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나를 보고서 내 얼굴이 당신에게 응답하고 내 안에 있는 무엇인가가 당신에게 호응하고 신뢰감을 준다고 느꼈는데, 나도 당신에게서 정확히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고.” -헤르만 헤세-
사랑하는 대상과 영원불변하게 함께이고 싶은 우리의 한낱 부질없는 백일몽, 그 꿈이 덧없다는 것을 아는 이유는 사랑의 영속이 단 며칠, 하루를 지속하기도 어렵다는 사실을 경험했기 때문이랴. 사랑하는 자는 언제나 구애를 보내고 손해를 보는 자, 사랑을 받는 자는 언제나 떠나가고 이득을 보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우리는 그 대상을 곁에 두고 끊임없이 '사랑해'라는 단어를 끊임없이 되뇌고 싶으며, 그 부드럽고도 내밀한 살갗이 나의 피부와 밀착하고 이에 온기를 교환할 수 있기를 바라며, 나의 구애, 고백을 부디 그 대상이 응답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 응답이란 언제나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이 변덕스러운 정념에 의해 무한히 지체되거나 거부당한다. 따스하고도 내밀한 그 육체는 나로부터 끊임없이 달아난다. 밀착은 찰나요, 부재와 기다림은 장황하다. 나는 그 대상의 일거수일투족에 참여할 수 없고, 대상의 변덕스러운 심기란 언제나 거부로 가득하다. 내면에 피어오른 욕망이란 대상을 곁에 두고 소유하고 싶고 지배하고 싶지만, 오히려 그 압제가 대상의 찬연히 빛나는 미광을 짓밟아버릴지도 모르기에, 이에 우리는 사랑을 하며 그들의 자유를 존중한다. 그리고 욕망이 아닌 사랑을 하는 우리는 끊임없이 기다린다. 대상의 부재에 끊임없이 확인을 요구하지만, 그것마저도 벅차다. 대상이 지금 내 눈앞에 있지 않는다면, 나와 밀착하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이들은 언제나 기다림의 연속이다. 사랑받는 대상들은 언제나 사랑하는 이로부터 도망간다. 한편 그 익숙한 밀착과 사랑과 욕망의 오묘한 간극에서 벗어난 이는, 생경하고 낯선 대상들을 유랑하며 사랑이란 이름으로 규정된 나를 한 차원 초원하게 되리라. 홍상수의 신작 <도망친 여자>에서의 도망이 바로 그것이다.

홍상수의 작품세계는 김민희와의 교제 이후로 분명 변화하고 있다. 물론 이전까지도 분명 홍감독은 영화에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었다. 그의 시선에서 포착한 남과 여의 본성, 결코 대단한 것들이 아니라 단지 정욕에 의해 지배되는 인간세계의 덧없음이 홍감독의 작품세계를 통틀어 줄곧 반복되고 있다. 이는 그의 작품세계에서 주인공들이 뱉어내는, 무수하지만 단지 '육욕에 빠져있다'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 대화들에서 나타난다. 그 일상적 대화 속에서 홍상수는 작품의 구조적 실험을 행했었다. 과연 우리의 기억은 선형적일까 비선형적일까, 우리에게서 시간을 가리키는 초침소리가 부재한다면 과연 우리는 시간을 합리적으로 느낄 수 있을까, 이러한 탐구를 실험적인 편집을 통해서 선보이곤 하였다. 하지만 김민희와의 교제 이후에 그는 이 같은 구조적 실험 대신, 사람들의 관계망과 욕망, 타인과의 관계가 드러나는 대화와 군상 그 자체에 더욱 집중한다. 그래서 김민희 교제 이후의 홍상수는 이전부터 그의 스승격으로 여겨진 누벨바그의 거장 에릭 로메르와 더욱 유사해진다. 다만 그 대화 속에 홍상수가 손에 쥐고 놓지 않던, 교차되는 두 개의 시선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음은 확실해 보인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 남과 여의 다른 의식과 시선, <그 후>에서는 이 같은 시선이 형식에 맞닿고 있지는 않지만, 평행선을 달리는 그들의 대화 속에서는 이전에 그가 탐구하던 시선의 경향은 일상 속에 스며들어 묻어난다. 그 시선은 변증법적으로 보인다. 남자의 시선이 정이고, 여자의 시선이 그것에 모순을 포착하는 반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서 합은 없다. 그가 포착하는 것은 각자의 믿음에 따른 두개의 정이거나, 타인의 시선에서 보기에는 양자 모두 객관적이지 않은 두개의 반이다.
즉 그의 탐구는 결코 이 다른 시선들이 합쳐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타자의 시선에서의 틀림과, 자신의 시선에서의 맞음은 그에게서 결코 상충 가능한 영역이 아니다. 충돌했다가 여전히 평행궤도를 다시금 달려 나간다. 일련의 집단적 독백, <도망친 여자>의 무수한 대화와 만남에서도 과연 합은 부재하고 있을까. 최근 홍상수의 작품들 중 구조적인 반복이 시작되는 기점은 <클레어의 카메라>라고 할 수 있다. 더 이상 형식적인 실험은 무뎌지고 기초적인 연출들만이 강조되던 분기점, 본 작품도 형식에 있어선 그 맥락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허나 그러한 형식을 바탕으로 욕망에 의한 균열을 비춰내던, 그간의 내용에 있어 다시금 변곡점에 서있는 작품이 바로 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본 글은 여전한 그의 형식 속에서, 그가 포착하는 것이 어떻게 뒤바뀌고 있는 지를 탐구하고자 한다. 극의 시작은 수탉 한 마리와 암탉 여러 마리가 놓인 닭장을 포착함으로부터 이뤄진다. 그리고 본 장면에서 홍상수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아주 거칠고 투박한 줌 아웃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영화는 이러한 암탉들에 대한 작품이라 할 수 있으며, 극 중 영순이 언급하는 것처럼 암탉을 착취하는 수탉으로부터 도망친 암탉들의 일탈을 담아낸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줌 아웃은 마땅히 멀어져야 할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홍상수는 한 가지 사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관점과 해석으로 분화되는 것이, 각자의 다른 관점에 의해서 필연적이라는 관점을 취해왔었고, 그래서 이 같은 연출의 사용에 있어서도 하나의 역할이나 해석에만 얽매이지 않는 다층성이 대두된다. 닭장을 줌 아웃하며 멀어지면서, 우리가 마땅히 도망쳐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면, 이외의 장면에서 줌 아웃은 '확장'의 의미로 사용되곤 한다. 클로즈업으로부터 바스트숏, 풀숏, 롱숏으로의 확장, 줌 아웃에 의해 우리를 둘러싼 타인과 세계로 시야가 확장된다. 또 줌 아웃이 사용됨으로써 감희가 포착되었다가 영순이 포착되고, 영진이 편입되곤 한다. 그렇게 편입되어가며 도축을 둘러싼 서로의 이야기가 확장되기도 하고, 또 감희는 시인과 투닥거리는 수영의 모습이 포착된 인터폰을 마주하며 그녀의 사정을 헤아리며 상대방의 세계로 인식의 지평을 넓혀간다. 그리고 우진은 남편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을, 감희의 이야기를 청취하며 달리 헤아려본다.
즉 타인이 포착되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세계를 담아내는 줌 아웃은 하나의 확장이다. 나로부터 타인, 세계로의 확장 말이다. 이러한 줌 아웃과 함께 줌 인도 적극적으로 사용된다. 일단 줌 인은 주목해야 할 것이다. 면접을 보러가는 인근의 젊은 이웃을 측은하게 바라보는 영순에게 줌 인 하며 그녀를 클로즈업한다. 이를 통해 그녀의 복잡 미묘한 감정을 헤아리게 만들며, 이는 그간 홍감독이 사용하던 줌 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집중의 의미를 홍감독은 인간관계에 접목시킨다. 이후 영순의 집에 감희가 방문한다. 그리고 줌 인이 일어나고, 영순의 눈에 헤어스타일에 변화를 준 감희가 목도된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없더라도 자신이 관심이 있는 사람을 생각하는 수영에게도 줌 인이 사용되며, 또 과거에 언짢은 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감희에게 우진이 사과를 건 낼 때도 줌 인이 사용된다. 또 cctv를 보며 타인의 처지를 헤아리는 장면에서도 줌 인이 사용되며 공감과 집중을 통한 역지사지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리고 타인을 넘어서 타 생명체를 헤아림에 있어서도 줌 인이 사용된다. 이들이 논의하는 도축과 채식주의에 대한 논의, 길고양이와의 공존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그것을 발화하는 그들에게 줌 인이 사용된다. 그리고 보다 직접적으로 수영이 만들어준 파스타와 우진이 깎아준 사과의 맛, 그 대상들의 맛을 직접적으로 느낄 때 줌 인이 사용되며, 이들이 논의한 길고양이 또한 줌 인을 통해 주목의 의미를 표한다. 한편 언제나 줌인이 타인에게의 집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녀들이 서로 함께 놓여있을 때는 그 구도가 보다 널따랗게 확장되어 가지만, 한편 그녀들에게 남성들이 다가올 때 줌 인이 사용되어 세계는 다시 갑갑하게 축소되곤 한다. 남성들이 그들의 일방적인 주장만을 펼침에 여성들도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데, 이때 줌 인이 사용된다. 즉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줌 인은 확장의 불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위축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그들의 세계로 확장하기 싫은 것이다.
줌 인, 줌 아웃만이 적극적으로 사용되는 영화의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다. 카메라의 운동성도 기껏해야 패닝만이 사용될 뿐이다. 이렇게 카메라가 고정되어 있다 보니, 틀이 고정된 이 프레임 안과 밖을 오고 가는 사람들의 출입과 퇴장이 눈에 띄곤 한다. 이것 또한 줌 인과 줌 아웃처럼 일련의 다양한 의미를 띠곤 한다. 일단 영순의 집에 방문한 감희는 그 인근에서 들려오는 닭의 소리를 신기해한다. 그렇게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는 닭의 소리가 감희에게는 즐겁다. 하지만 영순에게는 그렇지 않다. 하지만 감희의 말을 들으며 그 닭들에 대해 달리 생각해보고, 그 다음날 닭장이 포착되는 프레임 안으로 그녀들이 방문한다. 또 이웃집 여인이 포착되는 프레임 안으로 영순이 진입해가곤 하며, 카메라는 감희를 포착하고 있긴 하지만 수영이 포착되고 있을 그 프레임 안을 향해 감희는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다. 또 감희의 프레임 안으로 우진은 사과를 위해 진입하곤 한다. 이 같은 프레임 안으로의 진입은 타인을 헤아리고, 또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방문이다. 이렇게 편입하기 위한 태도도 중요하다. 수영의 집주인이 전세 값 1억을 깎아서 타인이 진입할 수 있게끔, 그 방문을 열린 상태로 만들어주는 열린 태도가 말이다. 무엇보다 방문하는 사람도 그 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마음가짐을 갖춰야 한다. 예술인 그룹에 참여하고자 하는 수영의 태도나, 그것을 듣고 참 좋은 일인 것 같다며 말하는 감희의 태도처럼, 이렇게 방문을 통해서 내가 확장될 수 있을 것이라며 긍정적으로 여겨야 하리라. 하지만 방문이 아니라 하나의 침입, 침투가 될 때가 있다. 타인, 타 생명체와의 공존이 아니라 오직 인간, 자신들만의 이기심을 표출하기 위한 영순네 영역으로의 개입, 오직 자신의 욕망만을 위해서 수영의 집에 무례하게 쳐들어오는 시인의 침입, 감희의 생각을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려는 정 선생의 침투, 이에 그녀들은 다시금 도망친다. 살며시 열렸던 문은 다시금 굳게 닫히고, 또 그녀들은 그들이 없는 세계로 도망치는 것이다.
홍감독은 이를 언제나 그래왔듯 대단히 일상적인 언어와 말투를 사용하는 디렉팅으로 보여준다. 디렉팅 뿐만이 아니라 분절이 거의 없는 롱테이크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현실의 시간과 영화 속 시간을 비교적 동화시키고, 또 그것을 포착하는 구도에 있어서도 우리가 타인들의 대화를 마주하는 듯한 현실성을 추구한다. 그래서 한 개인들의 대화 구도는 숏과 숏이 분절된 리버스 숏이 아니라, 롱 테이크 내에서 각자를 교차하며 보여주는, 이어져 있는 리버스 숏처럼 보이곤 한다. 그리고 이 같은 리버스 숏과도 같은 연출을 통해서 타인의 세계로 진입하고, 이에 의해 내가 확장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소의 도축과 채식주의에 대해서 말하는 그녀들을 양자 모두를 함께 포착하다가, 이후 그녀들 각각에게로 근접하여 서로가 다른 개개의 의견을 포착한다. 각자의 의견에는 차이가 있지만, 감희와 영순은 서로의 의견을 듣고 동의하며, 이를 통해서 각자의 생각을 보다 절충해간다. 사랑에 대해 회의적으로 말하던 수영도 마찬가지다. 감희가 짝이 있을 거라는 말에, 자신이 마음에 두고 있는 무대 미술을 하는 한 남자를 말한다. 그리고 이 같은 오고감 속에서 우진이 남편에게 갖는 생각도 확장되곤 한다. 이는 홍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인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와 다른 태도인 것이다. 남과 여, 서로의 시선이 너무도 달라서 일련의 객관이나 사실이랄지, 아니면 절충조차도 불가능했던 그 시선이, 리버스 숏을 통한 헤아림 속에서 극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남성성의 탈피에 다름 아니다. 남성들이 찾아온 장면에서는 이 같은 교차를 찾아볼 수 없다. 이웃, 시인, 정 선생 모두가 관객을 향해 등을 돌리고 있다. 그들은 오직 자기 할 말만을 한다. 고집이자 단절, 이에 <지금은맞고그때의틀리다>의 ‘타협할 수 없음’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녀들은 능동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다. <풀잎들>에서 관찰자에 그치던 그녀, 허나 본 작품에서는 능동적으로 대화의 주체가 된다. 타인을 그저 멀찍이 관조하던 태도로부터, 그것을 체화하고 행동에 옮기는 능동적 영역으로 나가선 것이다.
스스로 머리를 잘랐다는 감희의 말처럼, 또 5년 만에 남편을 떠나서 1박 2일의 만남을 즐기는 감희의 여정이 바로 이러한 능동성, 주체성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는 여성들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전진하는 과정이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닭장이 포착된 이후에 밭에서 작업하는 영순의 모습이 포착되곤 한다. 그리고 그녀는 겨우 이혼했다고 말한다. 그것이 곧 중년 여성들이 살아온 전근대적인 삶인 것이다. 그녀보다 조금 젊은 수영도 보다 주체적이지만, 여전히 집에만 놓여있다. 자기 아내가 불편해해서 찾아왔다는 이웃 남성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녀는 여전히 집에만 놓여 있고, 외부는 남편이 관장한다. 또 그것이 과연 그녀의 의중일까. 그녀를 핑계로 자신의 욕망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남편이 왜곡했듯, 아니면 진짜 그녀가 남편에게 시켰듯, 수동성 속에서 여성들의 진위는 확인할 수 없게 된다. 한편 젊은 감희는 바깥에서 능동적으로 여행한달지, 또 우진은 직장에 놓여 있다. 그것이 곧 주체적으로 나아가는 여성의 일대기인 것이다. 그것이 곧 도망이다. 영순이 이혼하지 않았다면, 수영이 시인의 집착에 수긍했다면 그들에 의한 삶이 전개되었을 테다. 우진은 자기 남편이 인기가 지나치게 많은 것이 불편하다고 말한다. 인기가 많아진 이후에 그가 달라졌다. 그에게 관심을 주는 그 대중들에 의해 뒤바뀐 것이다. 또 타인들과 함께 있으면 비교되고, 우진처럼 열등감을 느끼기도 한다. 나 개인의 오롯한 가치가 무뎌지기 시작한다. 이는 하나의 공동존재이다. 타인들과 관계하는 것은 결코 독립된 관계가 아니다. 하이데거가 타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하나로 얽히게 되는, 그래서 나를 존중하는 것에도 다름 아닌, 나와 타인을 구분하기 어려운 그 관계를 공동존재라 명명한 바 있다. 이것처럼 남편과의 관계나 대중들과의 관계는 하나의 공동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이 도망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남편이라는 공동존재에 의해 내가 무화되는 것, 그리고 인기에 의해 내가 상실되는 것이다.
그래서 본 작품의 도망은 나를 되찾는 도망이다. 영순과 수영은 나를 되찾기 위해 그녀들을 속박하는 그들로부터 도망친 것이고, 또 감희는 서로의 삶을 존중하기 때문에 각자를 배려한 일시적 도망을 떠난 것이랴. 그리고 남편을 벗어나 그녀들과 그녀들이 맺는 새로운 공동존재에서 중요한 것은 소통이다. 대화를 통해서 서로의 생각을 헤아리고, 나를 존중받고 또 확장하며 나와 상대를 존중하는 그런 관계 말이다. 이러한 여성들에게선 연대성이 강조된다. 하지만 앞서 바라본 것처럼 연대할 수도, 소통할 수도 없는 관계들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감희는 영순과의 만남 속에서 더 이상 관계 맺는 것이 지친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텅 빈 공간을 비춘 이후에 그녀들이 함께 놓인 장면으로 옮겨가기도 하거나, 또 이러한 타인들이 함께 에둘러 살아가는 널따란 밭, 마을, 산 등 거대한 세계를 포착하곤 한다. 그렇게 다 같이 살아가는 세계를 환기시키곤 하고, 또 우리가 계획하지 않더라도 우연에 의해서 특정 공간에서 타인을 만나게 되는 상황을 강조한다. 감희와 우진의 재회처럼 말이다. 그리고 영화는 줄곧 창문과 문 등 소통의 창구를 강조하곤 한다. 거기서 타인이 진입해오고, 또 까마귀 소리가 들려오기도 하는, 우리는 그 방문을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방문과 침입의 차이, 소통과 독백의 차이는 똑같은 줌 인과 줌 아웃이라 할지라도, 그 다층성에 의해 밝혀진 바 있고 그것은 인간관계의 방향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관계들로 가득한 세계도 마찬가지다. 영순의 미지의 3층에 관심 갖는 감희의 태도처럼, 또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뒷부분에 처음에는 집중하지 못해 샌드위치를 먹다가, 다시 돌아와서 영화에 몰입하는 감희의 모습처럼, 우리는 그 세계에 참여하고 이에 열린 마음을 띠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감희가 감상한 영화처럼 흑백에서 컬러로 뒤바뀌는, 그 다채로운 가능성과 이를 체화하는 나의 확장이 있을 것이다. '왜 그런 공간에 왔느냐?'이러한 정 선생의 판단은 대상에의 집중이 아니다. 그의 사고 내에서 자기중심적인 판단을 내린 것뿐이다. 정 선생은 그저 과거에 마주한 감희에 대한 생각으로 그녀를 판단하지 않던가. 이러한 태도는 나를 확장하지 못하고, 또 나의 시선 하에 타인을 옭아맨다.
또 나의 기억과 편견에 가득 찬 상대방이 아니라, 현재에 놓인 상대방과 마주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감희처럼 이러한 시선과 다른 방향과 다른 출구로 도망치고 떠나가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간 홍감독의 작품들에서 남성들의 대화는 집단적인 독백에 가까웠다. 여성들을 향한 자신들의 욕망을 쏟아내고, 또 그것에 수긍하지 않는 상대방은 이를 맹렬히 반대해왔다. 본 작품 속 남성들과의 대화는 이러한 홍감독의 이전 테마가 오버랩된다. 하지만 이러한 이기적 욕망으로부터 도망쳐가며, 나의 욕망에 포섭시켜 이기적인 ‘우리’를 만들려는 <우리 선희>와 같은 관계들이 사라진다. 사랑받는 자가 아니라 욕망당하는 자들은 비로소 본 작품에서 도망쳐간다. 그녀들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함과 동시에 사랑받는 자신은 끊임없이 누군가의 욕망으로부터, 또 사랑의 구애로부터 달아나 존재를 초월하고 고양시킨다. 이를 여전히 무수한 대화를 통해서 담아내지만 그에게서 자주 오버랩되던 우디 앨런이랄지 로메르와 확연히 다르다. 오히려 대화를 필두로, 그리고 공간의 상징성을 바탕으로 관계를 녹여내던 터키의 누리 빌게 제일란과 더욱 유사하게 느껴지는 변화가 목도된다. 물론 여전히 투박하고 기초적인 그의 연출은 이어가며 홍감독의 형식적 색채는 남아있고, 무엇보다 그 연출들에 그가 논하는 이 관계성을 풍성하게 녹여낸다. 그러한 변화 속에서 홍감독은 남성 및 자기 비판적이던 그간의 작품들에 대한 일련의 대안을 내놓는다. 남성성 대 여성성의 대치라기보다는, 권위적인 남성성에서 탈피한 소통의 본질을 내세운 것이랴. 단순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관계의 본질, 그간의 통념으로부터 도망치며 본질로 회귀하는 감희의 여정 속에서 우리는 가야할 미래를 엿보며, 그 단순한 진리에 의해 홍감독의 작품세계에서 지금까지 불가능했던 '합'의 영역은 비로소 본 작품에서 결실을 맺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