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영화 <애프터썬>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타인에 대한 이해는 가능할까
타인을 이해하는 일은 가능할까. 상대가 진심을 털어놓지 않는 한 추측만 할 수 있다. 설령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대도 언어의 불완전성으로 완벽한 이해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매번 오해와 이해 사이 어딘가를 더듬거린다. 이해에 있어서는 노력만 존재하는지 모른다. 이해해 보려 노력하고 또 노력해 보는 것. 이해란 영원히 도착할 수 없는 목적지이거나 채울 수 없는 구멍이다.
잠시나마 목적지에 닿거나 가없는 구멍이 채워진 듯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다가, 음악을 듣고 그림을 보다가, 말로 형언할 수 없던 감정이 어루만져지는 경험을 한다. 내 마음을 적확하게 옮겨 놓은 문장을 만났을 때, 어떤 장면과 선율에 홀연히 사로잡히고 말았을 때, 내면의 빈 구석이 채워지는 기분을 느낀다.
우리는 예술 작품을 통해 미지의 세계를 마주하고 감응하려는 노력으로 타인과 세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힌다. 현실에서 경험할 수 없는 서사와 장면, 이미지와 음악으로 완전한 공감을 체험하면서. 그런 찰나를 바라 영화관을 가고 미술관으로 향한다. 어쩌면 우리는 예술에 기대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지속하는지 모른다.
지나간 시간을 되살리려는 노력
샬롯 웰스 감독의 영화 <애프터썬>에는 어린 시절 휴가지에서 찍은 영상을 보며 잊혔던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내는 여성(실리아 롤슨-홀, 성인 ‘소피’ 역)이 등장한다. 마냥 즐거웠다고 생각했는데 20년이 지나 보니 미세한 균열이 보인다. 그 시절 미처 몰랐던 감정의 물결이 그녀를 덮친다.
11살의 소피(프랭키 코리오, 어린 ‘소피’ 역)는 떨어져 사는 아빠 캘럼(폴 메스칼)과 튀르키예로 여름휴가 여행을 왔다. 31살 생일을 앞둔 캘럼은 소피의 오빠라는 오해를 사기도 한다. 단체 관광버스로 유적지를 돌고 호텔에서 수영을 하는 게 고작인 휴가는 특별한 사건 없이 흘러간다.

소피의 모습을 비디오카메라로 담고 선크림을 발라주는 캘럼은 다정다감한 아빠지만 드문 드문 클로즈업되는 얼굴에는 우울과 불안의 흔적이 있다. 그가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영화는 몇몇 상황에서 보여준다. 어린 소피도 그걸 감지했을까. 여행지에서의 나른한 일상 사이로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덧대인다.
<애프터썬>은 휴가지 영상 사이로 현재 소피의 모습을 인서트로 넣어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킨다. 인서트 장면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어두운 공간에 정면을 응시한 채 서 있는 소피가 있다. 그녀의 얼굴은 왠지 공허해 보인다. 깜빡거리는 조명으로 분간하기 어려운 공간에 31살의 캘럼도 보인다. 장면이 바뀔수록, 그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몸부림친다.
우리는 뒤늦게 짐작할 수 있다. 여름휴가 이후 소피는 아빠를 다시 만나지 못했고 아빠에 대한 혼란스러운 감정을 안고 성인이 되었다는 걸. 그녀는 11살 튀르키예 여행의 기억을 되짚으며 31살의 아빠에 대한 실마리를 찾고 있다.
기억하려는 시도로 사랑은 지속된다
영화는 소피가 아빠를 찍는 비디오 영상으로 시작된다. 소피가 묻는다. “11살에 31살이 되면 어떨 거라 생각했어? 11살의 아빠는 어땠어?” 캘럼은 답을 피하며 비디오를 끄고는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며 소피를 웃게 한다. 캘럼은 여행 내내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억누르며 소피에게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주려 애쓴다.
“정말 사랑해 소피. 그건 절대 잊지 마.” -캘럼
삶은 기억이다. 기억하려는 노력은 생(生)을 사랑하는 행위이며 마찬가지로 대상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사랑하는 대상을 기억하고 싶어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기듯. 휴가지에서 카메라로 영상을 찍는 캘럼은 소피를 기억하기 위해, 사랑하기 위해 노력한다. 자신이 느끼는 압박감과 별개로 그는 진심으로 소피를 사랑하고 그 마음만은 딸에게 전하고 싶어 한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성인이 된 소피가 어둠 속에서 어린 시절의 아빠와 재회하는 장면은, 기적처럼 우리 앞에 잠시, 나타난다. 그때 흐르는 퀸의 ‘Under pressure’는 영화에 폭발적인 힘을 실어주며 서사와 이미지에 완벽하게 결합하고 곡의 가사는 정확하게 소피와 캘럼의 상황을 암시한다.
“우리는 왜, 사랑을, 사랑을, 사랑을, 사랑을 줄 수 없을까.”
‘우리는 왜 사랑을 줄 수 없을까.’ 반복되는 후렴구 안에서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던 캘럼과 그 결핍을 떠안은 소피가 오버랩된다. 서로를 사랑했더라도 원하는 사랑을 온전히 채워줄 수 없는 한계 앞에 그들이 있었음을 일깨우며. 이는 모순적으로 서로에게 사랑 밖에 줄 수 없음을 강조하기도 한다. 사랑은 늘 부족하고 미흡하더라도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그리고 내어줄 수 있는 건 사랑 밖에 없다고, 말이다.
찰나의 순간, 31살의 소피는 31살의 캘럼에게 닿는다. 불가능함의 가능성을 실현하고자 애쓰는 이 장면을 위해, 긴 시간 오해와 이해를 더듬어 왔다는 듯. 지나간 시간을 되살리려는 끈질긴 노력 끝에 영화는 어딘가에 다다른다. 이해에 닿은 듯하다 멀어지고 말더라도 누군가에겐 그 노력과 찰나마저 간절하다고.
부재하는 대상에 대한 이해와 화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이해하려는 시도 밖에 할 수 없고, 소피는 매번 실패할 테지만 어떤 순간에는 이해에 근접한 듯 31살의 아빠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할 것이다. 영화 속 그 찰나의 장면에서처럼. 그러면 사랑하려 애썼던 아빠의 진심만은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솜사탕 같은 기억의 진실이 달콤함만은 아니었음을 깨닫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당신이 견뎠을 삶의 무게를 이해할 것 같고, 우울과 외로움도 납득할 수 있을 때, 더 이상 당신은 여기에 없을지 모른다. 사라진 후에도, 상대가 부재하더라도, 우리는 사랑을 줄 수 있을까.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언지 영화 <애프터썬>은 알려준다. 지나간 시간을 되살리려는 노력, 간신히 이해에 닿아보려는 시도. 기억하려는 시도로 사랑은 지속될지 모른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