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지는 것들의 침묵
비는 모든 떨어지는 것들을 대표한다. 그리고 공기를 적시고 기압을 낮추어 우리의 호흡을 조금 더 편안하게 만든다.
비 내리는 모습은 가시적이지만, 빗방울 하나하나를 기억하기는 어렵다. 비는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며, 땅에 부딪히는 순간 자신의 형체를 잃는다. 그것은 형태를 가졌지만 동시에 완벽하게 형태를 유지할 수 없다. 어쩌면 비는 존재와 소멸 사이를 끊임없이 왕복하는 순환의 물질인지도 모르겠다.
박지나의 작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작가는 물질과 비물질의 관계, 그리고 비가 내리는 순간 발생하는 설명하기 어려운 물리적 사건들에 주목한다. 그의 작업은 명확하게 증명되지는 않지만 우리 삶과 세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흔적들과 증거들을 찾아가는 과정에 가깝다.
그에게 비는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다. 비는 삶의 허무함에 대한 은유이며, 경험과 기억으로부터 형성된 다양한 감정들이 우리 안에 머물렀다가 결국 사라져 가는 방식에 대한 하나의 이미지이자 상징이다. 작가는 비를 통해 존재가 사라지는 과정을 이야기하기보다, 사라짐 그 자체가 남기는 흔적에 주목한다.
물방울이 바닥에 부딪혀 튀어 오르는 형상을 길게 펼쳐놓은 조각 작품은 이러한 작가의 시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물방울은 물질이지만 그 형상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지 못하는 유동적 존재에 가깝다. 순간적으로 증발하고 흩어지며 끊임없이 형태를 바꾼다. 그러나 작가는 이러한 물방울을 촉각적인 물질로 치환한다. 더욱이 떨어지는 순간의 형상을 길게 고정시킴으로써 본래라면 결코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을 하나의 물질로 정지시킨다. 그것은 사라지는 것을 붙잡고자 하는 기억의 의지이며, 허공으로 흩어지는 감정을 현실의 무게로 되돌려 놓는 장치이기도 하다. 순간적으로 생성되고 소멸하는 비는 물질화의 과정을 통해 영속적인 형상으로 전환된다. 이는 존재와 부재, 순간과 영원, 비물질과 물질 사이를 가로지르는 하나의 시각적 경계를 만들어낸다.
흥미로운 것은 작가가 물방울이 떨어지는 바로 그 순간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물방울은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찰나의 상태다.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온전히 도착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도착 직전의 긴장이자 소멸 직전의 시간이다. 작가는 바로 그 시간을 물질로 고정시킴으로써 삶 역시 끊임없이 사라짐을 향해 움직이는 과정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러한 감각은 몸 없는 새의 발에서도 반복된다. 새는 본래 허공을 삶의 기반으로 삼는 존재지만, 전시장에 놓인 새는 몸을 잃은 채 발만 남아 있다. 그것은 날 수 없는 새이며, 동시에 여전히 땅을 딛고 있는 존재다. 상실 이후에도 삶은 지속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조용한 증언이다.
종이 뭉치로 이루어진 설치 역시 같은 맥락을 공유한다. 나란히 걸려 있는 종이들은 쉽게 자신의 내용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 안에는 이미지가 존재하지만 관람자는 그것을 온전히 확인할 수 없다. 썼다가 지운 흔적들, 이해되지 못한 문장들, 끝내 전달되지 못한 말들은 종이 위에 남겨진 채 서로를 감추며 침묵의 구조를 형성한다. 이는 언어 이전의 감정이며, 말로 환원되지 못한 기억을 의미한다.
메마른 땅은 또 다른 형태의 증언이다. 그것은 비가 오지 않는 풍경이 아니라, 비가 되었든 기억이 되었든 이미 무언가가 휩쓸고 지나간 이후의 풍경이다. 무엇인가가 씻겨 내려가고 남은 자리, 삶의 격렬한 시간이 통과한 이후에 드러나는 표면이다.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지나간 시간의 흔적이 켜켜이 축적되어 있다.
비는 떨어져 흩어지고, 말은 침묵 속으로 사라지며, 기억 역시 언젠가 희미해진다. 그러나 작가는 그 사라짐의 과정 속에서 오히려 지워지지 않는 흔적들을 발견한다. 물질로 고정된 빗방울, 몸 없는 새의 발, 읽히지 않는 종이, 메마른 땅은 모두 그러한 흔적의 증인들이다.
작가는 사라지는 것들이 남기고 간 침묵 앞에 우리를 세운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삶의 가장 연약한 순간들이 얼마나 단단하게 존재해 왔는지를 마주하게 된다. 어쩌면 작가는 사라진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진 이후에도 끝내 남아 있는 것들을 증언하고 있는지도 모를일이다.
글. 임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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