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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코마사, <문신을 한 신부님> | ARTLECTURE

얀 코마사, <문신을 한 신부님>

-두 개의 얼굴, 어둠과 광명-

/Art & Preview/
by 박정수
Tag : #영화, #광명, #어둠, #인류, #종교

얀 코마사, <문신을 한 신부님>
-두 개의 얼굴, 어둠과 광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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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삶 자체가 유한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둘러싼 제도는 이에 굳이 한계를 부여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마땅한 악행은 익히 제어되어야 할 것이나, 악덕이 아니라면 자유는 열려있어야만 한다. 또한 우리는 사회 속에서 신분을 지워내지 않는다면 결코 자유를 도모할 수 없는 비련한 소년의 일대기를 목도했다. 마찬가지로 불완전한 서로에 대해서 조금은 너그러워질 필요가, 특히 절대자 또한 인간의 육체를 가졌을 때, 흔들림의 순간이 있었던 것처럼, 그 떨림을 무마시켜주고 삶을 앞으로 전진시켜줄 너그러움이 필요하다....


"그보다 1800년 전에 인류의 모든 죄를 위해 자신을 바쳤던 사람도, 올리브 산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동안 별빛 가득한 하늘을 보며 어둠의 잔이 나타났을 때, 그것을 받기를 오래도록 주저했던 때가 있었다."  -빅토르 위고-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쇠약한 등에 짊어진 전 인류의 죗값, 그리고 배신자 유다까지도 안타깝게 여기는 그 성심, 이에 사람들은 그를 육화된 아가페 그 자체로 여기기에 충분했다. 허나 그 자애로운 존재는 당대에 범죄자로 낙인이 찍혔다. 죄목은 현대적으로 풀이하면 신성모독과, 조세 거부, 그리고 자신을 메시아 및 왕이라 사칭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그의 재판은 로마제국의 총독이었던 안나스와 가야바, 빌라도를 거쳐 총 세 차례를 통해서 이뤄졌으며, 혐의는 결코 벗겨질 수 없었다. 이후에 그에겐 한 번의 선처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 반란과 살인을 일으켰던 바라바에게 향했다. 자애로움의 화신은 당대의 구조 내에서는 살인범보다 더욱 악독한 범죄자 그 자체로 여겨진 셈이다. 이 같은 예수의 재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과연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법은 무엇을 수호하고자 한 것인가. 진정으로 선한 가치를 수호하고자 한 것일까, 아니면 법 자체가 권력으로서의 법과 제도, 체계를 비호하고자 한 것일까. 또한 선과 악의 개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체로 보편성을 띠곤 하지만, 개개의 이념, 종교, 구조 내에서 분명 차이가 존재한다. 이 차이에 의해 어떤 지역에서는 선인으로 여겨지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지독한 악인으로도 여겨질 가능성이 있다. 같은 종교 내에서 때때로 그렇지 않은가. 프랑스에서는 잔다르크가 성녀인 반면, 영국에서는 마녀로 불리던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성인과 범죄자의 얼굴은 각자의 이면에 내재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절대적인 얼굴은 없다. 마치 닉스의 자식인 파네스, 그 이름조차 에로스와 혼재되며, 그 성별조차 언제나 뒤바뀌곤 하는 여러 얼굴을 가진 신의 존재처럼, 마찬가지로 우리의 얼굴은 다양하다.    






어떤 관점에서는 성인, 어떤 관점에서는 악마, 폴란드의 영화감독 얀 코마사는 이 같은 탐구를 <문신을 한 신부님>에서 풀어낸다. 영화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본 극의 서두에 포착된 구도의 변화가 영화가 논하고자 하는 주제를 관통한다고 본다. 평면구도 속에서 소년원 내 목공소의 한 단면이 포착된다. 이윽고 그 노동을 감시하는 감독이 사라지고, 목공소는 질서를 잃고 혼돈이 도래한다. 한 학우를 다른 아이들이 무자비하게 폭행한다. 그 변화를 포착함에 영화의 카메라는 급박하게 움직인다. 이후에도 영화에서 카메라의 움직임이 거의 도드라지지 않는, 카메라가 고정된 정적인 프레임으로 본 극이 전개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도입부의 무빙은 짧지만 대단히 강렬하다. 무빙 자체가 인상적이기도 하지만, 그 폭행의 순간을 반대편에서 포착하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특정 연출은 양면성을 지닌다. 그들의 작업실에 짙은 안개가 껴있다. 톱밥 가득한 안개인 것일까. 허나 동일한 풍경의 질감이 미사를 행하는 종교적 공간 내에서도 아른거린다. 그곳에서 아스라한 미장센은 빛처럼 느껴진다. 그 동일한 질감은 작업장의 쾌쾌한 느낌과, 종교적인 축복의 느낌 양자 모두를 갖는다. 또한 리버스 숏으로 한 명의 신부로서 선과, 다수의 아이들로서 악은 대비된다. 허나 그 강렬한 대비는 다니엘이 신부가 됨으로써 무너진다. 온전한 선도, 확고한 악도 없다. 또한 그 여정 속에서 편집은 대단히 거칠다. 소년원의 삶에 상응할 수 도 있겠지만, 단순히 거친 것으로 단정 지을 순 없어 보인다. 보통 행복한 순간들이 거칠게, 닫히지 않은 상태로 잘려나가곤 하는데, 본 극의 종교에서 어루만져야하는 죽음 및 유한성에 상응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연출 속에서 펼쳐지는 다니엘의 삶은 클로즈업된 그의 얼굴의 여정에 다름 아니다. 그 얼굴을 응시해도 선인과 악인임을 결코 단정 지을 수 없는 미묘함, 또한 그 여정 속에서 미묘한 심리변화를 선보이는 다니엘의 영혼에 감상자를 집중하게끔 만든다. 밀착한 클로즈업으로 포착된 그 얼굴은 무언가를 단정하기엔 대단히 오묘한 여지를 남긴다. 허나 다니엘을 둘러싼 작고도 큰 여러 구조들은 언제나 그의 삶을 규정하려고 한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소년원이라는 구조는 하나의 강압과도 같다. 회개를 통해서 이뤄지는 양순한 사회화, 자율적인 온후함은 찾아보기 어렵다. 신부는 절대자가 어디서든 존재한다며 그들에게 허용된 종교시간을 그리 진중히 여기지 않는다. 감독이나 신부의 눈을 피하면 아이들은 한 마리의 들짐승이 되며, 소년원은 그들을 향해 올바른 참회로 이끌지 아니하고, 그저 절망적인 낙인만을 찍을 뿐이다. 그들에게 자유로운 삶 대신 억압과 강요된 삶만을 가르치는 소년원 이후에도, 언제나 그들로부터 규정된 낙인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윽고 사회로 나오면 아이들은 목공소로 가야만 한다. 다니엘은 신학교에 입학하고자하지만, 소년원 출신이라는 낙인은 입학을 불허한다. 소년원에서 도드라졌던 양지와 음지의 대비는 이윽고 사회에서도 여전하다. 언뜻 보기에 그 세계는 평온해보이지만, 마약과도 같은 위법으로부터 그들은 방종하다. 이러한 사회를 지배하는 종교는 앞서 언급한데로 낙인의 회개를 허락하지 않으며, 양지에서는 소년원 이후의 삶을 살아감과 동시에, 음지에서는 방탕과 위법이 이어진다. 이 같은 양지에서의 삶은 타율적으로 보내진 여행의 낯선 정감, 무감한 정취가 느껴지는 차가운 롱숏으로서 나타난다. 그리고 다니엘은 그 세계 내에서 음지에서만 가능한 것을 양지로 옮기려는 즉흥적인 선택을 저지른다.      



빅토르 위고의 걸작 『레 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마들렌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자신에게 부여한다. 그는 자신의 낙인에 따라서, 그의 모든 행위들이 의심받을 거란 걸 잘 안다. 또한 마들렌이라는 새로이 얻은 신분으로 행한 선행조차, 무수한 불신의 눈총이 쏘아본다. 신분이라는 낙인으로부터, 그리고 선함이 의심되는 세계에서 그것을 실천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다니엘의 일대기도 이와 유사하다. 그는 토마소라고 신분을 숨겨야지 만이 신부로 거듭날 수 있다. 감상자는 그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참회하고자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출소 전에 노을과 황혼이 어린, 바로크 종교화의 조명법이 강조되던 순간에 다니엘이 행한 그 기도는 기만이라 보기에는 경건하다. 기만이라면 감독이 굳이 바로크적인 조명의 순간을 설정하면서까지 기도를 포착했을까. 허나 그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소년원으로부터 온 그는 모든 행위와 의도를 의심받는다. 마찬가지로 최하위계층과 교도소로부터 온 장발장이 끝없는 의심을 산 것과 유사하지 않은가. 그들이 어디로 나아가고 싶어 하는지에 사회는 관심이 없다. 그들이 비롯된 세계에 그들은 차가운 쇠사슬에 묶인 듯 메여있어야만 한다. 그들이 비롯된 계층, 신분, 세계로부터 비롯된 신분이 곧 즉자라면, 다니엘은 그것을 초탈해 자유를 실현하는 대자라 할 수 있다. 물론 신분을 숨길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에게 기울어진 제약된 자유란 그런 방식으로밖에 실현될 수 없다. 신부를 마주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위엄에 굴복한다. 중요한 것은 다니엘이나 토마스라고 여겨지는 신부가 아니라, 권위 그 자체의 상징인 사제복이다. 사람이 사제복의 위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제복이 그 사람의 권위를 증명하는 듯, 신자들은 사제복을 입은 이를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내면에 접근하는 것 자체에 관심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애초에 나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그것은 실현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아무리 클로즈업으로 포착한다 한들, 감상자가 다니엘의 내면과 그 진위에 온당 닿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허나 감독은 영화적 장치들로 그 참회를 긍정한다. 주임신부 자리를 건네받은 그 날에, 하늘에서는 비가 내린다. 그의 죄를 씻어 주리라 하는, 자애로운 절대자의 물줄기가 아닐까. 그렇게 절대자로부터 진위를 인정받은 한 젊은이는, 이제 종교의 이름으로 타인들의 내면에 접근하기 시작한다. 그 고해성사 속에서 타인들의 진실과 마주한다는 행위의 어려움이 드러난다. 타인과 나 사이에는 두터운 벽이 가로막고 있고, 다만 그 벽에 간헐적으로 뚫려있는 구멍에 의해, 불완전한 타인의 형체를, 그리고 목소리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신분이 일부 숨겨진 순간에도 진실을 드러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불완전함을 고백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본 극에서는 많은 이들의 불완전함이 폭로된다. 주임신부는 겉으로는 완전해 보였지만 알코올중독을 앓고 있었고, 한 운전자를 마치 악마로 묘사하던 사고의 진위조차, 양자 모두의 불완전함 속에서 발생했다. 모두에게서 결함과 불완전함이 내재해있다는 것이 동일함에도, 그것이 드러나 있는가, 드러나 있지 않은가에 따라서 사람들의 시선은 변이한다. 불완전함이 폭로되지 않은 이들은 언제나 신봉 받지만, 불완전함이 폭로된 이를 사회는 결코 가만 놔두지 않으며, 심지어 그들을 잘라 내려한다. 그렇게 드러난 것 속에서도, 드러나지 않은 여지들이 있기에, 본 극 속 많은 인물들의 입체성을 구성함에도 말이다. 오직 명확한 것은 죽음이다. 사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그저 기독교의 이름으로 사후를 약속하고 되뇔 수밖에 없는, 그 죽음만이 우리에게서 절대적인데 말이다. 허나 우리는 죽음 대신 타인의 어떤 규정을 절대적이라고, 마치 광신도처럼 믿는 것이 아닌가.     



그럼으로써 선인과 악인에 대한 구분조차 결코 뚜렷하지 않다. 악인의 얼굴 이면에는 우리가 외면한, 차가운 눈총으로 쏘아본 선함이 있을지 모른다. 사고자의 장례행렬을 바라보는 그 차가운 시선들처럼 말이다. 그리고 앞서 바라본 데로 선인의 이면에도 악함이 내재되어 있다. 당장 신부로 거듭나기 위해 거짓말이라는 죄악을 행한 다니엘도 마찬가지 아닌가. 허나 그렇게 불완전하기에 우리는 그 결함들을 서로 보듬으려 노력해야 할 것이다. 다니엘이 토마스 신부로 하나 되며, 본 극의 신자들이 하나 되는 순간은 바로 죽음의 극복에 있을 것이다. 희생자들을 기리는 게시판 앞에서 다니엘과 유가족들이 행하는 의식은 심히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기독교라기보다는 그것의 태동 이전에 보이던 주술적 의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허나 망자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 영원하지 못한 유한한 존재에 대한 애상이 섞인 그 성토의 장에서 사람들은 하나로 묶인다. 영화는 공동체의 역할에 대해서 논한다. 토마스는 서로의 결함을 보완하는 공동체에 다름 아니다. 특히 죽음에 대해서 말이다. 허나 토마스보다 더 거대한 공동체를 관장하는 시장의 태도는 언제나 다수의 편에 선다. 소수자, 약자로 내몰린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 막상 보편자로부터 그들의 구분 또한, 앞서 언급한 우리의 입체성 때문에 대단히 모호한데 말이다. 그 공동체는 낙인이 찍힌, 특히 공동체로부터 외지 출신인 운전자를 공동체 바깥으로 내몬다. 이를 통해 전체주의적인 속성을 띠며, 삶을 위험으로 인도하는 동시대 네오 파시즘 물결에 경각심을 일으킨다. 특히 이를 동조하는 시장으로부터 공동체로부터 인간 그 자체보다 우선한 공동체의 이기심과 전체성이 경계되며, 영화는 그것을 타파할 것을 논한다. 종교도 그것으로 서서히 모이는 공동체도 언제나 인간이 최우선이어야만 한다. 다니엘은 그 운전자의 유가족을 다시금 공동체내로 초대하려 노력하며, 공동체를 바로 세운다.       



본 극의 원제는 '성체축일'이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눈, 그 희생과 신험이 긷든 빵과 포도주의 제정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본 극에서도 시장이 성체축일 행사를 의뢰하지 않던가. 그들은 왜 성체축일을 왜 기념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의 기적에 대한 신비주의적인 관점에서? 우리는 절대자가 아니기에 그 권능이 아니라, 우리가 익히 실천할 수 있는 기독교적인 정신으로서, 피와 살을 나누는 자애로움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본 극도 마찬가지다. 다니엘은 신부와 사제복이라는 권위를 내려놓는다. 그는 신에 대한 무지와 불완전함을 고백한다. 또한 성당 내에서 이뤄지는 미사의 거룩함과 진중함을 내려놓는다. 종교적 공간은 절대자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모여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삶의 예찬을 위한 공간으로 뒤바뀐다. 우리는 성체와 성혈 그 자체를 축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위에서 논의한 공동체와도 같다. 우리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새겨봐야 할 것이다. 불완전함을 극복하기 위한 공동체처럼, 성체와 성혈이 중요시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자애로운 태도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 자애로움은 자신의 위기 속에서도 굳건하게 운전자의 부인을 다시금 공동체의 내부로 편입해오고, 또한 십일조와 유품 등을 빈자, 약자에게 기증하는 다니엘의 신념에 다름 아닐 것이다. 공동체만 위하는 태도는 다수가 되어버린 보편자들에 의해 약자에 대해서 눈이 멀어버렸다. 허나 그들의 피와 살에 다름 아닌 약소한 동전과 유품들이 한데 모여, 그것은 또 다른 이의 불완전한 삶의 일부를 채워내는 기적을 행한다. 원제로서 성체축일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정신에 있을 것이다.      



본 극의 차가운 질감, 허나 다니엘이 운전자의 부인으로 향할 때 강조되는 것은 청색이 아닌 녹색이다. 그것은 대단히 괴괴하고도 흉흉한 녹색이다. 초록의 색채론에서 그 상징은 독을 품은 파충류와 양서류의 불길함에 빗대어지곤 한다. 독약의 색채, 그럼으로써 죽음을 예고하는 불결한 색채는 부인의 집을 가득 채운다. 집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보내진 지독한 편지 속 글자의 색채조차 흉흉한 초록으로 느껴진다. 허나 그 색채는 다시금 삶에 대한 긍정의 의미를 회복해야만 한다. 마치 엘리자의 노래를 듣는 순간, 다니엘의 얼굴에 형형색색의 조명이 다채로이 내려앉는 것처럼, 그 따스한 감각을 회복해야만 한다. 한편 그 변화는 결코 영속적이지 않다. 엘리자와 행하는 그 짜릿한 순간도 본 극을 관통하는 거친 편집이 그 절정과 끝을 잘라버린다. 그렇게 열려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마치 다니엘이 처음과 끝에서 눈여겨보는 창문의 열고 닫힘처럼, 열려있는 자유 속에서 사랑 및 주체성의 성취는 가능하다. 허나 그 낙인이란, 특히 그의 몸에 새겨진 문신이란 과거의 과오란, 타인들에게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닌 듯 보인다. 그 몸 자체가 아니라, 우리는 그 몸이 실행한 자애로움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다니엘은 그가 몸담은 세계를 변화시켰다. 불완전한 타인들은 마찬가지의 서로를 옆에 앉힐 줄 알게 되었다. 허나 더 넓은 세계가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그 세계는 거친 핸드 헬드로 오직 폭력만이 포착된다. 그 세계는 성체축일의 본령을 꿈꿨던 소년을 다시금 타락시킨다. 본 극의 차가운 질감이 이해가 가는 바이다. 개인이 아무리 바뀌어도 중요한 것은 그 개인을 둘러 싼 제도, 구조, 이념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한 개인의 타락과 폭력을 제어하는가, 방조하는가.     



삶 자체가 유한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둘러싼 제도는 이에 굳이 한계를 부여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마땅한 악행은 익히 제어되어야 할 것이나, 악덕이 아니라면 자유는 열려있어야만 한다. 또한 우리는 사회 속에서 신분을 지워내지 않는다면 결코 자유를 도모할 수 없는 비련한 소년의 일대기를 목도했다. 마찬가지로 불완전한 서로에 대해서 조금은 너그러워질 필요가, 특히 절대자 또한 인간의 육체를 가졌을 때, 흔들림의 순간이 있었던 것처럼, 그 떨림을 무마시켜주고 삶을 앞으로 전진시켜줄 너그러움이 필요하다. 특히 구조가 그렇다. 구조는 구조 그 자체를 위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는 인류를 보듬어야만 한다. 그렇게 유한하기에, 또한 거짓으로 시작되었기에 다니엘의 자리는 결코 영속적이지 않을 수밖에 없다. 허나 그것이 인간의 한계가 아니라, 제도의 폭정에서 비롯되어선 안 된다. 본 극의 결말을 마주하는 우리의 슬픔은 방관하는 제도, 제도를 위한 제도로부터 기인한다. 과연 다니엘의 향후는 어떠할까. 여전히 열려있는 편집 속에서 많은 것을 단정할 순 없겠지만, 시작과 끝의 순환 속에서 우리는 낙관을 바라긴 어려울 것 같다. 다니엘이 성당을 나오며 빛을 넘어섰음에도, 그곳에는 낙원이 기다리지 않는다. 인간이 가진 두 얼굴에 대한 이야기, 『레 미제라블』의 장발장과 마들렌을 연상케 하는 실화를 본 극은 흥미롭게 담아낸다. 그것이 결코 극의 후반부까지 흡입력 있게 다가오진 않지만, 주제를 관통하는 몇몇 형식들은 크게 인상적이다. 또한 거친 편집이 가질 수 있는 다층성 또한 본 극의 결을 넓힌다. 다니엘의 근접한 얼굴에서 표명되는 영혼, 그것이 띠는 두 개, 그 이상의 얼굴에 대한 여지를 우리는 남겨둬야만 한다. 우리도 그렇고 타인도 그렇다. 선인이자 악인이며, 모두가 불완전함으로 동일하기 묶이기에, 그렇게 집결하는 우리는 조금의 피와 살은 나눌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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