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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지 않고 여전히 있는 | ARTLECTURE

눈에 보이지 않고 여전히 있는

-아르코 융복합 예술 페스티벌《땅속 그물 이야기》-

/Art & Preview/
by 박소현이
눈에 보이지 않고 여전히 있는
-아르코 융복합 예술 페스티벌《땅속 그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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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팬더믹 이후 들뢰즈식 ‘되기’,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 와해 등의 키워드가 주요 전시 동향으로 등장한다. 이는 단순히 작업의 개념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그것이 관객에게 보여지는 방식에서도 시각적 주체와 객체를 전복, 혹은 이분법을 와해하는 방향으로도 구현되며 새로운 몸의 감각을 낳는다.

팬더믹 이후 국내 전시 동향에서, 인류세 담론이 다시 대두되고 있다. 브뤼노 라투르는 (Bruno Latour, 1947-)는 그의 저서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에서 인류세를 “근대, 근대성”의 관념에서 탈피하는 인식적 전환의 시작으로 본다. 라투르는 데카르트의 코기토적 인간관을 비판한다. 그는 주체와 객체,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적 구분에 반대하며 “행위자- 연결망 이론”을 주창한다. 이는 인간과 비인간 존재에 위계를 부여하지 않고, 서로 동등한 선상의 행위자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라투르의 논의는 90년대 이미 한차례 큰 화제와 연관된 여러 작업 동향을 이끌어왔다. 그러나 오늘날 국내 여러 전시에 이와 같은 키워드가 대두되는건, 최근 인류가 겪은 코로나의 풍파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눈에 보이지 않은 바이러스로 인해 인간 사회의 모든 교역과 교류가 막히고, 인류의 행동 양상마저 변화시켰다. 이는 시각중심성 하에 보이는 것들을 기반으로 인간 중심적으로 사고했던 인류에게 보이지 않는 것들, 그러나 여전히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사진 출처: 아르코 미술관 홈페이지)


 

이러한 흐름에서 그간의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탈피하고, 하이브리드, 비인간 되기 등의 키워드가 전시에 대두되고 있다. 아르코 미술관에서는 8월 11일 부터 10월 23일 까지 <땅 속 그물 이야기> 전시를 진행하고 있다. 전시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본 전시는 수직적 위계가 아닌 그물망적 네트워트, 눈에 보이지 않는 땅속의 균사체를 빗대어 현 인류가 지향해야 할 방향성을 은유한다. 



이영주, <환영>, 2022, 도자 가면들, 변형된 가상현실 헤드셋, 금속 스탠드, 의자, VR 비디오. 3분 50초. 



〈환영〉에서 작가는 남아메리카의 전통 치유사를 통해 경험했던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미지를 땅/뿌리, 도마뱀, 표범, 까마귀를 상징하는 4개의 도자 가면들로 표현한다. 다섯 번째 가면은 멸종 위기에 처한 사향노루를 가상현실 헤드셋으로 변형한 가면으로, 지구상에 존재했던 수많은 동식물들의 마지막 순간들을 대변해 보여준다. VR 영상을 통해 사향노루의 마지막 순간을 경험한 관객들은 멸종 위기에 처한 종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한 제의식에 동참한다.(사진, 글 출처: 아르코미술관 홈페이지)


1층 제 1전시실의 이영주 작가의 <환영>은 도자 설치와 VR비디오로 구성된다. 관객들은 동물 머리을 형상화한, 도자 가면들로 둘러쌓인 자리에 앉아, 사슴 머리 형상의 조형물이 부착된 VR 안경을 쓰고 작품을 감상하게 된다. 처음 VR을 감상할때는, 보는 주체로서 작품을 감상하고자 하지만, 이내 영상 속에서 날 응시하고 쫓아오는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끝내 영상 말미에 이르러, 인간으로 작품을 감상하는게 아닌, 멸종위기의 사향 노루의 자리에 놓임을 알게 된다. 

 

한 시점에서 구현되는 평면적 영상이 아닌, VR 영상은 기존 원근법을 해체하며 비인간 되기를 보다 효과적으로 체감하게 한다. 또 동시에 작품을 관람하는 관람자를 하나의 미술관에 전시된 오브제로 전복한다.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자는, 동물 가면 가운데에 앉아, 사슴 가면 형상을 한 VR 안경을 쓴채 이리저리 두리번 거린다. 그리고 이 모습은 사냥꾼에게 쫓기는 안쓰러운 사향노루 같아 보이기도 하며,  하늘을 보고 두리번거리며 제의를 수행하는 제사장 같기도 하다. 즉 본 작품은 관람하는 동시에, 나 자신이 하나의 전시물로 전락하게 되는 구조를 취한다. 


작품을 감상한 후 필자가 느낀 이유 모를 불쾌는 어디서 기인한 걸까. 코기토적 인간 실존이 와해되고, 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감각이 아닌 나를 보는 상대의 ‘응시’를 느끼게 되는 데서 기인할까. 혹은 VR 가면을 쓴채 두리번 거리는 우스꽝스러운 전시물로 전락한 내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일까. 

 

팬더믹 이후 들뢰즈식 ‘되기’,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 와해 등의 키워드가 주요 전시 동향으로 등장한다. 이는 단순히 작업의 개념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그것이 관객에게 보여지는 방식에서도 시각적 주체와 객체를 전복, 혹은 이분법을 와해하는 방향으로도 구현되며 새로운 몸의 감각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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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박소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