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의 그림, 넓게는
예술은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중요한 매개체였다. 라스코
동굴 벽화는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며 공동체의 염원을 담았고, 중세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성경 이야기를
그림으로 풀어내어 신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지금의 예술보다 더 종교나
‘믿음’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지금처럼 화려한
볼거리가 즐비한 세상이 아닌 과거의 한 시점을 상상해 보자. 2차원 평면 안에 깊이감 있는 공간을 구현한
그림들, 빛이 투과하며 갖가지 색으로 빛나는 스테인드글라스를 난생처음 보았다면 어땠을까? 당시의 그림에는 어떠한 ‘마술적’
힘이 있어 인간의 상상력과 믿음을 하나로 묶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때의 사람들은 그림을
믿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시점부터 판화가 그림을 복제하고 사진기가 그림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기술이 발전하고 시대가 변화하며 그림과 이미지의 본질과 기능도 함께 변했다. 미디어의 역할이 달라진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이에 대해 기술 복제가
예술 작품의 아우라를 약화시키고, 예술의 가치가 제의적 가치에서 전시 가치로 전환된다고 했다. 이뿐인가? 출판업과 텔레비전은 같은 정보를 대량으로 찍어내고 송출하여
아주 많은 대중에게 전달한다. 게다가 지금 우리를 둘러싼 미디어는 복제를 넘어 무한히 빠르게 반복 생산
및 배포, 편집, 소비된다.
동영상, 즉 철학자 빌렘 플루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움직이는
그림,’ 게다가 움직이면서 소리까지 내는 그림들이 무게를 잃은 대신 속도를 얻고 확산된다.
빌렘 플루서는 『그림의 혁명』에서 이러한 변화를 코드화된
정보로의 전환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그는 그림과 텍스트가 점차 정보로 변환되었으며, 이러한 정보들은 기술적 이미지의 형태로 복제되고 유통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과거에는
미디어가 출판과 방송처럼 일방적 소통(broadcasting)의 형태를 띠었다면, 이제는 모든 개인이 생산자이자 번역자, 유통자, 소비자가 되는 상호적 소통(network) 구조로 변화했다고 본다.

빈곤한 이미지와 믿음의 상실
예술가 히토 슈타이얼은 디지털 이미지가 원본의 권위를
잃고 반복적으로 복제되는 과정을 "빈곤한 이미지(poor
image)"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우리가 소셜 미디어에서 흔히 접하는 ‘밈,’ 저화질의 동영상이나 사진은 원본의 디테일과 맥락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빠르게 확산된다. 이러한 이미지는 쉽게 접근할 수 있어 민주적인 확산의 가능성을 지니지만, 그 과정에서 본래의 의미와 진실성이 퇴색된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정보와 이미지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철학자 한병철은 그의 책 『정보의 지배』에서 과잉된 정보가 인간의 사고를 마비시키고 진리를 왜곡한다고
지적한다. 현대인은 스스로가 정보의 소비자라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정보에 종속된 상태에 있다고 분석한다.
소셜 미디어의 필터링 된 이미지와 광고는 현실을 과장하거나
왜곡하며 우리가 본래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미지의 과잉은 신뢰할 수 없는
현실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현실은 단지 이미지에 국한되지 않는다. 뉴스, 데이터, 심지어 과학적 사실까지도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조작될 수 있다. 이제는 그 어떤 정보도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시대다.
이미 최근에도 가짜 뉴스와 조작된 이미지들이 현실을
어떻게 왜곡하거나 과장하고 정치적 맥락 속에서 재구성되는지 실감 나게 확인하지 않았는가? 이미지와 정보가
넘쳐나는 사회에서 우리는 진실과 허구를 구분하기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스테인드글라스가 신의 빛을
투영한 매체였다면 스마트폰 화면에 비치는 이미지는 우리의 눈을 속이고 현실을 왜곡하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지금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그림과 정보는 코드화되었고, 이러한 정보는 과잉 생산과 유통을 거치며 진실과 허구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든다. 이제 파편화된 디지털 이미지와 정보는 더 이상 고유한 진리를 담보하지 않는다.
한병철은 이에 대해 가치 허무주의가 지나가고 정보사회의 증상으로 진실 자체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새로운 허무주의가 출현했다고 본다. 오늘날 우리는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참고 자료 빌렘 플루서, 『그림의 혁명』, 2004, 커뮤니케이션북스 히토 슈타이얼, 『스크린의 추방자들』, 2016, 워크룸프레스 한병철, 『정보의 지배』, 2023, 김영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