. 광범위한 공간을 사용하지 않고 소탈한 공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로, 일상적인 사건들과 대화만을 필두로 영화를 전개하는 로메르처럼, 지금까지의 마니벨은 소박한 태도로 일련의 철학적 탐구를 해왔었다. 그의 두 번째 장편 <공원의 연인>같은 경우에는 로코코의 화가인 와토가 그린 <키테라 섬의 순례>에 모티브를 가져온다. 연인을 만나기 위해 사랑의 섬인 키테라로 향하는 젊은 연인들, 하지만 해가 지기 전에 그들은 이 짧은 연회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와토에게서 이 같은 테마는 철학적임과 동시에 신화적이었는데, 마니벨은 대단히 소박한 생활환경 근저의 공원으로 옮겨와 일상의 이야기로 뒤바꾼다. 어떤 특별한 시공간이 아니어도 사랑에는 언젠가 끝,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을 대단히 미니멀한 양식으로, 현실과 꿈을 뒤바꾸며 담아내었다. 그는 단독 작업만을 하지 않고 협업도 하였는데, 일본의 청년감독 이가라시 고헤이와 함께 연출한 <타카라, 내가 수영을 한 밤>이 그렇다. 공간에 있어서 <공원의 연인>보다는 넓게 활용한다. 미장센 또한 <공원의 연인>보다는 더욱 풍성하다. 하지만 영화의 단순성은 여전하다. 고헤이와 함께 마니벨은 아무 말 없는 아이의 발걸음만을 소박하게 따라간다. 그 시선 속에서 세계를 마주하는 어떤 틀이 정립되지 않아 그저 모든 것을 생경하게 감각하는 아이의 시청각에만 집중하며, 우리가 잊고 살았던 일상의 감각을 개안한다. 또한 아이의 목적 역시 어떠한 사리사욕에도 얽매이지 않은, 그저 아버지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으로부터 기인한다. 이 같은 아이의 눈과 마음을 통해, 사랑의 본질을 꿰뚫었던 이전 작품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대해서 가장 순수하기에 가능한 본질적인 지각과, 어떤 떼도 묻지 않은 순수한 감성을 선보인다.
*에릭 로메르와의 유사성, 연출 1
<타카라, 내가 수영을 한 밤> 이후 마니벨은 다시 단독으로 <이사도라의 아이들>을 내놓는다. 이전의 협업과는 어떤 차이를 형성할 것인가. 무엇보다 소재가 무용이니만큼 한때 댄서였던 마니벨의 자전적인 이야기나 시선이 투영되어있지는 않을까. 로메르와의 유사성이 있었던 마니벨은 본 작품에서 더욱 로메르와 밀접해진 형식을 선보인다. 로메르는 <클레어의 무릎>이나 <겨울 이야기>등의 많은 작품에서 나날이 흘러가고 있음을 명시하고, 이에 따라서 변화하는 개개인의 일상을 포착한 바 있었다. 마니벨은 이 같은 로메르의 날짜 구성을 택해 이사도라 이후의 아이들이 그녀의 안무와 정신을 어떻게 이어나가고 있는지를 탐구한다. 그것을 포착하는 태도 역시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는 로메르의 미니멀리즘과 유사한데, 오직 몸의 움직임만을 쫓아가는 절제된 트래킹, 필요 이상으로 사용되지 않는 소박하고도 미니멀한 숏들에서 그 영향관계를 느껴볼 수 있다. 특히 본 작품에서의 카메라가 오직 인물들의 움직임만을 쫓아간다는 것은 첫 번째 옴니버스에서 여인을 포착하는 카메라에 의해 도드라진다. 그녀가 그저 책을 읽으며 앉아 있을 때, 움직임이 필요하지 않음에 카메라는 그저 고정되어 있으며, 책을 넘어서서 시선을 돌리거나 발걸음을 옮길 때, 그리고 독무를 행할 때 아주 조심스럽고도 세심하게 카메라는 이를 쫓아간다. 이 같은 카메라와 더불어 다른 연출도 작품이 조명하는 '춤'이라는 소재를 위해서 헌신하고 있는듯하다. 희멀겋거나 아니면 어두워서 오직 육체의 움직임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오직 안무를 위한 공간들이 주를 이루곤 하며, 이에 상응하듯 사운드 또한 최소화되어 오직 시각적인 움직임에만 관객들이 몰입하게끔 만든다. 하지만 이사도라는 형식주의적인 춤을 반대하지 않았던가. 즉흥적인 그녀의 현대성은 오히려 생생한 삶 속에서 나타나지 않던가. 그들이 영감을 받는, 그리고 인위적 무대를 넘어선 생생한 삶의 현장으로서의 무대로서 해변이나 바다, 밤거리 등이 <타카라, 내가 수영을 한 밤>에서처럼 아름답게 펼쳐진다.
*시간, 변화
영화는 이사도라의 회고록을 읊으며 시작된다. 그녀가 교통사고로 두 아이를 잃고 슬픔과 비탄에 빠져서, 이전과 같은 춤을 도저히 출 수 없게 되었다는 애련한 문장을 읊조리는 것이 그 서막이다. 이 같은 이사도라의 회고에서 드러나는 것은 변화라 할 수 있다. 자녀들의 사망 전과 후로 이사도라는 결코 같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상실의 고통을 춤으로 승화시켜야만 할 것이고, 이전의 춤은 결코 반복될 수 없을 것이다. 이사도라의 이 같은 회고는 그들과 우리에게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등장하는 한 여인이 이 같은 시간의 지속 속에서 이사도라의 회고록을 읽는다. 그녀 또한 읽기를 전후로 달라졌을 것이다. 영화는 특히나 이를 시간의 변화로 보여준다. 책을 읽을 당시의 그녀는 카페에 있거나 밤이라는 시간에 놓이고 있지만, 그 이후에 그녀는 다른 공간으로 향하거나 아니면 동트기 직전의 새벽 창문을 바라본다. 또한 이사도라의 <엄마>를 소화하고자 아침햇살이 내리쬐는 거리를 돌아다니며 특정 장소로 향하기도 한다. 이렇게 책을 읽은 이후 그녀는 이전과는 다른 목적을 띠며 새롭게 탄생한다. 이 같은 변신은 기존의 자신을 죽임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그녀는 어두운 탈의실에서 이사도라의 상복처럼 느껴지는 검은 무용복을 입으며, 자신이 아닌 이사도라에 투영된 존재로 자신을 재탄생시키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이사도라에 투영한다고 해도 온당 과거의 그녀와 지금의 안무가 같을 수 있을까. 오직 안무를 위한 공간인 그 희멀건 연습실조차도 그늘이 드리우는 저녁 무렵으로 저물며 변해 가는데, 이 같은 시간의 변화 속에서 춤은 언제나 같을 수 있을까. 영화가 오후에서 밤으로, 그리고 단풍이나 눈 내리는 날씨를 포착하며 시간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는 이유는 이 같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즉흥적으로 발맞추던 이사도라의 정신을 환기시키는 것이리라.

*이사도라의 정신 계승 1, 몰입
그녀가 책을 읽는 동안에는 정지된 카메라에 의해서,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 책을 벗어나서 발걸음이나 시선을 조금만 옮기더라도, 그렇게 공원 및 해변과 같이 지금 여기가 느껴지는 공간으로 향하면 과거는 필연적으로 깨어날 수밖에 없다. 그녀를 포착함에 사용되는 트래킹은 책이 아니라 동거하고 있는 타인의 메모로 눈 돌림에, 그리고 밖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을 마주함으로부터 사용된다. 특히 맹목적으로 삶을 찬동하는 아이들의 그 천진하고도 순수한 움직임은 이사도라가 추구하던 그 춤의 미학과 가장 밀접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녀는 이사도라의 미학이 아니라, 이사도라의 인생 자체를 현재에 옮겨오고자 한다. 그녀는 스스로를 철저하게 고립시킨다. 공원으로 향한 그녀는 프레임 안에 홀로 놓이거나, 아니면 타인들이 교차되는 순간에 독립적인 대비가 강조된다. 한 모녀가 그녀 곁으로 지나간다. 하지만 이사도라를 입고자 하는 그녀는 어머니였을까, 상실의 고통을 겪었을까? 또한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는 한 중년 남성이나, 하늘을 비상하는 새들로부터도 그녀는 철저히 유리되어 있다. 공원뿐만이 아니라 그가 골똘히 책을 읽는 집에서도, 함께 동거하는 듯한 타인이 있는 것으로 암시되지만, 양자는 고독하게 분리되어 있다. 그녀의 솔직한 움직임이란 안무 연습을 하다가 몸이 뻣뻣해진 듯 자연스럽게 스트레칭을 하는 모습일 것이며, 이사도라의 안무는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그녀는 이사도라 이전의 관습으로 되돌아가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단순히 이사도라의 형식만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거에 골똘히 몰입하여 그녀의 인생과 동화하고 몰입하는 것이 그녀가 이사도라를 계승하는 방식이리라. 그녀가 겪지 못한 상실을 현재가 아닌 과거로 향하며, 의도적으로 자신을 소외시키면서 간접 체험하는 것은 아닐까. 그 상태에서 나오는 표현이란 대단히 진솔한 것이며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것으로, 그녀는 대상에의 완전한 몰입을 바탕으로 이사도라를 계승하고 있듯 보인다.
*영화의 구성, 연출 2
이후 날짜가 뒤바뀌고 실연을 한다는 전단지가 붙어있어, 마치 그녀가 비로소 이사도라에 온전히 투영되어 <엄마>의 실연을 위해 무대에 오른 것이라 유추할 법하다. 하지만 그녀를 포착하던 카메라는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무용가 소녀인 마농과 그녀의 스승에게 향한다. 이후 마농의 실연으로 추측되는 시퀀스 이후에는 이를 객석에서 마주한, 한 노파의 삶으로 뒤바뀐다. 그래서 영화는 네 인물들의 삶으로 구성된 옴니버스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균일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연속적이다. 이를 통해 영화는 특정한 개별의 삶과 개개의 시간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이사도라의 사후에도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시간을 포착하고 있음을, 하나의 공통된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인류의 삶임을, 그 시간 내에서 이사도라와 간접적으로 조우하고 있는 인물들의 삶을 조명한 것임을 드러낸다. 그리고 공통된 하나의 시간, 그리고 이들이 바라보는 공통된 이사도라이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삶의 군상들은 제각각임을 환기시킨다. 이후에 포착되는 마농은 첫 번째 옴니버스에 포착되었던 그녀처럼 세밀한 움직임으로 포착되지 않는다. 그녀가 이사도라라는 하나의 틀에 맞춰서 자신의 움직임을 정제한 것이라면, 마농은 자유로이 주관적인 태도로 <엄마>를 해석한다. 그래서 그녀의 안무는 내밀하고도 부드러운 트래킹이 아니라 오히려 핸드 헬드에 가깝게도 느껴진다. 또한 이 같은 예측 불허한 개개인들은 프레임 바깥으로 궤도를 이탈하기도 하고, 그들의 여정을 롱숏 및 익스트림 롱숏으로 포착하고 굳이 따라가지 않으며, 일련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는 인생임을 환기시킨다.
*이사도라의 정신 계승 2, 자유로운 표현
첫 번째로 포착된 여인은 스스로 책을 읽으며 독학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 포착되는 마농과 그녀의 선생님은 스승과 제자 관계가 대두된다. 선생님은 그녀의 사고에 맞춰서 이사도라의 <엄마>를 해석하였다. 그래서 마농에게 특정한 동작을 더 명확하게 강조해야한다고도 말하며, 때로는 그녀의 안무와 표현이 이해되지 않는다고도 말한다. 한편 마농은 이 같은 질의에 대해서 자신의 입장에서는 이사도라의 <엄마>가 극복하기 위한 서사로 느껴진다는 것을, 대단히 추상적인 동작들에 대해서 자신은 다르게 생각함을 피력한다. 선생님은 이사도라처럼 누군가의 엄마이다. 그리고 자식을 유학 보내며 일련의 간접적인 상실을 경험하였기에 더욱 이사도라와 근접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한편 마농은 연습된 바를 형식적으로 재현해보는 리허설보다도, 예측할 수 없는 그날에 직접 관객들 앞에서 실연하는 것이, 결코 어제와 내일의 실연과 같지 않을 그 오늘의 실연에서 좋은 결과물이 탄생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농은 선생님이 없을 때 이사도라의 회고를 읽는다. 마치 시선에서 해방되어야 만이 자유롭게 그 삶을 마주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선생님이 마농에게 행하는 영향은 자신이 이사도라를 해석한 일련의 규범을 그녀에게 주입하는 형식화된 교육에 가까울 것이다. 그리고 마농은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그 추상적인 바를 해석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두 번째 에피소드의 방향은 규정된 바로부터 해방을 느끼는 것, 또한 이사도라와 선생님 그리고 마농이 서로가 결코 같지 않음을 느끼는 것이다. 무대와 연습실을 벗어나 해변에서 해방감을 만끽하며, 마농과 대화하는 선생님은 이사도라와 같으면서도 다른 자신의 삶을 느꼈을 것이다. 그 이후에 선생님은 마농의 독무를 그저 지긋이 지켜보며 미소 지을 뿐이다. 오히려 이사도라의 정신을 선생님에게 가르친 건 마농일지 모른다. 이러한 이사도라의 정신은 과연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그것은 때 묻지 않고 고착화되지 않은 순수하고도 젊은 정신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마농의 독무로 보여준다.
*이사도라의 정신 계승 3, 삶의 승화
한편 이사도라의 삶은 무용수에게만이 고착화되지 않는다. 이사도라가 중시한 즉흥적인 육체의 표현과 본능의 해방을 생각하면, 무용수의 형식적인 자격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육체에 솔직할 수 있다면 무용수일 것이다. 그래서 무용수에서 무용수로 넘어가던 영화의 카메라는 마지막으로 관객을 포착하며, 그들 또한 무용수임을 강조한다. 그녀들이 이사도라를 마주함에 첫 번째 여인은 자신과 구분되는 이사도라의 옷으로 갈아입고 재탄생했으며, 두 번째로 포착된 마농은 특별히 갈아입지 않은 채로 이사도라와 다른 자신으로 자유로이 승화시켰다. 그리고 세 번째로 포착된 노파는 자신과 유사한 경험을 한 이사도라에 의해 깊이 영감을 받고 그녀와 유사한 자신을 드러낸다. 그녀가 촛불을 비춰서 한 아이의 사진을 바라봄에, 노파도 상실의 경험이 있었을 것이라고 유추가능하다. 그녀도 첫 번째의 여인처럼 어둠 속에서 옷을 갈아입는다. 하지만 이전에 느껴지던 시간의 변화와 달리, 노파에게서 어둠은 가시지 않으며 그녀로부터 다른 존재가 된 것 같지도 않다. 노파는 자신을 흘러가는 시간에 맡긴 것이 아니라, 이사도라의 <엄마>를 통해서 잠겨있던 시간을 드러낸 것은 아닐까. 그녀에게서 일상적 움직임과 춤은 구별되지 않는다. 그녀가 어두운 밤거리에서 집으로 향하던, 그 무겁고도 음울한 발걸음을 느리게 떼는 일, 억겁의 세월 속에서 쌓인 쓸쓸함과 슬픔, 수심이 느껴지는 얼굴을 영화는 그녀의 느린 동작에 발맞춰 조심스레 포착할 뿐이다. 어둠 속에서 옷을 갈아입고 아이를 안는 행위를 하는 것도 춤이 아니라 그저 젊은 날에 자신의 아이를 안아봤을, 또한 그 상실한 아이를 상상해 봄에서 비롯된 일상적 표현으로 느껴진다. 다만 지금까지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으리라, 촛불을 피우지도 않았으리라. 하지만 노파는 이사도라의 <엄마>이후로 비로소 솔직하게 그 과거의 슬픔을 수면 위로 끄집어 낸 것이리라.
*정리
이러한 노파의 표현 또한 이사도라의 정신이랴. 형식화되지 않은 솔직하고 절절한 감정이 매개된 육체의 움직임, 이 같은 움직임에 있어선 일상과 비일상조차 분간조차 결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계승된 이사도라의 세 가지 정신은 한때 댄서로서 마니벨이 느끼고 고찰했던 무용에 대한 사색이리라. 그 정신은 다음과 같다. 형식을 넘어서서 대상과 동화되는 정신, 자유로이 대상과 원전을 해석하고 주관적으로 표현하는 정신, 그리고 규정된 안무나 무대를 뛰어넘어서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표현으로 승화시키는 정신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타 장르를 영화화하는 일은 때때로 위험을 수반한다. 주목하고자 하는 그 대상에만 집중하여 영화다운 매력을 잃어버리는, 오히려 주객이 전도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분명 춤이 갖는 세밀한 동작과 움직임을 위해 미니멀한 양식을 선택한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마니벨의 본 작품은 춤만을 포착한 영화가 아니라, 다양하게 춤을 추는 각각의 대상에 따라 이를 어떻게 포착할지에 대한 영화적인 고민도 느껴지며, 이는 개개의 삶을 어떻게 예술로 승화할 것인지에 대한 미학적인 고찰로도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명의 인물들을 포착하는 카메라는 아주 미묘한 변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서로에게는 어떠한 접점도 없는 세 인물을 우아하게 이어내는 편집도 분명 인상적이다. 이렇게 춤을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은 로메르의 양식이다. 하지만 이사도라의 아이들이 그 정신을 변화시킨 것처럼, 로메르의 아들은 인물들의 삶과 정신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대사가 아닌 움직임을 포착하는 방식으로 나름의 변주를 보여준다. 이렇게 거장들의 영향은 무용계에서도, 그리고 영화계에서도 계승과 절충, 재탄생을 이루며 그렇게 유산은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