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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파 걸작전 - 야수는 어디에 | ARTLECTURE

야수파 걸작전 - 야수는 어디에

/Insight/
by 박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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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파 걸작전 - 야수는 어디에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를 관통하는 미술사조들의 명명은 거의 언제나 비난과 조롱, 경멸의 연속이었다. 그 시작은 인상주의에서부터다. 19세기 프랑스 아카데미즘의 흐름에 부합하지 않았던 당대의 진취적인 기수들은, 살롱전과 아카데미즘, 편파적인 엘리트주의에 반기를 표하고 낙선전을 개최하였다. 마네,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등이 모여든 본 전시는 이후 앙데팡당전으로 발전되었는데, 이러한 전시에 대한 당대의 보수적인 시선은 대단히 냉담했다. 이러한 그들의 미술을 두고 기자 르로이는 모네의 <인생, 해돋이>를 인용하여, 그들을 인상밖에 포착하지 못하는 의미에서 인상주의자라고 비난하였고, 19세기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조의 이름은 그렇게 규정되었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조라 해도 과언이 아닌 큐비즘 또한 조롱에서 시작되었다. 20세기의 대표적인 거장 중 하나인 마티스가 피카소의 작품을 보고 "입방체를 모아놓은 것 같다."며 평을 했으나, 이를 평론가 복셀르가 조롱하기 위해서 인용하고 큐비즘이란 이름이 탄생되었다. 그리고 우스운 것은 피카소의 작품을 두고 '입방체'라는 가장 중요한 단어를 입에 올린 마티스가 속한 사조 또한 조롱과 모멸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어떤 예술을 향해 야수적이라 평한다면 그리 모멸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허나 여전히 정신성이 강조되던 1900년대에는 분명한 모멸이었다. 마찬가지로 평론가 복셀이 “야수적이다”라고 말한 데서 명명된, 표현주의를 직접적으로 열어젖혔고, 추상주의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던 야수파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20세기 미술사조들의 반항정신은 아카데미즘으로 대변되는 신고전주의에 기반 하였다. 아카데미즘에 기반한 회화는 여전히 3차원의 현실을 모방하고자 하였다. 허나 우리는 19세기에 이르러 사진이 보다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였다는 당대의 현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3차원의 현실을 냉엄하게 재현하는 역할에서 더 이상 회화는 사진의 효율성과 정확성을 따라잡지 못했다. 사진은 색채만이 부재했을 뿐, 객관적인 현실을 드러내는 역할은 회화보다 더욱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20세기의 주요한 회화 사조들에게서 포착되는 경향은 사진이 3차원의 현실을 오롯이 재현한다면, 회화는 2차원의 화폭 속에서 자율성과 독립성을 찾고자 하는 시도로 나아갔다는 점이다. 또한 작품에 구현되는 일련의 정신성에 있어서도 현실을 냉엄하게 포착하는 카메라의 시선이 대단히 차갑고 기계적이며 객관적이라면, 회화는 카메라가 수행하지 못하는 주관적인 표현을 적극적으로 수행해나가고자 하였다. 그래서 모더니즘의 시작인 인상주의가 화가의 주관적인 시각은 강조한 반면, 카메라의 태도를 답습하여 작품 자체는 대단히 건조한 객관성을 보이는 것과 달리, 그 이후에 인상주의의 한계조차 극복하고자 하는 사조들은 자신의 감정을 결코 은닉하지 않았다. 이에 표현주의가 2차원과 감정의 표현을 행한다는 측면에서 카메라와 사진의 등장 이후 회화가 모색한 방향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이러한 표현주의는 후기인상주의의 영향을 거쳐 야수파에서 직접적으로 맹아를 틔우고 만개하게 된다. 



야수파의 주요한 기수들은 마티스, 블라맹크, 알베르 마르케, 조르주 루오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상징주의의 대가인 귀스타브 모로의 작업실에서 일한 경력이 있다. 오딜롱 르동과 달리 모로의 화풍 자체는 아카데미즘에 기반을 하고 있다. 그에게서는 정교한 재현이 포착된다. 허나 차갑고 객관적인 세계를 옮겨 담는 것이 아닌, 신비와 영적인 세계, 감각 등에 몰두했던 상징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기수였기에, 고전적인 화풍임에도 빛과 색채에 주목한 흔적이 역력하며, 아카데미즘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다. 그리고 야수파의 일부 화가들은 모로에게서 이 같은 감각성의 추구와 빛과 색의 활용에 대해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한다. 또한 후기 인상주의가 열어젖힌 주관적이고 비자연적인 색채의 사용 및 자유분방한 형태의 표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다만 이들 또한 그들의 작품이 '야수적이다.'라는 수식 하나로 묶인 즉흥적이고 느슨한 사조였고, 공통적으로는 이 같은 모로 및 후기 인상주의자들의 영향 하에 있었지만 그들 각각은 추구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히 달랐다. 그래서 1905년 살롱 전에 출품한 일련의 ‘야수적인’ 화가들을 묶어서 야수파가 명명되고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지만, 2년이 지난 1907년에 와해되고 만다. 그리고 1907년 이후에 야수파의 멤버들은 블라맹크처럼 치열하게 표현주의적인 정신을 고집한 이도 분명 있었으나, 마티스처럼 20~30년대에는 다른 사조들과의 적극적인 협업을 통해서 야수파의 색채하곤 전혀 다른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이들도 존재하였다. 



우리는 본 전시에서 야수파의 주요한 화가로서 마티스, 블라맹크, 드랭을 만나볼 수 있고, 야수파 및 표현주의 이후에 태동하는 큐비즘의 화가들이 이를 어떻게 마주하고 해석하였는지를 피카소, 브라크, 후앙 그리를 통해서 느껴볼 수 있다. 가장 먼저 야수파의 얼굴에 다름 아닌 앙리 마티스다. 20세기에 미술계는 자신들의 제도에 몸담지 않았던, 이전 같았으면 하잘 것 없고 수준 낮다고 비난했을 화가들의 작가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야수파 내부에서는 블래맹크가 이러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허나 마티스의 작품세계는 철저하게 20세기까지 쌓아올려진 미술사의 역사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는 서구의 다양한 고전들을 깊이 연구하였고, 이 같은 작품들에서 길어 올린 것은 색과 빛의 사용이라 할 수 있다. 허나 그는 고전들의 빛과 색채의 사용을 결코 수동적으로 답습하지 않는다. 바로크의 조명은 분명 르네상스의 것보다 감각적이고 빛나지만, 이 같은 빛과 색채는 결코 독립적인 것이 아니었다. 선으로 이뤄진 형태의 시종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고전에서 길어 올린 빛과 색은 그가 이룩하고자 하는 자율성의 혁명으로, 일련의 해방을 위해 길어 올린 것이다. 마티스는 세잔의 영향을 깊이 받아 단순화된 조형으로 환원된 대상의 형태와, 또한 이전까지 이뤄지던 선과 색의 역할을 전복시키는데 관심을 보였다. 무엇보다 색과 빛, 조형의 해방은 곧 현실에서 벗어날 때 이뤄진다. 회화가 태양의 노란색, 하늘의 파란색, 나뭇잎의 초록색을 모방하지 않을 때 비로소 회화는 독립성을 지닌다. 



앙리 마티스, <코르시카 풍경>, 1898


형태도 마찬가지다. 이 같은 형태의 해방을 이뤄내기 위해서 세잔이 기본적인 조형으로 환원시킨 실험에 집중함과 더불어, 아프리카 및 근동 미술의 추상화된 형태에 주목한다. 서구의 시선만이 온전한 재현을 강요했고, 비서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유분방한 미술의 경향에 깊이 매료되어, 그의 형태는 서서히 현실과 유리되기 시작한다. 이 같이 형태가 현실에서 유리되었을 때, 색채도 비로소 현실에서 멀어지고 독자적인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다. 이 같은 영향 하에서 마티스는 현실에 종속되어있었던 형태와 색채의 해방을 선언하고, 독자적인 회화의 가능성을 증명한다. 자유로이 표현될 수 있는 것, 강렬한 색채들 그 자체에의 주목, 충실하게 쌓아 올려진 고전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행하는 일련의 전복과 실험은 그의 생에 전반에 걸쳐서 수행된다. 다만 이 같은 야수파의 얼굴, 대표자로서 마티스의 작품이 거의 소개되지 않기에, 특히 야수파 시기의 마티스의 작품이 소개되지 않기에 그의 특징은 다른 기수들에게서 간접적으로 엿보아야만 한다. 다만 야수파에 몸담기 이전 마티스가 1898년 그렸던 <코르시카 풍경>에서는 그가 어떤 영향관계에 놓였음이 드러난다. 인상주의풍으로 그려진 본 작품은 모로에게서 영향받은 빛에 대한 관심을 당대의 혁신적인 화풍으로 구현했음이 드러난다. 인상주의와의 영향관계와 함께 일반적인 인상주의 작품들보다는 보다 빠르고 거친 필치를 보여주기에, 붓질에 있어선 야수파를 예고하고 있다.


모리스 드 블라맹크, <샤투의 밤나무 숲>, 1905


다음으로 모리스 블라맹크다. 앞서 말했듯 마티스의 작업은 즉흥적이지 않았다. 그의 작업은 정교한 구상과 계획에서, 또한 고전들에 대한 탄탄한 지식을 기반으로 수행되었다. 하지만 블라맹크의 '야수성'은 그간의 아카데미즘의 영향에서 온전히 벗어난 실로 야성적인 것이었으며, 또한 마티스와 달리 대단히 즉흥적인 작업방식을 추구하였다. 블라맹크는 아카데미즘에 깊은 불신을 품고 독학을 행하였으며, 그 독학 과정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던 것은 고흐와 세잔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세잔의 형태감과 고흐의 강렬한 색채, 그리고 필치에 깊이 매료되었고, 이 같은 독학 속에서 자유분방하게 영향을 받으며 그는 자신이 좋아한 풍광들과 감정들을 화폭 속에 옮겨 담았다. 마티스의 색채가 현실에서 멀어지려 했던 것이라면, 블라맹크의 색채는 자신의 감정을 투영한 색채였다. 마티스의 작품세계는 회화 고유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시도라면, 블라맹크의 작품세계는 자신이 바라보고 해석한 형태, 그리고 자신의 내면과 주관성을 드러내는 색채로 양자의 차이를 구획 지을 수 있다. 그래서 마티스가 현실에서 멀어져 회화의 독자성을 추구하기 위해서 과거와 현재의 미술운동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이에 몸담았던 것과는 달리, 야수로서 블라맹크의 경향은 그의 전 생애를 관통한다. 즉 마티스의 여정이 회화의 독자성을 탐구하는 것이라면, 블라맹크는 주관적인 회화, 그리고 감정을 드러내는 예술이라는 자신의 예술관을 증명하기 위한 여정으로서 그의 우직함 또한 치열하게 자신의 예술관을 증명하기 위한 여정으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빠른 필치와 즉흥성, 그리고 화폭 속에서 느껴지는 화가의 성급한 성미는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살펴볼 수 있다. 모리스 블라맹크의 작품도 본 전시에서 단 한 작품만이 원본으로 소개된다. 그래서 야수파 전시라는 본 전시의 정체성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으리라. 다행히도 야수파 이전의 작품이 소개된 마티스와는 달리 블라맹크는 야수파 시기의 작품이 소개된다. 비록 색채는 보편적인 야수파에게 기대할 수 있는 비자연적이거나 자유롭거나 다채로운 색채와는 거리가 있지만, 오히려 이 같은 현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색채가 블라맹크의 전 생애에 거쳐 드러나는 화풍이기에 블라맹크의 특징이 여실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두텁고 빠르며 거친 마티에르에선 우리가 야수파에 기대하는 특징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앙드레 드랭, <빅 벤>, 1906



다음으로 앙드레 드랭이다. 마티스의 표현이 비서구의 영향과 비자연적인 자유분방한 색채화 형태, 이를 통해 구현되는 관능성이 도드라지고, 블라맹크에게서는 빠르고 거친 필치와 정규적인 미술교육을 수학하지 않은 투박함과 세잔의 영향력이 도드라진다면, 드랭에게서 가장 두드러지는 바는 인상주의 및 신인상주의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드랭 또한 표현주의 및 야수파의 거칠고 때로는 미니멀하며, 구불구불하고 비자연적이어서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표현에 몰두하기도 하였다. 허나 그를 다른 야수들과 구획시켜주는 것은 바로 점과 빛이다. 우리는 드랭이 1905년 마티스와 함께 교류 및 여행하다 남프랑스의 작열하는 햇볕을 옮겨 담고자 하는 열망에 차올랐다는 것을, 이에 의하여 드랭의 작품에서는 이 같은 빛을 포착하려는 시도가 두드러진다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의 풍경화의 정신은 시간과 태양에 따라 변화하는 시각, 이에 의해 자신에게 수용되는 주관적인 세계를 포착하려 몰두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의 정신은 모네와 맞닿아있다. 또한 그 빛을 구현함에 있어 가장 주요한 표현이 점묘법이다. 우리는 신인상주의자들이 인상주의의 한계에 다름 아닌 형태의 견고함을 다시금 회복시키기 위해, 그간 대상의 형태를 표현하던 선을 점으로 환원시켰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신인상주의자들의 점은 대단히 객관적이다. 그들의 작품은 견고하고 탄탄하다는 느낌을 주지만, 감정적으로는 고루하고 차갑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드랭의 점은 대상을 재현하기 위한 점이 아니라, 태양과 달이 뿜어내는 세계의 다채로운 빛을 표현하고, 이를 자신이 어떻게 수용했는지를 드러내는 감정적인 점이다. 즉 드랭의 점묘법은 신인상주의자들이 대상의 재현을 위해 역할을 국한시켰던 점을 감정적인 영역으로 해방한다고 볼 수 있다. 야수파 전시로서 본 전시의 아이덴디티를 살려주는 것은 오직 드랭 덕분이리라. 그의 <빅 벤>이 소개되었고, 또한 그의 전 생애에 걸친 작품들이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좌) 앙드레 드랭, <검은 바탕의 과일, 테이블이 있는 정물>, 1948~50 / (우) <아미앵>, 1947


<빅 벤>은 단순히 형태, 공간, 색채를 비자연적으로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시간까지도 모호하게 만드는 화가의 개성 있는 주관성을 보여준다. 처음 보면 본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밤인 것만 같다. 어두운 밤에 둔탁하게 칠흑이 내려앉은 건물들이 청색으로 전환된 것만 같고, 황혼은 기묘한 초록색과 청색으로 찬란히 변모시킨 것만 같다. 하지만 작품의 왼편에는 달이라기보다는 태양으로 보이는 대상이 떠있어 오후라는 것을 시사한다. 즉 야수파는 밤과 낮이라는 시간도 그들의 해석과 주관에 따라서 자유분방하게 재해석해낸 것이다. <빅 벤>에서의 점들은 드랭의 전형성을 보여주는데, 영국의 풍광을 견고히 묘사하기 위함이 아닌, 풍광을 자율적으로 해석하기 위한 색점 들일뿐이다. 그래서 점이라는 측면은 신인상주의와 같지만, 전혀 다른 감흥을 낳는 드랭의 점을 오롯이 느껴볼 수 있다. 마티스와 블라맹크가 기껏 한두 작품으로 특정 시기만이 포착되는 것과는 달리, 본 전시는 드랭의 후기 시기까지 폭넓게 조망한다. 차라리 드랭 독립전으로 전향하여 더욱 그에 대한 조망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 나았으리라. 드랭은 후기에 고전주의로 전향한다. 나치의 강압에 의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지만, 나치가 그에게 고전주의를 강요한 이유는 야수파 기수들 중에서, 그리고 당대의 모더니스트 중에서 테크닉을 가장 높게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개되는 후기의 작품으로서 <검은 바탕의 과일, 테이블이 있는 정물>은 바로크 및 로코코 시대의 정물화를 연상케 한다. 잘린 과일들은 불완전성을 드러내어 바니타스적인 해석을 낳게도 만들지만, 한편 회화의 형식에 있어 자율성을 추구하던 모더니스트가 과연 내용에 의도를 띠었을지는 의문을 표한다. 그리고 풍경화로서 <아미앵>은 노브러쉬 스트로크까지는 선회하지 않지만, 회복된 원근감과 깊이를 보여주며 그가 아카데미즘에 입각한 화풍이 불가능한 게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좌) 키스 반 동겐, <파티 참석자들>, 1903 / (우) <클로딘 보와롤 부인의 초상>, 1911


야수파의 가장 주요한 대가들로서 소개되는 그들의 작품은 사실상 이것이 끝이다. 드랭의 <하이드 파크>라는 작품 등이 더 소개되긴 하지만, 나머지는 죄다 성의 없이 인쇄한 레플리카에 불과한다. 우리는 야수파에 함께 몸담았던 다른 기수들의 작품들을 통해 야수파의 영향관계와 주요한 특징들을 포착해야 하리라. 영향관계에서 우리는 인상주의를 포착했지만, 야수파의 주관성은 후기 인상주의의 영향과도 밀접하다. 우리는 키스 반 동겐의 작품에서 인상주의자지만 후기 인상주의의 색채에 더 가까운 로트렉의 영향을 느껴볼 수 있다. 도회적인 그의 작품은 전원에 집중하던 다른 야수파들의 관심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하지만 야수파는 공통된 사명을 공유한 집단이 아닌, 1905년 살롱 도톤느전에 의해서 임의로 결합되어 버린 그룹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키스 반 동겐의 작품은 도회적이며, 또한 인물의 얼굴의 색채가 비자연적으로 야수파의 특징을 보여준다. 이 같은 특징은 물랑 루즈를 주로 배경 삼아 그렸던 로트렉이나, 인물들의 색채를 과장하던 고갱의 색채를 느끼게끔 하는데, <파티 참석자들>에서 남자들의 얼굴은 갈색이나 초록색으로 대단히 음산하고 퇴폐적으로 뒤바뀌어 있다. 우린 이 같은 음산한 작품들을 통해서 쾌락과 향락의 민낯을 마주하기도 하지만, 한편 이 같은 비자연적인 색채는 그저 다른 야수파 기수들의 작품들처럼 별 의도 없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클로딘 보와를 부인의 초상> 같은 경우 1911년 야수파가 해체한 이후에 그려진 작품이지만, 초록색으로 뒤바뀐 피부색은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 같은 유형처럼 화가의 자유분방한 표현을 보여준다. 

(좌) 모리스 마리노, <집안>, 1906  / (우) 조르주 브라크, <에스타크 풍경>, 1907


또한 구도에 있어서도 야수파 기수들 각각이 대단히 다채로운 경향을 보여줬지만, 당대에 태동한 사진을 통해서 바라보는 즉흥적이고 불완전하며 기계적인 구도가 야수파에서도 느껴진다. 모리스 마리노의 <5층에서 바라본 파리 전경>을 살펴보자. 인물들은 캔버스 바깥으로 불완전하게 잘려나가고, 난간에 의하여 시야가 방해받아 풍경 또한 파편적이다. 이 같은 즉흥적이고 찰나적인 구도는 드가가 즐겨 사용한 것인데, 이 같은 야수파 멤버들의 구도를 통해서 드가가 열어젖힌 자유분방한 구도 또한 야수파 기수들에게 깊은 영감이 되었음이 드러난다. 모리스 마리노의 작품들은 본 전시에서 꽤나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소개되는데, 그에게서 야수파의 많은 특징들을 엿볼 수 있다. 야수파의 자율성으로서 그림 속 그림의 역할을 마리노의 <집안>을 통해 마주할 수 있다. 마티스의 <붉은색의 조화>에서 창문은 어떠한 의도나 상징을 지니지 않고, 그저 장식용 그림처럼 아름다운 형식을 위해 사용된 것 확인할 수 있었다. 마리노의 <집안>에서도 그렇다. 왼편에는 여인의 초상이, 오른편에는 바다 풍경이 그려진 회화가 함께 그려진다. 허나 푸른 바다는 단지 붉은색을 필두로 한 그림의 내부에서 색채의 조화를 이루고, 작품의 중앙에 그려진 인물도 여인이기에 왼편의 여인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즉 모더니즘 운동에서 회화는 내용, 서사성을 강조하지 않고, 형식, 아름다움, 미술의 고유성만을 탐구하기 시작했는데, 그림 속의 그림들이 그저 아름다움을 위해서 사용된 것을 통해서 우리는 그 경향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조르주 브라크의 <에스타크 풍경>을 살펴보겠다. 그가 큐비즘 이전에 야수파에 몸담았음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이 시기에는 큐비즘의 경향은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브라크가 색채를 찬란히 꽃 피울 수 있었다는 새로움이 강조된다. 그도 초록색이나 황토색, 회색이어야 할 산의 색채를 보라색으로 뒤바꾸며, 붉은 색채를 전면에 배치하여 야수파의 전형을 보여준다. 형태가 단순화되곤 있지만 큐비즘의 급진적인 해체까지는 엿보이지 않는다. 아직까진 다만 세잔의 영향 하에 놓여있는 상황이다.


(좌) 오통 프리에스, <라 시오타의 풍경>, 1907 / (우) 알베르 마르케, <그랑 오귀스트 부두에서 바라본 센 강>, 1906



즉 야수파의 전형성은 색채와 형태를 비자연적으로 뒤바꿈에 있다. 이러한 주관적인 색채에는 화가의 감정이 자연스레 녹아들 수밖에 없으리라. 이런 점에서 감정을 거의 소거하다시피 한 금욕적인 큐비스트 브라크의 색채는 놀라울 따름이다. 이제 다른 야수파 화가들의 작품들을 마주하며 야수파의 운동을 정리하고자 한다. 야수파의 특징은 도회적인 풍광보다도 전원에서 더욱 무르익는다. 직선적이고 획일적인 색채를 필두로 계획된 도시보다는 곡선으로 이루어지고 색채도 다채로운 자연에서 변형과 변주가 더욱 활달할 수밖에 없고, 그들에게 영감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통 프리에스의 <라 시오타의 풍경>은 자연을 변주하는 야수파의 특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마도 세잔의 산 풍경화처럼 녹색과 황갈색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을 원래의 색채는 분홍색이 전면에 내세워져, 심지어는 초현실주의적으로 느껴진다. 색채뿐만 아니라 형태 또한 구불거리고 원래의 대상을 알아보기 힘든 상태로 뒤바뀌어져 있다. 야수파의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형태에 속하는 이 작품은 향후 추상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야수파의 의의를 보여준다. 한편 야수파는 1905년 살롱 도톤느에 함께 참여한 작가들이 뭉뚱그려진 작명이자 그룹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알베르 마르케의 <그랑 오귀스탱 부두에서 바라본 센 강> 같은 작품들을 살펴보면, 프랑스에서 전개된 야수파라기보단 북유럽에서 전개된 표현주의를 연상케 한다. 즉 우리가 야수파에게 기대하는 비자연적인 색채는 그들이 띤 보편적인 공통점을 관통한 것일 뿐, 1905년부터 해체되기 이전인 1907년까지도 야수파로 묶인 기수들은 결코 공통된 정신을 공유하지 않았다. 다만 마르케는 실제보다 더욱 둔탁한 색채로 자신이 바라본 세계에 대한 음울함을 강조하고, 또한 소용돌이치는 듯한 구불거리는 화풍을 통해서 가을 및 겨울에 가까운 차가운 세계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인 정감을 결코 숨기지 않았다. 


(좌) 귀스타브 쿠르베, <노루가 있는 쥐라의 눈 내린 풍경>, 1866 / (우) 조르주 쇠라, <교외>, 1882


본 전시는 1905년부터 1907년까지의 야수들만 포착하지 않는다. 야수 이전인 19세기 후반과 야수파  이후인 20세기 초반을 포착하며 드넓게 모더니즘을 다뤄낸다. 야수들을 태동하게 만든 이전을 살펴보면, 사실주의 화파들의 작품들이 포착된다. 야수파의 기수들이 주관적인 표현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정신은 천재로서 예술가가 확립되어 독립성의 맹아를 틔운 낭만주의에서부터, 이상화를 거부할 수 있게 된 사실주의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당대를 적나라하게 포착했던 사실주의의 대표작으로서 도미에의 <물가에서>와 쿠르베의 <노루가 있는 쥐라의 눈 내린 풍경>이 전시된다. 전자의 경우 이상화된 노동이 아닌 실제의 아낙네들이 빨래하는 현실적인 노동의 풍광을, 후자의 경우에는 더 이상 인류의 이상, 문명의 상징을 띠지 않는 독립적인 풍광이 도드라지며 또한 형태는 거의 무뎌져 거친 마티에르만이 남아있다. 그리고 화가의 주관적인 시각이 강조되었던 인상주의 및 신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이 소개되며, 객관적인 시각이 아닌 주관적인 시각을 강조할 수 있었던 영향관계를 비춰낸다. 드가의 <서 있는 두 남자>는 오른편의 남자가 든 모자가 잘려나갔다는 즉흥적인 구도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또한 찰나적이고 즉흥적인 포즈를 포착하며 더 이상 완전함에 집착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쇠라의 <교외>의 경우 점묘법이 비교적 느슨하며 강박증적인 세밀함을 보이진 않지만, 비교적 촘촘하며 인상주의자들이 무너뜨린 형태를 복권시키려는 시도가 예고된다. 그리고 고갱의 <젊은 타히티인>의 경우 그의 화풍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표적인 작품이라곤 할 수 없지만, 소재에 있어서 야수파의 화가들도 정신을 공유했던 이국의 미술이 가진 가능성에 대한 관심, 인류의 원류에 대한 관심이 드러나곤 한다. 야수파 해체 이후이지만 여전히 야수파의 색채가 남아있던 시기의 마티스가 <춤>이나 <음악>을 그려낸 것을 생각해보라. 그리고 야수파와 동시적이면서 이후로서 큐비즘의 실험이 도드라지는데, 1910년 초기에 일어났던 색채를 배제하고 형태의 조형으로의 환원, 해체에 집중하였던 시기가 아닌, 색채가 회복되던 10년대 후반에서 20, 30년대의 작품들, 더불어 오르피즘에 집중하면서 야수파와의 일련의 유기성을 보이고 있다.



라울 뒤피, <여성의 누드>, 1930


무엇보다 야수파의 적자라 할 수 있는 라울 뒤피의 작품을 통해서 향후 프랑스의 표현주의가 어떠한 방향으로 전개되는지를 직접적으로 포착한다. 뒤피의 <여성의 누드>는 야수파 시기에 그려진 <푸른 누드>의 울퉁불퉁한 형태와 고전적인 미 이상에 맞지 않는 투박한 육체가 강조되며, 야수파가 혁명을 이룬 미 관념의 다양화를 드러낸다. 그리고 <애스컷의 경마장>의 경우 찬란한 원색, 특히 녹색을 전면에 거쳐 야수파의 비자연적인 색채의 사용이 도드라지고, 또한 형태도 간략화되어 경쾌함이 도드라진다. 또한 색채를 짙게 칠하지 않고 옅게 칠하여 뒤피가 야수파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더욱 경쾌한 방향으로 변주를 행하려는 시도가 도드라진다. 이렇게 야수파 이전, 야수파, 그리고 야수파 이후의 모더니즘 운동을 포착하며 전시는 마무리된다. 하지만 본 전시에 대한 필자의 인상은 기만에 가까웠다. 마티스, 블라맹크, 드랭을 필두로 홍보를 한 것과는 상반되게, 이들이 야수파 시기에 보인 작품들은 거의 전무하다. 또한 미술관의 협의를 받아 레플리카를 가져왔다고 하지만, 야수파 특유의 거친 마티에르가 여실히 느껴지는 레플리카가 아닌, 그저 작품을 인쇄해놓은 레플리카는 조야하고 성의 없다. 약 2년 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르누아르의 마티에르를 촉각적으로 느껴볼 수 있는 수준 높은 레플리카를 가져온 것과 참으로 비교된다. 또한 야수파를 전면에 내세웠음에도 야수파 및 표현주의 경향의 작품보다, 큐비즘의 비중이 많은 것은 모순이다. 표현주의와 양대산맥으로 20세기 모더니즘을 상징하는 혁명이긴 하지만, 오히려 야수파 이후의 사조를 다루고 싶었다면 타국에서 발생한 표현주의로서 북유럽, 다리파, 청기사파가 소개되거나, 추상의 경향을 전시했어야 할 것이다. 야수파와 큐비즘의 흐름을 유기적으로 전시 및 설명한 것은 결코 성공적이라 보기 어려우며 뜬금없게만 느껴졌다. 전시의 이름이 '야수파와 큐비즘'이라면 이해가 갔을지도 모른다. 또한 큐비스트라 소개된 조르주 카스의 작품들은 큐비즘이라 보기에는 어려웠으며, 또한 13일 전시 개관 이후인 14일까지 전시의 세부를 마무리하는 운영은 실망으로 가득했다. 작년에 어처구니없는 행정으로 드가 전시를 취소시킨 그들에게 본 전시야 말로 자존심을 회복시켜 마땅할 회심의 전시였을 것이다. 허나 전시에 대한, 그리고 야수파라는 사조에 대한 기대감, 그 어떤 것도 충족시키지 못한 빛 좋은 개살구처럼 느껴지는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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