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R 연극이 있다고?
이제 가상현실은 일반 대중문화 속에 들어오기가 쉽지 않아졌다. 이미 2018년도에 VR 관련 기업들은 이를 눈치채고 노선을 변경하거나 폐업하거나 확장해 새로운 전환을 맞이했다. 당시 SK텔레콤에 근무 중이던 나는, 많은 사람이 VR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을 직접 두 눈으로 봐오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가상현실의 킬러컨텐츠는 ‘게임’이라는 판정을 받은 게 2018년도인데, 2019년쯤 돼서 VR연극을 만들어보겠다는 얘기가 들리기 시작했다.
VR연극 마지막 순간(LES FALAISES DE V., 2019년)
출처 : https://www.lafermedubuisson.com/les-falaises-de-v
이미 2019년, 외국에서는 VR연극이 촬영되었다. 반응이 얼마나 좋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관련 동영상은 2019년 기준으로 조회수는 200회 내외다. VR연극 마지막 순간은, 조금 특이점이 있는 것이 관객들이 특정 공간에 방문한다는 것이다.
VR연극 마지막 순간을 보기 위한 공간
출처 : https://www.lafermedubuisson.com/les-falaises-de-v
이렇게 관객은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조금 더 몰입감을 주는 방식의 VR연극을 진행했다. 사실 이 연극은 (어쩌면) 최초의 VR 연극 시도이면서도, 엄밀히 말하면 공간과 컨텐츠를 연결하는 실감콘텐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실감나는 연극을 위해 VR 연극을 만든다니...
문제는 ‘실감나는 연극’을 위해 VR 연극을 만든다는 것이다. VR을 잘 아는 사람이나, 나같이 IT업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웃고 말 일이다. 장난으로 하는 소리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물론 위의 극처럼 실감콘텐츠 성격의 공연을 만든다면 장난은 아닐 수 있지만, 설령 그렇게 한다고 해도 VR에 대해 너무 모르고 접근하는 것이 명백하다.
우리나라에도 VR연극이 존재한다. 어떤 작품을 집어 말하기엔 그들의 노력이 안타까워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그 연극들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대부분 이렇다. ‘실감나는 연극 관람, VR 연극, 예술과 기술의 융합’
내가 찾아본 VR 연극들은 모두 360도로 찍힌 영상일 뿐이다. 실감나는 연극이 아니라 그냥 360도 영상인 것이다. 오히려 실감나는 연극은 직접 극장에서 연극을 보는 것이 더 실감날텐데, VR이 가상현실이라는 이유로 그저 실감나는 연극이라고 홍보하고, 그것이 창작지원을 받아 진행된 점이 아쉬운 부분이다.
360도 영상을 촬영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카메라로 영상을 찍는 방식과 같은데, 360도 혹은 VR기기에 호환성과 맞춰 영상을 찍는 과정이 전부다. 그럼 이건 예술과 기술의 융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장르가 다른 영화나 드라마처럼 보여지는 건데, VR기기가 없으면 제대로 볼 수도 없으니 이건 도대체 무엇일까.
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작품 ‘생의 반려: 後’(극단 다힘)
출처 : https://www.instagram.com/playdahim/
그럼 AR연극은 어떨까? AR연극은 현존하는 VR연극보다 비용이 배로 많이 들어간다. AR은 데이터를 보여주기 위한 기기도 필수고, 그 위치값에 맞춰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공연 때 상주해야하는 스텝도 기술자여야만 한다. 더욱이 지금처럼 해왔던 360도 영상으로 찍은 공연을 VR 공연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VR, 가상현실이 아니라 360도 카메라로 녹화된 녹화영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VR로 볼 수 있다고 VR예술이 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실감나는 공연은 작디작은 소극장에 가서 배우들의 호흡을 느끼는 것만큼 확실히 실감나는 공연은 없다.
VR에 대해 놓치는 것들
설령, 너무나 완벽한 기획력으로 360도 연극이 완성되었다고 하자. 연극 시간을 100분으로 가정했을 때, 관람객이 아닌 작품을 만든 해당 관계자 중 몇 명이나 VR을 100분간 써보았을지 생각하게 된다. 정말 필수로 봐야 하는 사람을 제외하고, 100분을 그대로 VR을 착용해 작품을 감상한 관계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VR 개발자들도 개발할 때 외에 VR을 그렇게 오래 쓰지 못한다. 눈의 피로감과 VR의 무게, VR베터리와 발열 등으로 그저 보기만 하는 것도 쉽지 않다. 더욱이 실감나는 콘텐츠를 위해서는 VR의 기능이 더 좋아야 하고, 비용도 그만큼 비싸다. 실감나게 촬영했다고 한들, 관람객에게 실감나는 결론이 다다르는 게 아니다. 관람객 또한 그 수준에 맞는 기기 사양이 있어야만 그 목적이 다다를 수 있다.
더욱 안타까운 것 중 하나는, VR기기에 대한 주의사항을 많이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대학원 논문 준비 당시 삼성 관계자에게 질의한 내용에 대해 답을 받은 내용
이외에도 임산부, 양안시 이상자, 노인, 특정 장애인, 심장박동기 등 전자기기를 활용 중인 환자 등은 VR기기 사용을 제한하고 있다. 삼성 Gear VR뿐만 아니라 Oculus(現 META), HTC VIVE 등 주요 VR기기 제조사들은 나이 제한을 두고 있고, 주의사항이 마련되어 있다.
이와 같은 주의사항에도 불구하고 학교, 논문 등 다양한 곳에서 이 사실을 모른 채 활용만 하고자 하는 모습이 보인다. VR을 활용한 아동 지능 발달이라든지, VR 수업이라든지, VR과 청소년을 연결하는 논문을 보면, 이처럼 너무 중요한 부분을 놓친 채 진행이 되는 것 같다. VR 연극도 마찬가지다. 공연을 소개하는 화려한 수식어는 많지만 이에 대한 주의사항이나 가장 기본적인 나이 제한은 없으니, 아이러니할 뿐이다.
진보는 양날의 칼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진보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양날의 칼이 뭔지 알고 있다. 새로운 기술과 예술을 융합하고자 한다면, 그 기술이 무엇인지 알고 그 예술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진보를 하든, 양날이 칼이 되든 하기 때문이다. 더 새롭고 색다른 예술이 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이처럼 무의히마고 허무하게 사라지는 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예술에게도, 관람객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