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가 과도하게 밀집된 서울. 좁은 땅덩어리에 몰린 수많은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아파트는 점점 더 높이, 점점 더 빽빽하게 도시의 틈새를 채워간다. 효율이라는 목표 아래 공사는 매일 이어진다. 나는 고층 건물 사이를 지나다니며 매연과 공사판의 먼지를 들이마시고 살아간다. 이러한 도시 풍경은 더 이상 개인의 경험이 아닌, 도시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집단적 기억으로 자리 잡았다. 베이징 출신의 예술가 인시우전은 1980~90년대 중국의 급격한 현대화와 사회적 변화를 배경으로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기억을 재현하는 설치와 퍼포먼스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그가 고민하는 ‘집단적 기억’이란 무엇인가?
프랑스의 사회학자 모리스 알박스(Maurice Halbwachs, 1877-1945)는 『집단 기억 La Mémoire Collective』(1950)이라는 저서에서 이 개념을 제안했다. 그에 따르면 기억은 사회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고 구조화되며, 개인이 속한 사회적 집단이 공유하는 관습과 사고방식에 따라 의미를 얻는다. 즉, 기억은 결코 개인적인 영역에 머무르지 않으며, 진정한 기억은 바로 집단 기억이다. 인시우전은 작업을 통해 자신의 개인적 기억을 확장해 집단적 기억을 제시하고자 한다.
시멘트와 도시 현대화의 풍경
인시우전은 건설회사에서 근무했던 경험에 기인해 시멘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중국의 급격한 현대화 과정에서 거행된 폭력적인 재개발을 은유하기 위해 사용된 재료였고, 당시의 기억은 작업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 그는 “베이징 하늘에 늘 황사 먼지가 가득했으며, 이는 마치 시멘트 분말이 인간 삶의 모든 틈새를 빈틈없이 메워버리는 것 같았다”라고 회상한다. 이처럼 시멘트 분말은 먼지의 미세하고 부드러운 성질에 잘 대응하는 물질이었다.
<폐허 도시 The Ruined Capital>(1996)
베이징 수도사범대학 미술관에 설치되었던 <폐허 도시 Ruined City>(1996)는 이러한 경험에서 비롯된 작품이다. 그는 300제곱미터 규모의 전시실에 가족과 이웃에게서 빌린 가구나 길거리에서 수집한 물건들을 배치한 후, 그 위를 4톤의 건조 시멘트 분말로 가득 덮었다. 바닥에 깔린 기왓장과 흩뿌려진 시멘트는 사라져가는 베이징의 옛 골목길을 연상시키며, 도시화로 파괴된 주거 공간을 물리적으로 재현했다.
<변화 Changes>(1997)
한편, <변화 Changes>(1997)는 평안대도(平安大道) 재개발 사업에 대한 구체적인 반응으로 제작된 작업이었다. 1997년부터 1998년까지 베이징시 정부는 평안대도를 확장하는 계획을 시행했고, 거리의 주거 공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공식적인 자료는 출판되지 않아 철거의 구체적 양상은 은폐되었다. 인시우전은 재개발 현장에서 문패와 기왓장 등 주거의 물질적 흔적을 수집했고, 철거 현장에서 촬영한 흑백 사진을 기왓장에 부착해 인근 마당에 일렬로 배열했다. 마치 정부의 강압적인 철거 행위를 폭로하듯,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배열된 사진들은 공식 서사 속에서 은폐되고 단편화된 기억의 양상을 반영한다. 이와 동시에, 주거 공간의 흔적을 수집한 집단적 배열은 사라진 옛 베이징 거리에 대한 기억을 공적인 장소에 불러낸다. 그렇게 철거와 파괴의 경험은 개인을 넘어, 집단적 기억으로서 공감의 장을 형성한다.
헌 옷과 집단적 기억
<뜨개실 Yarn>(1995)
인시우전의 작업에서 흔히 사용되는 또 다른 재료는 ‘헌 옷’이다. 「옷에 관하여 About Clothes」라는 에세이에서 그는 헌 옷을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 “나는 옷이 두 번째 피부 같다고 느낀다. 옷은 자신만의 표현적 언어를 가지고 있고, 그들의 시간과 역사에 연결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옷은 개인적 기억은 물론 시대적 유행과 같은 당대의 역사적 기억을 담아내는 재료라고 볼 수 있다. <옷 상자 Dress Box>(1995)에서 인시우전은 어린 시절 입었던 헌 옷을 직사각형 모양으로 접어 각 모서리를 꿰맸고, 여행 상자에 넣은 후 시멘트 반죽을 부어 굳혔다. 여행 가방 덮개 안쪽에는 “이 옷들은 내가 지난 3세기 동안 입은 것이다. 이 옷들에는 나의 경험, 기억, 그리고 시간의 물리적 흔적이 담겨 있다.”라고 적혀 있었다. <뜨개실 Yarn>(1995)에서 인시우전은 다수의 개인적 기억을 엮은 매체로서 헌 옷을 활용하기 시작한다. 그는 가족 구성원들의 스웨터를 성별에 따라 두 개의 더미로 분류했는데, 형형색색의 스웨터 더미는 여성의 옷, 회색과 푸른색 계열의 더미는 남성의 옷이었다. 그는 스웨터의 매듭을 풀어 그 실로 새로운 스웨터나 스카프를 제작했다.
<집단적 무의식 Collective Subconscious>(2007)
2000년대에 들어 인시우전은 미니밴과 헌 옷을 활용한 <집단적 무의식 Collective Subconscious> 시리즈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는 미니밴을 두 개로 절단한 뒤, 이를 400여 개의 헌 옷으로 만든 퀼트 천으로 연결했다. 설치 작품 내부에는 작은 나무 의자들이 엇갈리게 배치되었으며, 퀼트 천이 만들어내는 알록달록한 빛깔이 내부로 스며들었다. 관람자는 의자에 앉아 중국의 오래된 팝송 ‘베이징, 베이징 Beijing, Beijing’을 감상할 수 있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 이후 1980년대 중국은 경제 성장 붐을 경험했는데, 당시 미니밴은 ‘xiǎo miàn(小面)’이나 ‘작은 빵 조각’이라고 불리며 경제적 풍요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인시우전은 중국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미니밴을 15미터 이상의 거대한 설치물로 연장했고, 이를 통해 개인적인 자신의 기억을 집단적인 것으로 확장하며 1980년대 중국의 시대적 기억을 소환하고자 했다.
다양한 감각을 활용한 기억의 중첩과 충돌
<경극 Beijing Opera>(2000)
인시우전은 되살리는 중국 옛 도시의 기억은 다양한 관객과 만나며 공명하기도, 엇갈리기도 한다. <경극 Beijing Opera>(2000)은 옛 베이징 북서쪽 후통(胡同) 후하이(後海) 호수 지역에서 촬영한 일상적인 장면을 실물 크기로 인쇄해 전시 공간의 벽에 부착한 설치 작업이다. 이탈리아 페스카라(Pescara)에서 개최된 《Fuori Uso 2000: The Bridges》에서 처음 선보인 작업으로, 도로 아래에 세 개의 스크린을 설치하고, 그 주변에 베이징에서 가져온 작은 나무 의자들을 배치했다. 사진 속에서 베이징 시민들은 동네 공원에서 장기를 두거나, 경극을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는 등 공동체적 일상을 즐기고 있다. 인시우전은 이러한 풍경을 실감 나게 전달하기 위해 현장에서 직접 녹음한 소리를 음향 장치를 통해 흘려보냈다. 이를 통해 관람자는 단순히 시각적으로 사진을 보는 것을 넘어 청각과 촉각을 동원해 기억의 장소를 체험하게 된다. <경극>은 도시를 옮겨 다니며 다양한 미술관에서 전시되었고, 사라져가는 베이징 옛 도시의 풍경을 다른 문화권의 관람객과 공유했다. 급격한 도시화 속에서 거의 자취를 감춘 이러한 전통적 공동체의 풍경은 관람자에게 향수와 동시에 이질적인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찻집 Teahouse>(2001)
인시우전은 2002년 제4회 광주 비엔날레에서도 비슷한 유형의 설치 작품을 선보였다. 이는 2001년 제2회 청두 비엔날레에서 선보였던 <찻집 Teahouse>(2001)을 다시 전시한 작품이었다. 인시우전은 음료를 마실 수 있는 공간 주변에 옛 베이징의 사진을 배치해 마치 한국의 관람객이 베이징 옛 거리 한복판에 앉아 있는 듯한 환각효과를 느끼게 했다. 광주의 미술관이라는 장소에 베이징의 전통적 풍경이라는 전혀 다른 시공간적 맥락이 중첩되면서, 관람자는 자신의 경험을 되살려 작가의 기억과 연결되기도 하고, 반대로 너무나 낯선 풍경 앞에 기억의 간극을 마주하기도 한다.
이처럼 인시우전은 시각, 청각, 촉각 등 다양한 감각을 활용해 집단적 기억을 소환한다. 이는 중국을 넘어 여러 문화권의 관람자들이 지닌 기억과 교차한다. 재현된 타인의 기억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형성되었기에 이질감을 유발하기도 한다. 그의 작업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의 기억은 어떻게 구축되며, 그 물리적 흔적은 어디에 남아 있는지 질문하게 된다. 우리는 기억을 어떻게 보존하고,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그리고 기억을 통해 우리는 타인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참고문헌
Wu Hung, et al., eds, Yin Xiuzhen. New York: Phaidon Press,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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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di, Noa, Yigal Elam. “Collective Memory — What Is It?” History and Memory 8:1 (1996): 3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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