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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인생과 작품세계
“…사람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없고, 타인에 대한 연민, 고민하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는 기쁨만이 있다…즉 예술가에 의하여 경험된 감정을 대리하는 일은 할 수 없다.” -레프 톨스토이-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1910년 11월 7일 사망하기 약 13년 전, 자신이 생각하는 미학과 예술론을 집대성한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남겼다. 아마 우리는 창조자로서 작품에 가장 밀착한 일련의 비평가에 다름 아닌 그의 식견을 통해, 『전쟁과 죽음』과 같은 그의 저서를 이해하고자 하는 열망에 휩싸일 것이다. 허나 본 저서에서 『전쟁과 죽음』을 비롯한, 젊은 날에 그가 집필한 모든 작품들은 부정되어 있다. 본 저서는 오히려 톨스토이의 예술론이나 미학이 집대성 된 에세이 내지는 이론이 아닌, 미학에서 극단적인 형태를 띠는 표현론의 예시로서 제시되고 소비되곤 한다. 그는 말년에 이르러 자신의 젊은 날 자신이 집필한 모든 저작들을 반성적으로 바라보고, 이를 부정하였다. 그의 극단적 형태의 표현론은 예술가가 경험한 진실한 감성의 승화, 이를 감상자에게 여실히 전달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같은 감정은 당대에 귀의하였던 정교회의 신념에 깊이 결부되었고, 이에 신앙심이나 진정성이 부재하였다고 생각한 젊은 날 자신의 잔상과 르네상스 이후의 예술들을 모두 부정하였다. 본 톨스토이의 이야기를 언급한 것은 한 예술가의 저작이나 일생은 결코 닫혀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가 부정한다고 해서 창조된 작품의 명성이 온당 실추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변덕스러운 예술가의 성미에 의해 지난날의 작품들은 고백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반성과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들은 결코 과거에만 메여있지 않으며, 또한 자신의 일생을 돌이켜보는 그 시선 자체가 예술로 승화되기도 한다. 우리는 이제 그 작업을 스페인을 대표하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자전적인 시선이 투영된 <페인 앤 글로리>로 엿보려 한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1949년 9월 25일 태생으로서 올해로 70세인 알모도바르는 <산 정상의 페피, 루시, 봄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 1980년 데뷔하였다. 그는 정식으로 영화를 배우지는 않았는데, 이 같이 독학한 그의 배경이 이전과는 다른 그만의 스페인 영화를 가능케 한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영화는 스페인 내전에 대한 리얼리즘 영화를 추구했던 카를로스 사우라나, 마찬가지로 본 시대를 상징주의적인 미학으로 풀어낸 빅토르 에리세 이후 세대를 대표하는 영화로서 자리매김한다. 그는 프랑코 체제의 종식 이후 도래한 민주주의를 통해 자유를 만끽했던 1970년대 후반의 스페인과, 그 이후의 역사 및 현재를 대변하는 영화를 연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것은 특히 섹슈얼한 관심을 통해서 표명된다. 실제 엄격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그가 카톨릭의 폐쇄성을 전격 비판하는 것도 전근대적인 이데올로기로부터 쇄신을 이루려던 당대의 시대적 분위기와 결부되며, 그 방식은 체제 내부의 성적 억압과 타락을 폭로한 <나쁜 버릇>과 <나쁜 교육>으로 표명된다. 이 같은 섹슈얼에 대한 그의 관심은 당대의 이분법적인 섹스의 구분법을 급진적으로 허무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을 통해 성전환을 하여 여성이 되어버린 아버지를 통해 생물학적인 성과 사회적인 성의 불일치를 탐구하며, 이는 근작 <내가 사는 피부>에서까지 이어진다. 또한 <그녀에게>및 <귀향>과 같은 작품에서는 자유화 이후에도 남아있는 그릇된 남성성과 포장된 마초의 이미지를 통렬히 비판하였으며, 특히 후자에서 이에 대항하는 여성의 연대가 도드라져 페미니즘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도 손꼽힌다. 이러한 성에 대한 그의 관심은 대단히 키치적이며 리드미컬한 감각적인 연출에 담긴다. 특히 이들의 숨겨낼 수 없는 욕망이나 정체성에 상응하는 강렬한 원색, 특히 붉은 계통의 색채가 그의 시그니처로 손꼽힌다. 한편 그는 <브로큰 임브레이스>를 통해 감독과 배우의 관계 등 보다 현실적이고 자전적인 바가 투영되어 있는 작품도 남긴 바 있는데, 본 작품 <페인 앤 글로리>는 이 같은 관심의 연장선상이라 할 수 있다.
*연출
그간 알모도바르의 작품에서 그 시작은 언제나 강렬한 원색 물감이 스크린에 흘러내리며 시작되었다. 그것은 한 개인의 욕망, 정체성, 개별성에 상응하는, 절대로 희석될 수 없는 강렬하게 빛나는 존재 그 자체였을 것이다. 본 작품의 시작도 유화물감을 비추는 강렬한 시퀀스로부터 비롯된다. 허나 단일한 색채가 아니다. 서로 뒤섞이지 않은 채로 공존하며 꿀렁이는, 다채로운 무수한 색채들의 집합, 알모도바르의 인생을 되짚어보는 본 작품에서 그것은 곧 감독 개인의 삶을 의미할 것이다. 하나의 단어, 문장들로 요약될 수 없을, 또한 단일하거나 평면적인 요소로만 정의할 수 없는, 때로는 모순되는 요소들의 총합에 다름 아닌 입체적인 한 개인의 삶에 말이다. 영화는 이 같은 개인의 삶에 부합하듯 때때로 시점 숏으로 대상, 사물, 세계를 관조한다. 그리고 <내 어머니의 모든 것>과 같은 작품들에서처럼 터널 내지는 동굴을 빠져나오며, 진정한 무언가를 마주하는 구성, 형식들이 눈에 띈다. 특히나 국내 배급사 조이앤시네마의 무지로 인해서 시퀀스의 강렬함이 다소 퇴색되어버린, 유년기의 살바도르가 어두운 동굴 속에 놓여있던 자신의 헐벗은 욕망을 똑똑히 개안하는 장면에서 이 같은 형식은 강조된다. 그리고 알모도바르의 작품에서 눈에 띄는 것이라면 바로 모호함이 아닐까. <그녀에게>에서 그것을 온당 사랑이라고 보기에도, 그렇다고 온당 마초적이라고만 정의할 수 없는 그 오묘한 경계처럼, <줄리에타>에서 사회적인 어머니와 연약하고 싶은 한 개인의 경계처럼, 본 작품에서도 그 모호한 경계들은 강조된다. 그러한 경계 허물기는 바로 시간을 바라보면서 이뤄진다. 본 작품은 줄곧 과거가 현재로 침투한다. 물과 피아노를 바라보며, 어떤 상황에 몰입하고 특정 공간에 몸담으며, 또한 어떠한 계기 없이도 불현듯 과거는 현재에 침투한다. 또한 그 시간은 언제나 선형적이지 않다. 피아노를 보고 환기된 성가대에서의 기억은 과연 신학교에 진학하기 이전일까 이후일까. 그것을 고사하고서라도 유년기의 기억과 중년의 기억이 뒤섞이는 등, 현재와 과거가 모호함과 동시에, 과거 자체도 서로간의 나뉨이 분명하지 않다.
*과거와 현재
우리는 이러한 과거와 현재를 엄히 분리하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나 <산하고인>과 같은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그리고 물론 이 같은 시간에 대한 구분과 비구분에 대한 우열을 가릴 수는 없지만, 본 작품의 강점 중의 하나는 이 같은 과거와 현재의 오묘한 공존을 연출을 통해 드러낸다는 것이다. 양자 모두를 바라봄에 연출은 클로즈업, 채도, 색조 등에 있어 동일하다. 이에 몇몇 감상자는 초반부에는 그 구분을 어려워할지 모르리라. 허나 우리에게서 과거는 언제나 명확하게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현재를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과거에 몰입하거나, 과거를 기반으로 현재의 선택을 결정하곤 한다. 과거의 무수한 ‘나’들은 지금의 나를 이루는 무수한 총체들로서, 그것과 지금의 나는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알모도바르는 이를 오묘한 연출로 드러낸다. 영화는 과거를 바라보는 현재의 태도에 대한 탐구라 할 수 있다. 오프닝의 찬란한 시퀀스는 마치 초반부에 그가 회고하는, 개여울에서 어머니들이 빨래를 하며 노래를 부르는 찬란한 과거와 상응한다. 허나 현재는 그렇지 못하다. 시작에서 살바도르가 머무는 세계는 색채를 잃었고, 수면 아래의 그는 숨을 쉬고 있지 않으며, 부동한 상태이다. 그의 현재는 움직이지 않고, 오직 유동하는 것은 과거뿐이다. 그의 과거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는 인물은 알베르토, 페데리코, 에두아르도 총 셋이다. 알베르토와 마주하기 전 이후에 그는 과거에 도취되기를 원한다. 현재의 찬란한 공간에도 녹아들지 못한다. 빠져드는 것은 유년기의 붉은 방이다. 알베르토와도 줄곧 말다툼을 일으킨다. 허나 서서히 극복되어 가는데, 이는 영화의 롱테이크로서도 드러난다. 줄곧 현재에 숏이 분절되던 살바도르의 삶은 알베르토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함께 헤로인을 피우는 과정에서 연속된 긴 호흡의 숏 안에 담겨진다. 이러한 진척은 페데리코를 대하는 그의 태도를 통해서 온당 드러난다. 현재의 삶과 영화를 거부하던 그는, 과거와 달리 늙고 쇠락해가는 현재의 자신 및 페데리코를 끌어안는다. 허나 여전히 과거의 존재를 만나고 싶어 하였다. 이러한 살바도르는 결말에서 극복된다. 그는 자신을 그려 예술을 매개해준 대상, 성 지향성에 눈뜨게 된 대상, 지금의 그를 다시 일으킨 유년기의 추억인 에두아르드를 찾는 것이 더 이상 무용하다고 말한다. 대신 그와의 추억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영화를 찍는다.
*경계, 차원
즉 오직 과거만이 영광이었다며 노스텔지어에 도취되는 현재에 대한 낙담으로부터, 과거와 현재의 건강한 공존, 그리고 과거를 토대로 아예 새로운 것을 창조해나가는 태도의 변천을 세 인물을 마주하는 살바도르의 태도로 보여준다. 어쩌면 영화의 시작에서 카오스 그 자체의 형상을 띠었다가, 어떤 질서를 이루고, 그것이 반복되는 연속이 곧 그의 인생일 것이다. 과거에 영화를 찍었지만 우울증에 낙담하고, 허나 다시 일어나 영화를 찍고, 알모도바르는 이 같은 삶 그 자체에 상응하는 자신의 영화론에 대해 논한다. 그는 학교에서 지리학이나 해부학을 배우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지식을 영화를 통해서 배웠다고 말하며, 지루한 텍스트가 휘황찬란하고 리드미컬하게 승화된 애니메이션을 통해, 지식 전달의 매체가 될 수 있는 영화를 긍정한다. 그에게서 영화는 지식, 그것이 구성된 세계가 녹아든 장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는 해부학을 논의하며 척추가 인체의 중심인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것을 기반으로 다른 기관들은 움직인다고, 영화도 그럴 것이다. 허나 그것은 척추의 독재가 아니라, 다른 기관과의 절충일 것이다. 자신의 데뷔작을 함께한 배우 알베르토와 그는 결별하였다. 의견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지만, 현재에 그들은 화해한다. 자율적인 배우의 영역을 인정한 것이다. 그들의 화해에 gv는 전개될 수 있었다. '하나의 영화'에 결코 감독만을 고려할 수 없다. 그것은 결코 소거될 수 없는 일련의 자율성을 갖는 개개 요소들의 통합에서 이뤄진다. 또한 그의 데뷔작이 <맛>이라는 것도, 알모도바르의 영화가 감각 그 자체의 표현과 자극, 욕망 등에 관심을 둔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일 것이다. 마치 미적 속성들을 미각에 빗대어 탐구하던 18세기 영국의 취미론자들처럼 말이다. 이렇게 세계를 담아내고 개개인이 통합된 감각의 세계는 알모도바르가 직접 지각한 '팩션'이다. 그가 경험한 이베리아 반도의 여름날과 그가 바라본 사람들에 대한 탐구, 그 영화는 알모도바르가 투영된 살바도르를 연기하는 알베르토처럼 하나의 '그림자'다.
허나 어느 순간 알베르토는 그림자를 생성하지 않는 독자적인 붉은 배경 속으로 녹아들곤 한다. 즉 그림자와 같은 그의 작품은 자전적임과 동시에, 감독으로부터 벗어나 자율성을 띠기 위해 줄곧 그림자가 없는 세계로 달아나곤 한다. 이는 직접적으로는 예술가와 결별한 영화 고유의 존재론에 대해서 고찰하는 것이나, 다른 한편 본 작품 자체가 줄곧 어떤 그림자들을 벗어나는 극이다. 페데리코는 공허한 우울증에 빠져 고립되어 있었다. 극의 초반에 그가 만나는 대상은 오직 메르세데스 단 한 명으로 국한된다. 그마저도 집중하지 못한다. 그는 과거로부터 규정되어 버린 낙인을 넘어서지 못한다. 이는 알베르토를 마주하는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그들 사이에는 벽이 있다. 첫 만남에서 <맛>의 포스터가 놓인 벽, 그리고 각본을 논하는 장면에서 둘 사이를 가르는 창문처럼, 살바도르의 시점에서 그것은 넘어설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허나 살바도르는 이를 넘어서는 선택을 하게 되고, 또한 이전의 자신과는 거리가 먼 헤로인을 흡입한다. 헤로인이라는 사건 자체도 규정되고 구속되어버린 즉자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운 대자로 나아가는 행위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그는 헤로인에 의존해야만 대자적인 자신을 성취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가해진 고통, 죽음의 굴레는 오직 헤로인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향할 수 있는 잠재의식 및 무의식의 영역도 무시할 순 없을 것이다. 유년기의 자신은 많은 요소들이 확립되지 않아 열려있던, 신학교를 줄곧 반항하는 대자 그 자체였으니 거기서 용기를 얻고 싶은 것일지 모른다. 허나 진정한 대자, 자유는 이 같은 투약 없이도 향해야만 한다. 이윽고 살바도르는 페데리코를 만나는 과정에서 헤로인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러한 대자로의 나아감이 곧 영화의 오프닝의 물감에 다름 아닐지 모른다. 글의 중반에서 다시 도입부를 논하자면, 그러한 물감은 무질서로부터 느슨하고도 자유로운 질서를 갖는다. 이를 통해 어떤 형체를 이룬다. 무질서 그 자체였던 바다, 숲, 늪을 연상케 하는 색채로부터, 마치 나비의 날개와도 같은 아름다운 형체로 나아간다. 한편 결코 고정되지 않고 무수한 가능성 사이를 줄곧 오가는데, 이러한 변화의 연속이 곧 현재로부터 벗어나 나아가고자하는 그의 의지가 아닌가.
*영광과 고통
그리고 이 갖은 색채가 갖는 양면성이 곧 영화의 제목과도 같은 '영광과 고통'에 상응할 것이다. 그것은 관점과 한 개인의 인생이라는 두 영역을 통해서 전개되듯 보인다. 알모도바르의 유년기는 스페인 내전 이후 프랑코 정권 치하의 그야말로 전쟁 같은 삶이었다. 삶이 고단한 어머니는 하늘의 폭죽을 두고 전쟁이라 논하지만, 어린 살바도르는 축제 그 자체로 바라본다. 갈리시아로의 이사 이후에 살게 된 동굴 같은 집 또한 어머니에게는 암흑과도 같은 고통의 공간이다. 허나 살바도르에게 그것은 축복의 빛이 부여되는 영광 그 자체이다. 또한 과거의 자신도 살바도르에게는 익숙한 것이나, 이를 마주하는 알베르토에게는 현재에 새로운 타인, 사건이다. 알베르토가 논하는 살바도르의 고해도 시점에 따라서 죄와 자유가 나뉘며, 그것을 수용하는 관객들도 경험자인 페데리코나 다른 무수한 비경험자들에 따라 감상의 차이가 있다. 즉 온당 절대적인 고통과 영광은 없다. 양자는 하나의 원형 구, 내에서 두개의 얼굴을 띠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인생 자체가 고통과 영광이 교차되거나, 때로는 함께 놓인다. 살바도르의 입에서 자스민향과 암모니아의 냄새, 뜨거운 여름과 산들바람 등이 함께 논의되는 것을 보라. 세계 자체가 고통과 영광이 결코 분리되지 않은 채, 한 차원 안에 놓인 것이다. 존재도 그렇다. 살바도르가 신과 운명을 믿음과 동시에 무신론자를 믿는 모순적 존재인 것처럼, 고통과 영광, 삶과 죽음은 하나의 차원 하에 놓여있다. 그리고 살바도르는 고통만을 바라보며, 이에 죽음이 응시되며 낙담해버렸는지 모른다. 허나 영광은 존재한다. 그것은 마치 하늘을 수놓는 욕망의 해방, 열병으로 주저앉은 소년을 일으키는 에로스의 힘, 살바도르를 일으킨 영광이란 바로 그 욕망과 관계된다. 떠나가 버리고 하룻밤의 백일몽처럼 짧으며 유실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그 기억만으로 죽음과도 같은 어둠을 이겨낼 수 있는 영광의 맛, 알모도바르는 그 삶의 추동을 영화에 담아낸다, 자전적인지 아니면 독립적인지 그 오묘함이 함께 공존하는 영화를 통해서.
*알모도바르의 어머니, 여성
그리고 욕망과 함께 알모도바르가 찬미하는 것은 바로 어머니다. 영화 속에서 아버지는 이사 과정 중에서만, 그리고 사진 속에서 찰나적으로 비춰질 뿐이다. 영화 속에서는 오직 모자관계만이 포착된다. 우리는 이 같은 어머니와의 기억을 통해 그간 알모도바르의 작품들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서 어머니는 언제나 함께 있는 존재, 그녀가 빨래하는 실개천의 물과 같은 존재다. 어머니는 부드럽고 경쾌하게 흘러가는 여울목의 감각과 연관되지만, 한편 언제나 그와 함께 있는 그녀는 강인한 존재다. 그녀의 눈에서 음지로 유폐되어버린 그 삶을 극복하고자 언제나 영리한 선택을 도모한다. 그리고 기성 이데올로기가 강요하는 책망을 인도하며, 살바도르를 더 나은 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존재가 바로 어머니인 것이다. 죽음의 문턱에서 어머니는 살바도르를 위해 자신의 삶을 내던지고, 아들의 세계에 뛰어들어 자신의 삶을 그에 맞추려는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지금은 사멸한 어머니의 자리엔 메르세데스가 놓여 있으니, 알모도바르의 개인적인 여성이란 언제나 그가 의존할 수 있는 강인한 존재인 것이다. 오히려 유약한 그로부터 강인한 존재, 모든 것을 희생한 자애로운 존재인 것이다. 아버지가 자신의 세계에서 부재할 때, 어머니는 모든 것이 부재하던 그 희멀건 공간에 색을 칠하고 생기를 부여하였다. 그에게서 어머니는 생명을 부여하고, 재건하는 사람이다. <줄리에타>에서 약한 어머니를 상정한 것은, 그 고충을 개인적인 거리에서 절절히 이해한 결과물에 다름 아닐 것이다. 또한 그에게서 욕망은 자유롭다. 욕망의 성별이 자유로운 페데리코의 존재, 그것은 이질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존재인 것이다. 알모도바르가 투영된 이 같은 관계망들은 그간에 펼쳐낸 그의 작품세계에서 성에 대한 바를 읽어내게 해준다.
*지금 여기의 청년들
그래서 알모도바르는 70년대 말 민주화 이후의 시대 그 자체를 상징하는 감독이지만, 그것을 가득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은 방종한 아버지의 영향이 아니라, 언제나 곁에서 빛으로 인도하려던 어머니의 노력과도 관계될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시대들이 겹겹이 포착된다. 어머니의 세계는 갈리시아, 그리고 유령이라는 비물질과 물질적 세계가 나뉘지 않는 세계이다. 어머니는 살바도르의 집에서 투병하는 자신의 말년에, 그 최후는 고향에서 마주하고 싶다고 말한다. 허나 그 열망은 불발된다. 어쩌면 시대가 변화했기 때문이라. 알모도바르가 상징하는 그 시대로 말이다. 70년대 이후의 마드리드, 그리고 그것을 담아낸 그의 영화는 한때 특정 시대 그 자체를 지칭했다. 어쩌면 살바도르의 우울은 이 같은 시대의 변화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 투병하던 어머니처럼 자신도 척추 및 목의 혹으로 고통 받고 있는 실정이 아니던가. 또한 앞서 언급한 것처럼 더 이상 젊은 날의 살바도르와 페데리코가 아니다. 지금의 시대는 이제 살바도르의 아들들이 살아가는 시대인 것이다. 자신들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바도르는 욕망을 느끼고, 이에 삶의 의욕을 느낀다. 그리고 페데리코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개인의 존재를 인내하던 시대는, 그것으로부터 급격하게 해방된 시대로 향하였고, 지금의 시대는 해방의 시대로부터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제 살바도르는 완전히 일어선다. 그리고 알베르토의 뒤에 숨지도 않으며, 과거의 존재인 에두아르드를 찾아가지도 않는다. 폐쇄적인 특정 공간에 갇혀있던 살바도르는 서서히 세상 바깥으로 나온다. 마치 무채색처럼 음험하게 수영장과 자신의 집에만 놓여 위축되던 그는, 알베르토의 집, 이윽고 강도들이 양지를 활보하는 빈민가의 풍광과 페데리코, 에두아르드의 흔적을 향해 원색처럼 팽창해나가며, 그는 서서히 세계 속에 우뚝 선다.
*정리

그렇게 세계, 시대 속에서 그가 아직 유효함을, 살아있음을 느낀다. 이에 살바도르는 자전적인 영화를, 페넬로페 크루즈와 그의 어머니가 분간되지 않는 자신의 <페인 앤 글로리>를 찍는다.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서 용기가 필요한 시대이기에, 알모도바르는 여전히 시대의 아들로서 영화를 연출한다. 과거와의 지평 속에서 현재의 자신을 굽어보고 그것을 고해처럼 스크린으로 옮겨내며, 영화 자체가 시대에 있어 하나의 용기가 된다. 그렇게 민주화를 만끽하던 시대의 아들은, 이제 늙은 자신의 시간을 영화에 반영한다. 그것은 그의 역사를 함축함과 동시에, 그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까지도 투영된다. 언제나 영광과 고통이 한 쌍이거나, 교차되는 삶과, 세계를 알모도바르는 스크린에 옮겨낸다. 그렇게 세계를 담아내는 영화는 살바도르가 알베르토에게 전한 '눈물을 참으려고 애쓰는 배우'와도 같다. 대상의 온당 직접적인 재현이 아니라, 미적 속성을 논하는 ‘맛’과 같은 예술 고유의 승화를 통해 말이다. 그 승화는 감각적인 연출과 더불어, 특히 편집을 통해 시간을 뒤죽박죽 뒤섞는 모호한 연출을 통해서 이뤄진다. 그렇게 세계를 옮겨낸 영화는 그 대상의 속성과 닮아있음과 더불어, 이제는 관객에게 '팩션'으로서 질문한다. 나는 알모도바르의 그림자인가, 고유하고 독립적은 붉은 영화인가. 우리는 쉬이 답할 수 없을 것이다. 알모도바르가 투영된 살바도르를 연기하는 반데라스 또한, 알베르토와 엮어있거나 배우 자신이 일부 또한 투영된다. 이에 때때로 모순적인 그 층위는 기묘하게 다만 공존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감각성과 모호함이 예술에 대한 그의 지론이 것이다. 이 같은 자전적인 영화는 알모도바르의 작픔 세계를 더욱 깊이 접근하게 인도한다. 허나 그것은 마치 하네케의 <해피엔드>처럼 반복되는 나열에 의해 지루하고 따분하며, 사람과 예술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잃어버린 결과물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 및 예술세계 자체마저도 대단히 감각적인 연출로 승화시킨다. 또한 형식 그 자체를 삶과 세계에 상응시키며 경탄으로 인도하는 연출의 힘은, 여전한 노련한 감독의 저력을 절절히 느끼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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