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인가? 아닌가? 처음 이 작품과 마주했을 때 첫인상이었다. 언뜻 보면 회화 같지만 자세히 보면 회화가 아닌 묘한 경계에 있는 듯한 작품이다. 아무것도 없는 캔버스 위 칼로 슥~ 한 번 그어놓은 작품. 안이 밖이 되고, 밖이 안이되는 베어진 선. 단순하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작품이었다.
서양미술사에서 '공간'이란 다양하게 표현되어왔다. 르네상스 회화 속 '공간'은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려 했다. 바로크 회화는 빛과 색을 강하게 담아냄으로써 '공간'을 표현했다. 전통적 방법인 데생, 색, 빛으로 캔버스 위에 '공간'을 담아내던 시대는 끝나고 새로운 시기가 도래한다. 몬드리안처럼 기하학적 공간. 프란시스 베이컨의 데생을 생략한 추상 공간으로 '공간'. 잭슨 폴록의 몸을 이용한 액션페인팅처럼 시각적 재현 '공간'이 추상표현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기도 한다.
루치오 폰타나 <공간 개념 ‘기다림’ Concetto Spaziale, Attese> 1860 Canvas 93x73cm
© Fondazione Lucio Fontana, Milan, 테이트 모던 소장
이들처럼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 또 한 명의 작가는 루치오 폰타나다. 1899년 아르헨티나에 살던 이탈리아 조각가 아버지와 아르헨티나 여배우 사이에서 혼외자식으로 태어났다. 6세부터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학교를 다녔다. 청소년기에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이탈리아 군에 자원입대한다. 22세에 형을 갑자기 잃는다. 가족들은 다시 아르헨티나로 이주한다. 아버지 작업장에서 조각 일을 돕던 폰타나는 따로 조각 작업실을 마련해 작업을 시작했다. 28세 다시 밀라노로 돌아온 그는 파리 추상 창조 그룹에 가입해 비구상 조각들을 발전시킨다. 1940년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전쟁을 피해 아르헨티나로 떠난다.
7년 후 밀라노로 돌아온 그는 1947년 <공간주의 선언>이라는 것을 한다. 선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미술은 미술을 제작하는 제스처가 지속되고 항상 인간의 정신 속에 스미는 한 영원하다. 어떤 것도 불멸하는 것은 없다. 그것은 '제스처'로써 영원하게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물질로서는 명을 다할 것이다."
(좌) ⓒLucio Fontana (우) 루치오 폰타나 <공간 개념 Concettp Spaziale> 1963 Oil on shaped canvas ⓒLucio Fontana
폰타나는 미술품인 물질은 유한하고, 인간의 행동인 제스처는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행위'와 같은 비물질적 미술 작품이야말로 영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공간의 개념과 행위를 합한 <구멍> 연작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50세였다.
르네상스부터 내려오던 전통적인 원근법을 벗어나 우주의 새로운 차원, 무한한 공간을 만들고 싶어 했다. 무한한 차원을 창조해내는 기초. 그것은 바로 구멍 뚫기였다. 구멍은 캔버스 뒤 허공을 창조하며 빛을 통과시킨다.
루치오 폰타나 <공간 개념, 신의 종말 Concetto Spaziale, La Fine di Dio di> 1963
ⓒmartebenicult.wordpress.com
"뚫린 캔버스들을 작업하면서, 화가로서 나는 그림을 만들기를 원하지 않았다. 나는 공간을 열고, 미술에서 새로운 차원을 창조하고, 그것을 우주와 함께 묶어내기를 원했다." -1946년-
수많은 구멍들이 사뭇 하늘의 별들처럼 고요하다. 우주의 숭고한 아름다움을 발견한 감동이 묻어난다. 눈 앞에 보이면서도 잡히지 않는 아스라이 빛나며 사라지는 우주.
루치오 폰타나 <공간 개념, 신의 종말 Concetto Spaziale, La fine di Dio>
1964 Oil on shaped canvas 178.4x123.2cm ⓒChristies.com
이 달걀 모양 노란색 캔버스 <공간 개념, 신의 종말>은 2015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약 360억 원 ($29173000) 달러에 낙찰되며, 그해 현대미술 낙찰가 탑 10 안에 드는 작가로 이름을 올렸다.
<공간 개념, 신의 종말> 시리즈 제목에서 '신의 종말'은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고 한 말을 떠올리게 한다. 니체는 이천 년을 내려온 형이상학적 이분법(플라톤주의)에 종말을 고한다는 뜻이었다면, 폰타나는 서양미술 역사에 오랫동안 내려온 원근법 등 전통적인 공간의 개념이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
달걀 모양은 삶의 부화기를 담은 듯하다. 태초의 우주처럼 소용돌이치고, 여기저기 생긴 구멍은 우주 속 파편들이 무한한 공간으로 뻗어나가는 장면처럼 보인다.
베기 (Tagli)
ⓒLucio Fontana
1958년부터 단색 캔버스를 칼로 베기 시작했다. 그의 삶과 예술 사이 경계를 무너뜨리는 베기이기도 하다. 그는 조각가, 화가이길 원하지 않았다. 단지 빛과 공간이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다는 것에 흥미를 가졌을 뿐이다.
루치오 폰타나 <공간 개념, 기다림 Concetto Spazoale Attese>
1962-1963 Oil on canvas, cut four times 92x73cm ⓒstaedelmuseum.de소장
그의 베기는 행위예술처럼 회화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침묵 속 명상으로 우리를 무장해제 시킨다. 태초부터 존재했던 빛과 어둠을 캔버스 안에 꽉 채운다. 폰타나는 베기라는 이 새로운 표현방법이 자신에게 평화와 행복을 주었다고 친구 마리오 Mario Bardini에게 편지를 썼다.
루치오 폰타나 <공간 개념, 기다림 Concetto spaziale, Attese>
1965 Water based paint on canvas, 130x97cmⓒGuggenheim
폰타나의 선 긋기는 안과 밖 사이, 그 경계는 입체적이면서도 평면적이다. 고요하면서 은은하게 들리는 종소리를 연상시킨다. 베어진 평면은 공간의 변주를 만들어 독특한 향기를 낸다. 앞면과 뒷면은 서로 만날 수 없는 일방적인 닫힌 공간이었으나, 찢어진 틈으로 서로에게 흐를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되었다.
선들은 한 편의 시처럼 보인다. 그는 <공간 개념, 기다림> 앞에 앉아 있으면 영혼의 큰 휴식을 느낀다고 했다. 물질의 노예에서 해방된 사람처럼 느껴지며 현재와 미래의 광대한 연속성에 있는 사람과 같다고 말했다.
루치오 폰타나 <공간 개념, 기다림 Concetto Spaziale, Attese>
1964 Water based paint on canvas, 55.2x46.5cm ⓒChristies.com
베어진 선은 어둠의 공간을 만든다. 관객은 캔버스 뒤 어둠의 공간으로 초대받는다. 어둠으로 들어가는 실과 같은 저 공간은 무한한 우주로 들어가는 선과 같다.
루치오 폰타나 <공간 개념(흰색) Concetto Spaziale (Bianco)
1968 Water based paint on canvas, 30x30x2cm, Contemporary소장 ⓒartnet.com Lougher
폰타나가 살던 시대는 과학, 기술, 물리학, 우주 탐사에 대한 것들이 급격하게 변하던 시대였다. 그는 두 번의 세계 대전과 정치적 혼돈, 텔레비전과 같은 획기적인 기술 발전을 피부로 경험했다. 물질이 발전하고 그 물질로 인해 전쟁의 폐해를 목격했다. 비물질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가 물질적인 것은 영원하지 못하고 파괴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이차원 공간을 벗어나 새로운 공간을 '행위'로 만들어 내고 싶었던 루치오 폰타나. 인간 경험만이 미술을 완전한 존재로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오늘날 20세기 가장 창의적인 예술가로 인정받고 있다. 전 세계 100여 개가 넘는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소장 중이다.
루치오 폰타나 <공간 개념, 기다림 Concetto Spaziale, Attese>
1962 Water based paint on canvas, 22.2x35.6cm ⓒBoongallery.com, 스톡홀름Pierre Gallery 소장
참고문헌 Lucio Fontana, Primo Manifesto spaziale, Enrico Crispolti, Lucio Fontana, Skira, 2006, pp.114-115 Lucio Fontana, The White Manifesto, pp.64-65 Stephen Bruce Petersen, Space Age Aeathetics: Lucio Fontana, Yves Klein and the Postwar European Avant-Garde, The University of Texas, 2001, p.68 https://www.widewalls.ch/most-expensive-lucio-fontana-works/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