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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말인가? | ARTLECTURE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말인가?

-연극 <리어왕>과 지지수 작품에 나타난 지극히 사적인 관계의 트라우마에 대하여-

/Art & History/
by youwallsang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말인가?
-연극 <리어왕>과 지지수 작품에 나타난 지극히 사적인 관계의 트라우마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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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셰익스피어의 오래된 이야기는 21세기의 예술 작품과 어떻게 조우하는가. 연극 <리어왕>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저울질한 어리석은 관계의 서사이고, 지지수 작가의 영상 작업 <미씽 원>은 사랑을 갈구하는 자가 겪는 부재의 고통에 관한 상실의 서사다. 그들은 지지 받아야 할 가장 가까운 관계 속에서 버림받고 고통스러워한다. ‘나중에 생각하는 자’는 예술가의 지극히 사적 경험을 재현한 작업에 대해 고민한다.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고 비밀은 세상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남들에게 평범한 관계가 개별적인 특수성 혹은 지나친 욕망의 함수관계 속에서 얽혀 버릴 때, 관계는 존재를 지탱하는 그물이 아니라 존재를 집어삼키는 덫이 된다.

<리어왕>,관악극회, 이현우 연출, 이순재 출연, 2021.10.30.~11.21, 예술의 전당 CJ토월극장

<미씽 원Missing One><닮은꼴>, 지지수 , 2017.4.18.~7.9, 경기도미술관 <가족보고서>

 

에피메테우스의 세번 째 질문

 


(경기도미술관, <가족보고서>展 中 지지수 전시 전경)

 

 

도슨트로 있었던 5년여의 시간 동안 관람객에게서 들었던 말은 다양했다. 어쩌다 미술관에 들어온 그들은(물론 작정하고 찾아온 관람객도 많았지만) 맘 편히 바라볼 수 없는 작품들 앞에서 적잖게 당황했고, 읽히지 않는 의미와 외면할 수 없는 부담감에 당혹스러워했다(동시대 예술이 좀, 그렇다). 그저 잠시 머리를 식히고자 들어왔을 뿐, 지나던 길에 미술관이 있어서 들어 온 것일 뿐, 미술관을 오가는 일은 어쩐지 무척 고상하고 교양 있어 보였기에 들어 왔을 뿐, 적당한 데이트 장소였고 아이들을 위한 교육적인 곳이라 여겼을 뿐. 방문의 이유는 다양했지만 작품 앞에 선 그들의 고민은 대개 비슷했다.

 

그래서 어쩌라구요? ”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비춘 작품이 건네는 질문에, 답을 내놓아야 한다는 강박에 괴로워했다. 철저한 타자의 내밀한 경험을 부담스러워했다. 눈에 담기는 이미지로만 지나쳤더라면 그런 고민따위는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고민하고 부담을 느꼈다면, 관람객은 작품을 잘 들여다보고 가는 것이다. 원래 예술가들이란 끝없는 질문을 쏟아내고 그 앞에서 쩔쩔매며 끙끙거리는 불편함을 즐기는 사람들이니.

 

 

(<리어왕> 포스터)

 


늙은 아비가 사랑하는 딸들을 앞에 두고 유산 상속을 빌미로 그들의 사랑을 저울질하고 있다. 발아래 펼쳐진 땅덩이를 두고 더 사랑한다고 말하는 딸에게 더 많은 것을 나눠주겠다며 눈을 굴리고 귀를 기울이며 있다.


나를 얼마만큼 사랑하느냐? ”



사랑의 단위를 측정하고자 하는 사람 앞에서 사랑은 측정할 길이 없는 무량無量한 것이라고 입바른 소리를 늘어놓을 걍팍한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이미 자신의 추정치를 들고서 키재기를 하려는 사람 앞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측정이 가능한 단위로 사랑을 환산해 이야기해야 한다. 그 계산법에 의해, 첫째 딸과 둘째 딸은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사탕발림을 늘어놓는다. 최상급의 표현들이 앞선 말의 뒤를 덮고,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쌓여 오른다. 물론 가장 사랑하는 막내딸은 고지식하고 정직한 입으로 단단한 하나의 알갱이만을 내놓았다. 짧지만 너무나 당연한. 아비는 배신감에 몸을 떨며 막내딸을 내쳤고 입에 발린 소리를 늘어놓은 두 딸은 막내딸의 몫까지 땅을 챙겼다.

 


(<리어왕> 연습 )

 


사람 사는 곳 어디든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은 차고 넘친다. 부모 자식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연인들 사이에서도, 그것이 아무 부질 없는 짓이라는 사실을 앎에도 불구하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감정을 구체화하려는 노력에 시달린다. 차라리 그것이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어떤 것으로 치환이 가능한 것이었더라면, 인류는 영구한 평화를 얻었을지 모를 일이다.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아비는 백여 명의 호위 무사를 대동하고 딸들의 거처를 오간다. 빈 주머니의 늙은 왕은 호위 무사의 숫자만큼 거추장스런 존재에 불과하다. 얻어 낼 것이 더는 없는 늙은 아비의 뒤치다꺼리가 한없이 귀찮은 딸들. 미련을 버릴 수 없는 늙은 아비는 마음 둘 곳 없이 떠돌다 미쳐 버린다. 이제 왕은 늙고 가난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고 미치기까지 했다. 아비는 자식들의 욕망 앞에 버려지고 잊혀진다.



지혜가 오기 전에 늙으면 안 되지. ”



어릿광대의 말은 오래전에 깨달았어야 할 금언이었고 시간은 광기의 폭풍을 멈추지 않았다. 이미 늙었기에 더욱 사랑을 갈구하게 된 어리석은 부모와 욕망을 쫓아 목마름이 더 하는 자식에게 지혜를 바라는 것은 무리일까. 틀어져 버린 관계 속의 아버지와 자식은 비틀린 꼬임에 갇혀 모두 죽는다.

<리어왕>딸바보아버지가 빈털터리가 되어 버림받아, “바보가 되어 미친 채 죽어가는 이야기다.

 

 

(<미씽 원Missing One>,지지수,2014,비디오 인스톨레이션,싱글 채널 비디오,칼라, 6‘41“)

-경기도미술관 <가족보고서> .

 


길지 않은 생머리의 젊은 여자는 전시장 좁고 긴 구석에 내몰려 일상적인 크기를 넘어선 거대한 몸집으로 제 바지춤을 들썩인다. 아랫도리를 드러낸 채 가만히 서 있기도 하고, 허릿단 고무줄을 늘리며 그 속으로 들어갈 듯 몸을 뒤척인다. 전시장 안에서 그녀는 하루종일 끊임없이 반복해 자신의 잃어버린 것을 찾아 바지 속을 두리번거린다. 어깨죽지를 가볍게 흔들며 은근한 파스텔 톤의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조금씩 불편해질 때, 일부러 외면하는 눈들이 생겨난다.


엉거주춤 선 채로 바지 속을 살피고 있는 작가는 어느 순간부터 잊힌 존재다. 사내아이가 아니어서 잊혀졌을 수도 있고 잊혀졌기에 사내아이가 아닐 수도 있다. 앞과 뒤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녀는 가 아니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파자마를 헐렁하게 걸친 그녀는 한 번도 갖지 못한 아버지의 남성을 찾고 있다. 그녀가 찾는 것은 가져 본 적 없는 그것일까,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온(그리하여 그녀 자신의 근원이 된) 아버지의 그것일까. 바늘이 떨어진 곳과는 아무 상관없는 등잔 밑을 뒤지고 있는 사람처럼 엉뚱한 곳을 살피며 부재의 고통을 상실의 고통으로 바꾸고 있다.



우리 때도... ”



이 땅의 <82년생 김지영(1)>들은 까도까도 나오는 양파껍질처럼 어딘가에서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하고 있다. 어쩌면 지나간 유행가 가사처럼 귀에 굳은살이 박히도록 뻔한 이야기라고 지겨워할 수도 있지만, 몇몇의 관람객은 구석의 긴 화면 앞에 앉아 목적어와 서술어가 사라진 낡은 푸념들을 조각조각 흩어낸다. 차마 입 밖에 내놓지 못한 말들이 젊은 작가의 작품 속에 나이든 여인의 회한으로 녹아있다, 아직도, 여전히.

 


(<닮은꼴 3>, 지지수,2015,캔버스에 화장용 파운데이션,유채,74*62

 



푸른색과 붉은색의 얼굴이 겹쳐있다. 캔버스는 마치 거울처럼 작가의 얼굴을 비추고 핏속에 용해된 아버지의 얼굴을 그림자처럼 띄운다. 유전자의 영향으로 인한 닮음(Jin)뿐 아니라 환경적으로 같은 공간을 점유하기에 문화적으로 얻게 된 닮음(Mim)이라는 피할 수 없는 공유. 마치 데칼코마니(2) 같은 반복은 잊혀진 딸에게 형벌과 같은 것일지 모른다. 거울을 바라보며 확인사살을 당하듯 마주하는 트라우마의 원인과 결과. 미워하면서 사랑하고 사랑해서 분노한다고, 부정하려 해도 닮아가는 유전자의 힘과 거부할 수 없는 가족이라는 관계는 그렇게 그녀를 옭아맨다. 닮음의 정도가 언제나 애정의 정도와 비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옛말은 미워하면 닮는다는 말로 반비례를 부추긴다.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이성간의 관계와 닮았다. 그것은 부모 자식이라는 무성無性의 관계가 아니다. 남자와 여자라는 이성의 관계이고 늙은이와 젊은이라는 피할 수 없는 시간의 관계다. 그 관계에서는 무엇이건 원하는 쪽이 약자다. 비옥한 땅덩이를 들고서 사랑을 갈구하던 왕도, 가지지 못한 것을 갖지 못했다고 홀대받은 딸도 관계 속의 약자다. 약자는 절박한 요구를 하고 스스로 좌절하며 고통에 몸부림친다.


 


(<나의 침대>,트레이시 에민(3). 1998)

 


예술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



모든 예술은 작가의 삶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손에 익지 않은 기술은 능숙하게 사용하기 어렵듯이 자신의 삶에 기반하지 않은 작품은 타인의 공감을 끌어내기 어렵다. 위선은 티를 내기 마련이고 아무리 어리숙한 관람객이라도 그쯤은 재빠르게 눈치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떠오른다.


인간은 타인의 삶에 공감할 수 있을까? ”


개인의 지극히 사적인 경험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예술은 자신의 삶의 지평을 넓혀감과 동시에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가치를 투사한다. 우리가 책을 읽는 것은 등장인물을 통해 그들의 삶을 바라보고 관계 속에서 거리를 두며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공감하고자 하는 바람 때문이다(물론 그 객관성 또한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문학은 경험을 허구화하고 상상을 덧대 독자로 하여금 다시 진실한 경험으로 치환되기를 요구하지만 르포르타주는 생생한 사실로 진실을 대면하게 만든다(4). 마치 르포르타주와 같은 사적 경험의 진술은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3자는 타인의 삶에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그녀의 살아감을 나/3자는 공감할 수 있을까?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고 계속 곱씹어 아무렇지 않을 때까지 드러내면서 이겨내려는 그/그녀의 노력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녀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데 나/3자가 왜 들러리를 서야하는가?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인데, 너의 상처를 동정할 수는 있지만 그래서? 동정을 받고 싶은가? 위로를 해 달라고 어깨를 내미는가? /3자는 왜 그/그녀의 상처를 마주하고 심지어 보듬어야만 하는가? 한 개인의 사생활(지나치게 전형적이고 절대로 나는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라는 삿된 맹세를 하게 만드는)을 왜 일방적으로 바라봐야 하는가. 지극히 사적인 트라우마 극복에 관한 예술의 도구화는 여전히 풀기 힘든 어려운 문제다.

 

예술이 왜 그래? ”

 

불편함 속에서 자꾸만 끌어당겼던 분내 나는 얼굴의 주인공. 누군가의 굴곡진 개인사(여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벌어진)는 보고 싶지 않지만 들여다보게 되는 열쇠 구멍과 같은 것이었다.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한 상처의 들춤이 내내 불편했다. 상처는 모두 그 무늬가 비슷했다. 칼에 찔렸건, 총에 맞았건, 그저 외면하고픈 피투성이였고 나의 일이 아니기만을 바라는 통증 없는 타인의 아픔일 뿐.


두 개의 얼굴이 겹쳐있다. 짙은 화장처럼 번진 얼굴은 빛의 산란인지 눈물인지 얼룩져 있다. 외면할 수 없는 하나의 얼굴 위로 절박한 그녀의 얼굴이 있다. 화장은 가리는 것이 아니라 때로 자신을 더욱 드러내기 위해 치러지는 의례ritual 같은 것이다.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삶이 아니라 가진 것을 당당히 누리는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걸음이다. <미씽 원>에서 그토록 간절하게 찾아 헤매던 것, 가진 적이 없기에 더욱 원할 수 밖에 없던 것을 내려 놓고 자신의 힘을 자각하는 순간. 강력했던 힘 위로 고스란히 덧칠된 개별적 주체로의 자존감. 자신의 여성성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순간이 <닮은꼴> 속에 있다.


개인의 경험이 단지 결과적인 나열에서 멈춘다면 그건 열린 결말이 아니라 반토막의 결말일 뿐이다. 작업은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트라우마는 극복되고 더 넓은 지평으로 탈주해야 한다. 지극한 사적 경험이 타자에게 공감을 이끌어 내는 순간은 탈주의 시작점이다. 치유가 가능해지는 시간, 개별적인 타인의 상처가 나/3자를 통과해 나아가는 지점, 공명의 순간이다. 개별적인 모든 이유들이 닮은 모양을 하고 있고, 그 아픔에 동시적인 통증을 감각하게 될 때 작품은 힘을 얻는다. 상처가 윤곽을 드러내고 고통이 현실적 감각으로 느껴지는 그 날이, 작가의 상처도 나/3자의 상처도 아물기 시각하는 첫날이 된다.


그래서 어쩌라구요- ”


<가족보고서> 경기도미술관 홍보 영상




출처

(1) 소설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2016,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13, 영화 <82년생 김지영>, 2019, 김도영 감독, 정유미 주연

(2) 일정한 무늬를 종이에 찍어 다른 표면에 옮겨 붙이는 방식 기법

(3) 트레이시 에민(1963~ ) 영국 미술가, 다양한 매체를 이용 고백적이고 자전적인 주제 표현. <나의 침대>로 1998년 터너 상 후보에 오름. 

(4) “...순문학의 효과는 통상 독자나 청중의 ‘불신감의 자발적 보류’에 의지해야 하는데, 이 때문에 유희遊戲나 공모共謀, 또는 자기기만의 요소가 불가피하게 따른다. 이와 반대로 르포르타주는 현실의 힘을 곧바로 추구하는데, 순문학에서는 가상을 통해서만 현실에 접근할 수 있다...” -역사의 원전/존 캐리 편저/바다출판사, P21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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