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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과 불협화음
강렬한 액션 연기를 선보이는 여성 캐릭터 위주의 영화들이 잇따라 개봉하고 있다. 영화 <악녀>의 숙희,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의 연희, <마녀>의 자윤 캐릭터가 그러하다. 이들은 남성을 제치고 우위에 서서 빌런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는 여성도 남성 못지않게 수위 높은 영화에 출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들을 제치고 빌런의 끝판왕으로 불리는 여성 사이코 살인마가 영화에 등장했다. 바로 이충현 감독의 <콜> 영숙이다.
영숙은 주변 사람들을 하나둘씩 살해한 후 짜릿함과 자유를 느끼는데, 살인을 통해 전율을 느끼는 모습은 굉장한 섬뜩함을 안겨다 준다. 새빨간 피가 튀어있는 자신의 얼굴을 아무렇지도 않게 팔로 쓱 닦는 모습은 기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모두를 없애고 우위에 선다.’라는 생각으로 거침없는 행보를 전진해 나가는 그녀의 모습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녀의 얼굴에 자꾸만 새빨간 피가 묻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대결 상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이름은 바로 서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두 여자의 사연을 말해보자면 이러하다. 2000년대 시대에 사는 서연과 90년대 시대에 사는 영숙은 우연히 접한 전화기 하나로 소통을 이어나가며 취미를 공유하곤 했다. 영숙의 새엄마는 영숙을 학대했고, 서연의 아빠는 부재하여 두 인물 모두 가족에 관해 결핍을 가지고 있었다. 영숙은 밖에 나가지도 못한 채 굿을 받아야 했고, 서연은 마음 한편 속에서 아빠의 부재가 엄마 탓이라는 생각에 엄마에 대한 원망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둘은 분노와 갑갑함을 서태지 음악을 들음으로써 분출했는데 이러한 공통점으로 서로에게 더욱 가까이에 다가갈 수 있었다. 같은 성별, 비슷한 나이, 비슷한 취미, 관심사 등 둘은 공통점이 꽤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영숙이 서연에게 흥미로운 제안을 한다. “내가 너희 아빠를 살려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결국, 서연은 영숙의 도움으로 가족들과 다 함께 오순도순 살게 된다. 서연 또한 영숙이 신엄마에게 살해를 당했다는 기사를 보고 영숙에게 이 사실을 미리 전달해 준다. 영숙은 그 소식을 듣고 신엄마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영숙은 살해하면서부터 점점 사이코적인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서연에게 연락이 뜸해지자, 자기보다 행복해 보인다는 이유로 서연의 아빠를 사라지게 만들고, 신엄마를 죽었다는 혐의가 생기자 자신을 의심하는 경찰과 딸기농장 아저씨를 살해해버린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느꼈던 트라우마가 다시금 떠오르게 된 서연은 영숙에게 앙갚음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혹여나 자신의 엄마까지 죽이는 것은 아닐까 노심초사하며 전력을 다해 가족을 지키려고 애쓴다. 반면 영숙은 어떻게든 서연의 가족을 포함해 어린 시절의 서연까지 죽이려 든다. 과거에 친했다면 최소한 감정이라도 남아있어야 사람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을 터인데 영숙에겐 피도 눈물도 없다. 그러니 영숙이 서연의 아빠를 살려 주었던 건 의리가 아니라 실험의 차원에서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영숙과 서연의 ‘FIGHT TIME’이 진행되면서 서사는 타임리프 액션 장르로 펼쳐지는데, 시간을 마구잡이로 바꾸는 모습을 보며 이런 싸움은 처음 본다는 생각에 어떻게 될지 조마조마했다. 길거리에서 두 사람이 소리 지르면서 싸우는 것만으로도 군중이 몰리는데, 시대를 거스르며 큰 싸움을 하게 된다면 그 누가 관심 갖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더군다나 주변 사람들이 빌런에 의해 죽임을 당하니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올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두 사람이 만난 계기이다. 영화의 초반부를 보며 과연 우연이라는 말이 있을까 싶었다. 서연은 집으로 이사를 온 후, 이상한 소리가 나는 벽을 깨부수고, 깨부순 벽 아래에 펼쳐진 지하실로 내려가서 영숙의 일기장과 사진을 접하게 된다. 이는 서연과 영숙이 운명적으로 엮여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 아니었을까. 지하실에서 느껴지는 음산한 분위기와 함께 기묘하게 흐르는 공포스러운 느낌은 영숙과 서연의 관계가 악운으로 이어질 것을 암시하고 있다. 암시는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고 느낌과 감에 따라 그 정확도를 맞출 수 있는데, 서연의 긴장된 표정과 장면에서 느낄 수 있는 어두운 분위기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걸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더군다나 벽을 깨부순다는 것 자체부터 산산조각 날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미래를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신엄마가 영숙을 죽이려 드는 이유도 영숙의 미래를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우연이 아닌 운명, 그리고 인연이 아닌 악연으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콜>은 충분히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게 해준다.
여성 빌런의 폭발적인 대립
영숙과 서연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두 여성은 반항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숙은 신엄마에게 가정폭력을 당해 세상에 대한 적의를 품고 있고, 서연은 아버지가 죽은 원인을 어머니로 규정짓고, 마음 한편에서 어머니를 원망하고 있다. 세상에 대한 반항심이 잘 드러난 서태지 음악을 좋아했던 것도, 시간을 되돌린다는 금기를 어길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내면에 대한 저항 의식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두 인물은 성격, 가치관, 말투는 다르지만, 내면이 비슷한 도플갱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영숙이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에 서연이 영숙에게서 마음이 돌아섰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그전에, 영숙이 서연에게 단호하게 한마디 한 적이 있다.
“너 왜 내 전화 안 받았어?”
이 한마디를 분석하면 열등감이라는 감정이 느껴진다. 앞서, 공통점으로 인해 서로 친해질 수 있었다고 이야기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비슷함은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나와 같은 선상에 있는 위치이기에 공감이 갔지만, 한순간에 나보다 상위에 있어 버리면 그 공감 지대가 바로 사라져버리기에, 연대감이 한순간에 식어버리기 때문이다. 영숙은 서연의 아빠를 살려준 자가 바로 자기 자신인데 자기보다 서연이 행복해 보이는 모습을 보자 질투심에 싫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내면에 있는 저항 의식이 급작스럽게 표출되어 그 모든 분노는 서연에게로 향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서연을 죽일 수는 없으니, 서연과 관계된 주변 인물을 모두 죽임으로써 복수를 하게 된다. 이렇듯 아이러니하지만 비슷함으로 인해 친해졌던 그들은 비슷함으로 인해 원수가 되었다.
‘너는 나보다 잘 살 수 없어.’라는 열등감이 쌓이고 쌓여 그것이 폭발하고, 결국, 두 인물은 노련하게 서로의 목숨까지 노리며 대결을 벌인다. 두 여자가 더욱 폭발적으로 대립하게 된 이유를 한 가지 더 꼽자면 ‘부모’이다. ‘나’라는 존재의 시작은 모두 부모에게서 시작되었는데, 부모의 존재가 사라진다면 ‘나’는 존재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연은 있다가도 사라지는 부모의 존재와 부재를 번갈아 보며 영숙에게 굉장한 분노를 느꼈던 것이다. 영숙은 신엄마를 죽이고도 그간 당했던 고통이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고, 어떻게든 자유를 외치고 싶은 마음이 있기에 그것이 살인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신엄마에게 당했던 고문,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상황을 떠올리며 그녀에 대한 미움을 서연에게 풀어버린 거다. 사람은 모두 대상을 찾아 분노를 풀려는 본능이 내재되어 있으므로.
서로 다른 시대에 사는 도플갱어가 서로의 목숨을 노련하게 노리고 싸운다는 설정은 무섭고도 기이하다. 더불어 대립의 방식은 타임슬립이기에 ‘세상에 이런 싸움도 있나.’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더 큰 폭발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언급했듯, ‘시간을 되돌린다.’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고 바꿔 버린다는 건 그것 자체로 눈에 띌만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두 여자의 싸움은 거침없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더불어 둘만의 싸움이기에 싸움의 에너지는 각각 서로에게로 향하니, 싸움은 이중적으로 대립되어 보이는 것이고, 더욱더 명확한 대결이라고 느껴지는 것이다.
악녀의 힘
흰 원피스, 풀어헤친 머리, 신이 내린듯한 함성, 처음에도 그녀는 반항적인 모양새였지만, 그녀의 광기는 신엄마를 죽이고 난 이후로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 영숙은 신엄마를 죽인 후, 계속해서 살인을 자처하는 데 엄마를 죽인 것을 알아챈 남성들을 한 명씩 잔인하게 토막 내기에 이른다. 그렇게 영화 속 남성들은 부재하고 오영숙이 빌런의 우위에 서게 된다.
<악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의 영화를 돌아봐도 비속어를 쉽게 남용하며, 굉장히 과감하고도 악질의 여성 빌런으로는 <콜>의 영숙이 유일하다. 더불어 자신보다 힘이 센 남자들도 거뜬히 죽일 수 있는 비상한 잔머리를 가졌다는 점에서 오영숙이라는 캐릭터는 돋보인다. 소화기로, 식칼로, 몽둥이로, 일상생활에서 쉽게 활용할 수 있는 도구를 이용하여 살인을 이루었다는 점이 어딘가 소름 끼치고도 기이한데, 그렇기에 영숙은 더욱 두려운 캐릭터로 다가온다. <악녀>는 여주인공이 직접적으로 펼쳐나가 복수를 그리는 서사였다면, <콜>의 오영숙은 일상적인 도구로 살인을 하는 주인공이어서 살해 방식과 살인 이유가 섬뜩하게 다가온다. <콜> 속 오영숙을 떠올릴 때, 세기의 살인마라는 말이 찰떡같을 정도로 입에 달라붙는 이유가 그인 것이다.
현재까지 한국 영화에서 악녀를 그려내는 외관상의 방식은 진한 화장, 총을 든 모습, 남성을 홀리는 팜므파탈 등으로 묘사된다. 더불어 현재까지 한국 스릴러 영화는 남성들이 칼을 들고, 여성들은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그려져 있다. 하지만 <콜>의 영숙은 전혀 진하지도 않은 민낯에, 처키처럼 식칼을 들고 있고, 남성을 적으로 만들어버리는 빌런으로 묘사되어 있다. 악녀의 전형적인 외관상의 모습과 너무나도 다른 모습에 그것부터 눈길을 끈다.
영숙은 남성을 모두 짓밟고 홀로 생존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살해 과정이 보이지 않아도 영숙이 어떤 무시무시한 짓을 저질렀는지 그 장면은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는, 그간 남성들의 서사로만 진행이 되었던 스릴러물의 공식을 깨고 여성도 수위 높은 영화를 이끌어갈 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영숙은 세기의 빌런이라고 불리기에 적합하다.
여성 캐릭터의 성취
<트롤>, <배트맨>, <다크 나이트>에 등장하는 악당, 다크 히어로들은 모두 남성들이 주인공이다. 남성의 신체가 여성보다 튼튼해서, 남성의 성격이 여성보다 세 보여서 등 갖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남성이 여성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인식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콜>은 영숙을 내세우며 이러한 개념을 초토화한다. 그로 인해 한국 여성 배우들도 수위 높은 영화에 출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고, 여성 캐릭터를 등장시킴으로써 새로움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콜>은 여성 빌런을 등장시킴으로써 영화 속에 등장하는 괴물, 사이코패스는 남성들의 역할이라는 편견을 서서히 깨부수고 있다. 그 점에서 이충현 감독의 시도는 찬사를 보낼만하고, 오영숙을 연기한 전종서 또한 백상예술대상에서 최우수연기상을 받은 만큼 박수를 보낼만하다. 이미지는 여리여리해보이지만 모두를 압도한다는 것이 반전으로 다가올 뿐만 아니라, 죽을 것 같아도 죽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초인같이 느껴져 <콜>을 압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듯 <콜>은 오영숙이라는 사이코패스를 선보임으로써 ‘세상에 이런 빌런도 있구나.’라는 새로움을 불어넣어 주며 눈길을 끌었다. 여성도 수위 높은 스릴러물에 출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큰 성취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앞으로도 여성 캐릭터의 성취가 하나씩 쌓여 여성 액션 영화가 한국에도 많이 탄생한다면, 한국 영화산업의 입지도 넓혀질 뿐만 아니라 남성과 여성에 대한 인식 또한 바뀌지 않을까.
서스펜스를 조성하는 장치
두 여성의 폭발적인 대립이 주 포인트였다면 과연 서브 포인트는 무엇일까. 서브 포인트에는 서스펜스를 조성하는 장치,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소 등을 꼽을 수 있다. 영숙이 소화기, 식칼, 몽둥이, 즉 일상적인 소재로 사람을 살해하는 것처럼, 싸움의 발단 또한 일상적인 소재, 즉 전화기로 이루어진다. 더불어 서연이 영숙을 교묘히 이용해 영숙이 시간을 바꾸게 하는 것은 일기장이다. 이렇듯 일상적인 매개체로 인해 우리는 더욱더 공포감을 느낀다. 비현실적인 서사, 비현실적인 캐릭터, 비현실적인 상황이지만 영화 속에서 사건을 발생시키는 매개체만큼은 일상적이다. 싸움의 매개체, 시간을 바꾸게 하는 소재 모두 일상적이기에 우리는 더욱 섬뜩함을 느끼게 된다.
오로지 영숙만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는 설정도 그렇다. 영숙이 과거에 와있으니, 키는 영숙이 잡을 수 있고 서연은 당하는 입장이 된다. 그렇기에 서연의 관점에서 영화를 바라보면 영화는 큰 공포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가만히 있다가도 있던 부모가 사라지고, 다시 등장하는 것이 반복되니까 혼란이 오는 것이고 분열이 오는 것이다.
물론, 영숙의 캐릭터가 광기 어린 캐릭터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누군가의 바람대로 삶이 흘러간다면 그것은 정말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의 동의 없이 무언가가 바뀌고, 무언가가 얻어지는 현상들 자체가 실제로 일어난다면 정말 무섭지 않을까. 그렇기에 오직 둘 중 한 사람만이 시간을 바꿀 수 있다는 설정은 이따금 서늘하다. 더불어 서연은 뉴스 기사와 일기장을 보고 영숙의 운명을 바꾸려고 하는데, 영숙이 어떻게 하냐에 따라 자신의 목숨이 달린 것이기에,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기다려야 하는 것도 굉장한 서스펜스로 다가온다. 그렇기에 전화벨이 울리는 순간 서연도 관객들도 긴장을 하게 된다.
반전에 반전이 거듭된다는 점도 섬뜩함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이다. 영숙이 위기에 처할 것 같다가고 계속 살아나는 것, 서연의 말대로 될 것만 같다가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것, 이러한 미니멀한 반전들이 쌓이고 쌓여 공포의 지대를 이루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 죽을 줄만 알았던 영숙이 눈을 크게 뜨고 카메라를 쳐다보는 것 또한 그렇다. 결국, 서연은 영숙이 굿을 당했던 자리에 그대로 착석해 비명을 지르게 되지만, 누가 우위에 서게 될지 절대 모르는, 그니까 누가 승자가 될지 절대 모르는 서사는 숨통을 점점 조여 오기에 충분하다.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상징적인 요소
영숙은 식칼, 소화기로 사람들을 죽인다. 식칼에는 새빨간 피가 묻어있고 새빨간 소화기는 치명적인 원형 가루를 내뿜고 있다. 서연은 빨갛게 불에 그을린 화상 흉터가 있고, 서연의 아버지는 화재로 인해 목숨을 거두었다. 이렇듯 영화에서는 빨간색의 이미지와 색깔이 많이 등장한다. 빨간색은 보통 공포와 저주의 상징으로 사용이 되어서 강렬함과 섬뜩함을 느끼게 해준다.
영숙의 얼굴에 묻힌 피처럼 빨간색은 기이한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고, 자주 등장하는 빨간 색깔의 이미지로 인해 파국이 연상되기도 한다. 인간의 심장은 빨간색이기에 빨간색은 그만큼 목숨, 생명의 상징으로도 직결되기에, 영화 안에서의 빨간색 이미지는 목숨과도 연관된 일로 치부되어 강렬하고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를테면, ‘피 튀기는 싸움’, ‘시뻘겋게 물든 관계’가 <콜>을 설명하기에 적합한 것 같다.
안정감의 상징이었지만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는 공포감을 안겨주게 된 이미지가 있다. 바로 집이라는 공간이다. 사람은 원래의 상태와 다르게 느껴지면 불안도가 더 심해진다고 한다. 영숙과 서연의 둘만의 교류가 둘 간의 대립으로 번짐에 따라 집은 이제는 안락한 공간이 아닌 위험한 공간이 되었다. 공간의 의미가 변화한 것 자체도 두렵지만, 이제는 내 집, 내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 낯섦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사람은 어느 경계선 사이에 있을 때, 그니까 이쪽도 저쪽도 아닌 것 같은 사이에 껴있을 때 가장 큰 두려움과 고통을 느낀다고 한다. 떨어져 있는 것 같으면서도 집에 함께 있을 때, 즉, 사실은 있지만, 진실은 없는 상태, 그 상태가 굉장히 무섭다는 것이다. 서로의 존재가 보이지 않으니 마치 귀신과 싸우는 것 같은 느낌이 들뿐더러, 내가 지금 살아있는 것이 맞는지 실존의 여부도 따지게 되지 않을까. 그렇기에 집은 굉장히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상기시켜진다. 집은 영숙이 신엄마에게 고문을 당한 장소, 처음으로 살해를 하게 된 장소로 여겨지기에, 엄청난 비밀이 숨겨진 듯 미스터리해 보이기도 한다. 집은 모두 다 각기 다른 방이 있어도 엄밀히 말하면 한 공간이므로, 이러한 폐쇄성은 지극한 공포감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표본을 비틀고, 새로움으로 승부하다
전형적인 스릴러물 영화의 주인공은 남성들로, 서사 또한 남성들 간의 대립으로 그려진다. 더불어 여성은 보호받아야 할 위치에 있거나 대상화되어 그려진다. 하지만 <콜>은 남녀의 우위가 바뀌어있다. 모든 남성은 부재하고 영숙만이 우위에 있다. 이렇듯 스릴러의 전형성을 반대로 비튼 것은 신선하고도 새로움을 안겨준다. 여성 빌런을 내세워 여성도 수위 높은 스릴러물에 출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도 인상 깊었다.
타 공포 영화 속에서는 귀신을 출연시킨다든지, 물건이 날아다닌다든지 등 판타지적으로 공포를 보여주지만, <콜>에서는 전화기, 일기장 등의 일상적인 소재로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더불어 <콜>에서는 두 사람의 상하관계가 과거와 현재의 시간차로 인해 확립될 수밖에 없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렇기에 서로 협력을 하는 타임리프물과 달리 서로 대립을 하는 타임리프물로 표현해 내어 새로움을 느끼게 하고 있다. 이렇듯 <콜>은 타 공포, 판타지 영화와 다른 특징을 보이기에 그 점에서 차별화를 보이고 있다.
기존의 영화는 편집의 맥락과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데, <콜>은 계속해서 교차편집으로 이루어지기에 편집적 기술 또한 특이하다고 할 수 있겠다. 마치 모노드라마같이 보일 수 있겠지만, 이들의 감정선이 숏과 숏을 이어주고 있어서 절대 튀어 보이는 법이 없다. 동시에 분절된 화면은 영숙과 서연과의 적대감을 가중시키고, 가까이 있는 듯하면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아이러니로 인해 우리의 시선을 화면에 집중시킨다.
화면의 색감 또한 기존의 상업 영화보다 어두운 톤으로 다운되어있는데, 그만큼 억눌린 분노의 감정, 음산한 느낌 등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영화가 자기만의 색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새로움이 아닐까. 기존의 타임리프물은 주인공들이 협동해서 시간을 돌리는 서사가 많은데, <콜>은 반대로 시간을 바꾸면서 두 인물이 싸우는 서사이다. 이렇듯 반대 성향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새로움을 느끼게 한다.
이처럼 <콜>은 표본을 비틀고 새로움으로 승부하고 있다. 감독의 차기작은 미스터리가 가미된 스릴러물로, <콜>에서는 두 여성 빌런의 대립이 부각되었다면, 차기작은 어떠한 인물이 등장하여 어떻게 대립을 이룰지 궁금해진다. <콜>에서의 공포감, 미스터리의 장치들과는 어떻게 다르게 표현되는지 그 점이 기대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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