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전주국제영화제 특집기사: 연재리뷰 1편
주요상영작 리뷰: https://artlecture.com/project/5036
“행위자들의 관점도 이 객관적인 공간 내에서 각자가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서 달라진다.” -피에르 부르디외-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분명 하나다. 우리는 다 같이 똑같은 지구에 서있다. 하지만 그 세계를 해석하는 태도는 모두가 제각각이다. 우리는 기후도, 환경도, 풍습도, 언어도 다른 제각각의 공간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다르다는 것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언어이리라. 각 언어 속에 존재하고 부재하는 그 차이에 따라서, 다양한 민족들이 주목한 것과 주목하지 않는 것, 그들의 세계에 실재했던 것과 전무했던 것이 드러난다. 또한 언어의 문법은 그 사용자들이 어떻게 사고하였는지도 드러난다. 그리고 이 같은 거시적 언어 또한 더욱 세분화되어 미시적 영역으로 나뉘게 된다. 솔직한 계층의 언어, 보다 더 꾸미는 계층의 언어, 양자의 언어는 분명 같음에도 달라서 불통을 이루거나 공감을 사지 못할 때도 있다. 그래서 우리가 서있는 세계는 하나지만, 각자가 바라보는 세계는 그야말로 무한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타인과 대화할 때 각자의 생활세계를 비교적 공통되게 구축해야만 한다. 독일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상호작용과 대화를 통한 소통이란, 서로가 서로의 세계를 공유하고 이해함에 비롯하는, 공통된 생활세계를 형성하는 과정으로서의 대화이거나, 아니면 그 세계가 형성된 이후에서야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공통된 생활세계가 이룩함을 경험하는가, 아니면 불일치를 경험하는가. 대체적으로 후자가 더 많지는 않던가. 내지인과 외지인, 우리의 아집과 객관적인 사실, 단편적인 요소들과 총체, 계층과 시선의 차이 등 세계를 이해하는 무수한 관점들의 간극을 협의하지 못하기가 부지기수며, 이에 우리는 개인적인 영역에서도, 그리고 거시적인 영역에서도 대화를 하기 보다는 서로가 서로에게 독백을 하는 형국이다. 분명 시각적으로는 둘이지만 청각적으로는 일치하지 않고 따로 논달지, 마치 섞여들지 않는 흑과 백처럼 나뉘어져 있는 그런 모습들은 우리는 너무 자주 마주하곤 한다.

*영화의 고전성
본 작품 <미끼>로 장편 데뷔하는 1976년 영국 태생의 마크 젠킨이 논하고자 하는 것도 이 같은 결코 융화되지 않는 생활세계와 불통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무수한 단편작업으로 실험적인 연출과 영상미를 탐색하던 그는, 대단히 고전적인 형식들과 투박한 연출을 바탕으로 모든 것이 어긋나고 삐걱거리는 알레고리를 형성해낸다. 일단 본 작품은 흑백영화다. 영화는 영국의 한 해안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흑백을 필두로 한 16mm필름과 거친 후시녹음을 이용한 연출 때문에 마치 1940~50년대에 이탈리아의 변방과 실재의 삶을 생생히 날 것으로 포착하던, 데 시카, 비스콘티, 로셀리니 등이 개척해나간 네오리얼리즘의 풍경이 연상되곤 한다. 본 작품도 하나의 허구라기보다는 오히려 리얼리즘에 가까운 태도로 세계를 조명한다고 볼 수 있다. 영화는 뚜렷한 서사는 없으며 그저 흘러가는 마을의 시간을 각자의 의식 속에서 복합적으로 풀어낸다. 자명한 이야기의 부재 및 원색이 상실된 흑백이라는 매체성 때문에 우리는 이미지, 특히 형체에 더욱 집중할 수 있다. 16mm 필름이 자아내는 거칠고 자글거리며 때때로 흐릿한 질감 때문에 감상자는 더욱 이미지에 골똘히 확인하려는 집중력이 환기되곤 한다. 무엇보다 영화의 초반부는 거의 무성영화를 연상케 할 정도다. 사운드는 대단히 통제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시각이 도드라진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형체가 명확하거나, 아니면 우리가 이미지에 집중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통해 전달되는 정보나 사실들을 명확히 아는 것은 아니라는 바를 명시한다. 영화의 편집은 대단히 재빠르다. 무수한 수십 개의 숏이 하나의 시퀀스를 형성하고, 개개의 숏은 찰나동안 지속되고 순식간에 다른 숏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우리에게 남는 것은 숏에 대한 하나의 인상이다. 그리고 이 같은 인상을 안다고 착각하는 '미끼'를 감상자들도 함께 물게 될지 모른다. 영화 속 인물들처럼 말이다.
*화면비와 좁은 세계
영어를 사용하고 잉글랜드 억양이 묻어나기에 영국이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시대상은 정확히 언제인가? 영화의 1.33:1이라는 화면비 때문에 우리는 마냥 그것을 20세기 중엽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영국이라는 공간은 알지만, 그 이상의 시대성에 대해선 모호하다. 그리고 1.33:1의 화면비는 과연 고전적인 화면비로만 작용할까. 이 같은 화면비는 동시대에 통용되는 비스타 비전이나 시네마스코프에 비한다면 너무도 좁다랗기 때문에, 우리에게 폐쇄성과 갑갑함을 안긴다. 그리고 이 같은 영화의 화면비가 의도한 것도 갑갑함, 특히 소규모 공동체의 폐쇄성이리라. 영화는 이러한 화면비와 더불어 눈을 클로즈업하곤 한다. 마치 서부극에서 결투를 앞둔 두 남성들의 시선이 교차되는 듯한 고전적인 분위기가 연상된다. 과거라는 시대상을 환기시켜주는 연출임과 동시에, 이 같은 눈빛의 강조는 그들의 시선이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확인시켜준다. 이 같은 눈의 클로즈업과 동시에, 무수한 인물들의 시점 숏이 영화 속에서는 주를 이루고 있다. 영화의 전체를 거쳐서, 특히 초반부에서 강조되는 것이 바로 이 같은 시선의 교차이다. 무수한 시선 속에서 좁다란 마을 속 구성원들은 결코 독립되어 있지 않다. 어떤 한 사람의 행위 이후에는, 그것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이 동반된다. 이들이 다른 공간에 놓이고 있다한들 말이다. 이렇게 1.33:1의 화면비와 눈빛의 클로즈업, 그리고 시점 숏의 교차를 통해, 일거수일투족이 파악되는 좁다란 세계를 구축한다. 이와 동시에 영화는 전혀 다른 공간과, 심지어는 다른 시간, 의식에 놓이는 숏들임에도 그것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매치 컷을 활용한 몽타쥬를 펼쳐낸다. 이를 통해서도 이 좁은 마을의 공간성을 강조하는데, 누군가가 항해를 나가는 숏이 포착된 이후에, 다른 누군가가 대지에서 냉장고를 여는 씬이 포착된다. 항해에서 잡아온 물고기가 냉장고로 이어진다는 것, 이와 더불어 그물의 줄을 휘감음에 다른 곳에 놓인 죽은 물고기가 포착되기도 하고, 누군가가 타자기를 '두들김에' 다른 누군가의 집에서 문이 열리는 편집들은 모두 좁은 마을의 유기적인 연결을 암시하는 듯하다.
*매치 컷과 몽타쥬, 비선형적 시간
또한 무언가가 부딪힘에 배는 정박되기도 하지만, 한편 그 시간과 결코 동일하지 않은 결말의 미래에 일어난 창문의 깨짐이라는 사건이 이어지기도 한다. 이 같은 숏들은 단지 유사성만 있을 뿐 자명한 연속성은 전혀 부재하고 있는데, 이는 본 작품이 과거를 비추는 작품이기에, 역사를 구성하는 기억의 속성에 상응하는 연출이라고 생각이 든다. 만약 이 같은 실험적인 매치 컷이나 비선형적인 의식, 시간 구성이 없었더라면 앞서 언급한 네오리얼리즘을 어느 모범적인 영화학도가 우수하게 구현해놓은 사례정도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이 같은 비선형적인 시간은 마크와 함께 동행한 소녀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환기된다. 그녀가 부부의 창문에 당구공을 던짐과 동시에, 그 손에는 수갑이 채워지는데 각각이 놓이는 시간은 전혀 다르다. 공을 던지는 것이 현재라면 수갑은 미래고, 수갑이 현재라면 이는 반대가 된다. 또한 마크의 조카가 사망한 것을 기준으로 영화는 과거로 플래시백되며, 그리고 수미상관으로 이어지는 결말에서 반복되는 마크의 초상이 곧 현재로 되돌아옴이라 할 수 있다. 이후에 포착되는 구성원들 각각의 다양한 시점과 기억, 의식들이 혼란하게 매치 컷되어, 마치 구성원들 각각의 회고와 진술로 이뤄진 것만 같은 결과물이 완성된다. 그리고 이 혼돈의 구성은 초반부에 사망한 한 청년의 진실을 밝혀가기 위한 집단적인 기억의 채집일지 모른다. 영화는 마치 무성영화처럼 그 기억들이 간직한 행동과 사물 각각에 집중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 이상의 정보는 모른다. 사망의 진위나 바다가재의 도난, 마크가 논하는 도둑질 등 모든 것들은 미궁 속에 빠져있다. 매치 컷 때문에 현혹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같은 매치 컷이 자아내는 효과는 쉽게 단정 짓곤 하는 성급한 우리의 의식을 건드리는 것은 아닌가.
*그레인과 플리커
16mm필름에서 비롯되는 마치 숏에 구멍을 내는 듯한 조야한 그레인들은, 영화 속에서 지속적으로 포착되는 그물의 속성과 닮아있다. 그리고 이렇게 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걸려들 수밖에 없는 이 그물에 우리의 의식은 붙잡히는 것일지 모른다. 심지어 영화 속 플리커조차도 깜빡거리는데 이는 고전적 영화의 기술적 결함을 환기함과 동시에, 불빛조자 온전치 못한 세계이자 의식임을 강조하듯 하다. 그래서 영화 속 인물들이 절도와 통발의 훼손 등의 사건에 확신을 갖는 태도는, 불안하게 깜빡이는 플리커에 의해 결코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느껴진다. 또한 깜빡거리는 플리커나 필름의 불완전함 때문에 발생하는 그레인은 일련의 ‘어긋남’에서 비롯된 산물이다. 영화 내부의 세계도 이 같은 그레인과 플리커가 깜빡이는 세계라 할 수 있지는 않은가. 내지인을 사랑하는 외지인 소녀의 욕망이 못마땅하여 그 어긋남을 바라보는 오빠의 시선처럼, 그 조카가 아버지가 아니라 삼촌을 따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 같은 엇갈림을 강제적으로 되돌리려고 했을 때, 또한 오해와 의심이 증폭되어 살인은 발생한 것이리라. 영화는 이 같은 불완전한 우리의 정보, 의식을 환기하는 것으로 카메라가 포착하는 정보들의 한계와 불완전함을 강조한다. 영화 속 사물을 포착하는 숏들은 잘려나가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리고 그것을 마주하는 인물들은 단편만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확신에 찬 태도로 중앙구도에 놓이는데, 이러한 아집에 의해 서로가 서로에게 갖는 적의와 의심은 더욱 증폭되어간다. 사물들을 마주하며 마크는 부르주아 부부를 도둑이라고 의심하며, 바다가재의 껍질을 청년들이 놓고 갔기에 그 단편적인 바를 토대로 그들이 통발을 훼손했을 것이라 단정한다. 이런 점에서 영화 속에서 강조되는 물고기는 곧 이 같은 의심에 사로잡힌 인간일지 모르며, 그물망은 하나의 세계이거나 스스로가 쳐놓은 자멸의 덫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찢겨나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크는 그 덫을 더욱 공고히 묶곤 하지 않던가. 그것을 함께 묶는 게 마크 혼자가 아니라, 그가 의심한 청년과 함께 결합하는 것처럼, 자신의 아집에 타인을 강제적으로 동원하여 의심과 오해라는 거짓을 더욱 공고히 진실로 둔갑시키는 것은 아닌가.
*세대갈등
이 같은 형식을 바탕으로 영화는 각계각층의 분열이나 구별되는 그들의 삶을 포착한다. 일단 세대적인 갈등이다. 청년들은 앞서 짧게 언급한 것처럼 기성세대에 비한다면 무기력하다. 마크에게 향하는 조카의 태도처럼 아버지들은 일은 주지만 그들을 착취하고 보수를 지불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부르주아 부부가 젊은이들에게 보이는 태도도 마찬가지로 대단히 인색하지 않던가. 그래서 기성세대들의 공간이 롱숏으로 포착되는 바다와 같이 대단히 널따랗고 풍요로운 반면, 청년세대들은 밤에 캠프파이어를 하는 장면이 좁은 프레임을 꽉 채운 풀숏으로 포착되는 등 대단히 갑갑하게 느껴진다. 또한 기성세대들이 바에서 가득 담긴 맥주를 마시고 기름진 생선구이가 주어진다면, 청년세대들은 그 옆에서 당구를 하는 등 이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고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세대 간의 구별은 서서히 무너진다. 마크는 관광업을 하는 부르주아 부부와 반목함에, 그리고 바다가재를 놓쳐서 경제력이 추락함에, 과거에 허용되었던 요소들이 더 이상 그의 앞에 보이지 않는다. 한때 편집으로 이어지던 마크와 생선구이는, 이제 마크와 다 발라진 생선 뼈, 그리고 빈 잔으로 뒤바뀐다. 마크의 경제력은 이제 청년세대로 추락한 것일까, 그렇게 뒤바뀜에 바와 당구대, 각자의 세계에서 나뉘던 대화들이 민첩한 편집으로 뒤섞이며, 분리되어 있던 두 세대의 차원은 혼합된다. 그로부터 도출되는 것은, 마크를 위시한 청년세대들에게도 함께 던져지는 듯한 아줌마의 발화로서 '할 수 없음'이다. 그리고 마크는 소녀와 함께 부르주아의 부조리한 행위에 대항하지 않던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층은 명확히 나뉜다. 청년 세대가 정당한 돈을 지불한 것인지, 진짜로 바다가재를 절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마크가 분노하는 그 죄목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그의 밑에 있는 청년세대다. 고압적인 마크에 의해 강제로 통발을 꿰매는 것은 화해가 아니라 강요된 혐의이자 회개이다. 그렇게 기성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고, 또한 후술할 계급적 반목에 의해 이들이 얽히고설켜 미래를 저물게 만드는 살인이 일어나는 것은 아닌가.

*계급갈등
하지만 청년만이 추락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마크도 마찬가지로 밑으로 떨어진다. 영화 속에서 마크와 민박업을 하는 부부와의 대립은 계급적인 충돌이다. 마크는 어업을 하는 노동계층이고, 부부는 그들에게서 땅을 산 부르주아다. 물론 그들은 마을공동체로서 함께 뭉칠 때도 있다. 여행 온 외지인이 마크를 비롯한 어부들에게 시끄럽다며 불평을 하지만, 그것을 민박의 부부가 제지해 준다. 그리고 이 같은 외지인들에게 내지인들은 바가지를 씌워야한다는, 양자의 위계나 착취관계가 포착된다. 하지만 내지인들의 외지인 착취뿐만 아니라, 마을공동체 내부에서도 착취가 일어남이 사실이다. 마크의 통발을 훼손한 것은 분명 내지인일 가능성이 높다. 영화는 두 명의 용의자를 제시한다. 하나는 앞서 언급한 청년들이고, 다른 하나는 우아하게 바다가재로 저녁을 즐기는 그 부부다. 양자 모두 다만 바다가재를 즐길 뿐 그들이 마크의 것을 가져갔다는 확신은 없다. 다만 서로의 차이는 청년들은 가재의 껍질을 남겼다는 것이고, 부부는 이를 은폐했다는 것이다. 부부의 은밀함이 드러나는 시퀀스는 다시 한 번 반복된다. 민박집의 여인이 마크의 집에 찾아오지만, 그는 야간 조업을 나갔기에 집에 부재한다. 하지만 여인은 그 주인 없는 집에 우아하게 '침입'하고 마크가 배를 사기 위해 모아둔 저금통을 열어본다. 그것도 모른 채로 마크는 통발을 던진다. 영화 속에서 언급된 것처럼 잠시 휴가철에 지역에 와서 착취하고 떠나가는, 마을공동체에 그저 발을 걸치며 소속된 외지인의 계급을 이 같은 편집으로 암시하는 것은 아닌가. 오히려 통발과 저금통의 유사성을 생각한다면, 통발을 찢은 그 범인이 부부임을 암시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들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청년은 오인 당한 것은 아닌가. 한통속이 된 내지인들에 의해 무지한 채로 착취당하는 외지인들처럼, 마크의 통발과 집은 그도 모르는 채로 은밀하게 타인에게 우롱 당한다. 이 같은 착취에 의해 마크는 영영 배를 사지 못할지 모른다. 그가 배를 사기 위해 돈을 모은다고 하자 이를 비웃듯이 더욱 불안하게 플리커가 깜빡이는 것처럼, 거의 반전효과에 가깝게 뒤바뀌는 소름끼치는 미장센으로 그의 꿈을 위협하는 것처럼, 일방적인 착취와 피착취로 이뤄진 계급의 관계에 의해 마크는 자신의 처지를 영영 극복 못할지 모른다.
*단절: 대화와 문
하지만 이 같은 불화를 온당 계급 및 세대갈등에만 국한시킬 수 있을까. 무엇보다 이러한 갈등은 무엇으로 비롯되었는가. 외지인들을 향해 내지인들은 말을 숨길 것이다. 하지만 내지인들 서로 간에도 말을 숨기지는 않던가. 영화의 초반이 무성영화처럼 보였던 이유는 소리는 없이, 그저 시각만이 강조되었기 때문이요, 그 이미지에서도 개개인은 홀로 놓이거나 여럿이 놓이더라도 시선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아니면 하이 앵글과 같은 구도에서 뒷모습이 포착되어 단절이 드러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마크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질의하기는커녕 확신에 찬 태도로 주장만 내뱉었고, 타인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무시하기 일쑤였다. 이에 대화는 간헐적이다. 오직 마크가 물고기를 팔기 위할 때만, 오직 그 찰나에만 타인의 문이 열린다. 영화 속에서 단절과 고립은 대화와 더불어 이 같은 문으로도 드러난다. 거무튀튀한 시커먼 문들은 모두 굳게 닫혀있어 결코 그 내부를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 같으며, 열리는 순간은 경제활동이 이뤄지는 찰나일 뿐이다. 그마저도 재빠르게 문은 닫히거나, 아니면 문을 열지 않고 대신 문고리에 물고기를 걸어둘 뿐이다. 이 같은 단절에 의해 의심이 증폭되어 영화 속 여러 사건들은 촉발되었을지 모른다. 즉 계층 간의 갈등이 먼저가 아니라, 계층을 넘어선 서로간의 불통이 먼저였을지 모른다. 마크와 형의 관계처럼 말이다. 영화의 결말은 오프닝에서 포착되었던 마크의 초상으로, 다수의 시선이나 의식으로부터 오직 그의 시선과 의식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마크는 창문을 깨뜨리는 형을 보고 극에서 거의 처음으로 제대로 된 질문을 한다. 그리고 형은 나름의 이유를 답한다. 이에 의심은 더 이상 불거지지 않을 것이다.
*정리
또한 반목하던 형과도 일련의 화해한 것이 드러나니, 흐릿하고 자글거리는 그레인과 깜빡거리는 플리커, 좁다란 의식, 억견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결국 타인으로의 확장과 이에 의해 가능한 집단적 지성에 다름 아닐 것이다. 조카의 죽음 이전의 과거를 다층적으로 거슬러가지 않았다면, 본 사건에 얽히고설킨 이해관계들은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며, 이에 우리는 영화 속 인물들처럼 또 다른 의심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 이후에 흘러가는 삶은 때때로 순간적인 프로즌 프레임을 통해 비연속적으로 포착되곤 한다. 앞서 언급한 영화의 의도된 결함에 상응하는 형식들에 의한 삶인 것일까.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인생은 바다로 나아간다. 또한 현재를 살아감에도 조카를 회상하며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과거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영화는 이렇게 마지막까지 시간성을 드러낸다. 몽타주의 미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이 같은 형식을 통해서 영화는 믿을 수 없는 과거, 대단히 뒤죽박죽 혼란이 얽히고 구멍이 많은 과거라는 시간성을 보여준다. 또한 영화는 편집을 통해서 우리의 의식에서 비롯한 좁은 세계와, 이를 확신하며 형성되는 의심과 교만이라는 그물에 대한 경계를 역설한다. 현란한 몽타주에 의해 우리의 비판적인 사고를 줄곧 자극하는 본 작품은 2016년 개봉한 <곡성>이 연상되기도 하지만, 본 작품은 단순히 열려있는 텍스트를 넘어서, 네오리얼리즘을 연상케 하는 이미지 및 소재를 통해 계층의 갈등 및 이기주의와 같은 사회적 안건들을 엮어낸다. 사용된 형식과 매체들이 아득한 20세기를 연상케 하는 작품, 언뜻 보기엔 <아티스트>와 같은 발굴되고 재현된 결과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본 작품은 과거를 차용하면서도 대단히 현대적이다. 본 작품에서 과거는 다만 재료로서, 동시대에도 통용될 수 있는 안건들과 지금 여기에서 생산되는 미학을 위한 형식으로서만 사용됐기 때문이랴. 이렇게 가장 고전적임과 동시에 가장 현대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인 <미끼>는, 갓 데뷔한 마크 젠킨의 무수한 가능성을 예견하는 작품임과 동시에,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만나볼 수 있는 가장 독특한 작품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