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신에게 정의는 무엇인가요?
서울시극단의 <정의의 사람들>은 주인공인 ‘칼리아예프’를 통해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재창작을 통해 재구성된 <정의의 사람들>은 1905년 러시아 혁명부터 지금의 광화문 광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의를 가진 정의의 사람들이 무대에 등장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정의와 고뇌하는 ‘칼리아예프’를 바라보며 우리는 ‘정의’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다.
< 정의의 사람들 포스터, 출처 : 서울시극단>
확고한 신념이 흔들리고 다양한 정의가 나타나다
서울시극단의 <정의의 사람들>은 원작과는 달리 처음을 ‘칼리아예프’의 감옥 독방에서 시작한다. 주인공인 그는 대공을 암살한 것에 확고한 정의가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지속되는 환영, 그리고 대공비와 스쿠라토프와 대화를 하며 자신의 정의에 의문을 가지고 흔들리게 되는데 이것을 무대 위의 ‘감옥 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연극의 첫 장면에서 ‘감옥 문’은 완전한 형태로 ‘칼리아예프’를 완전히 가두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가 가진 정의가 뚜렷함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주인공이 흔들림을 거듭하면서 ‘감옥 문’ 또한 조금씩 부서진다. 이러한 무대 장치는 ‘칼리아예프’의 현 상황을 관객이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는 장치이다. 나아가 ‘감옥 문’이 무너지면서 시공간의 경계 또한 같이 흐려지고 여러 시대의 이야기를 보게 되고 결국 ‘감옥 문’ 완전히 없어진 이후에는 ‘칼리아예프’는 더 이상 죄수복을 입은 러시아 혁명 때의 시민이 아닌 우리가 광화문에서 보았을 수 있는 이 시대의 청년처럼 보인다.
‘감옥 문’과 비슷한 무대 장치 중 하나는 ‘나무’이다. ‘나무’는 첫 무대에는 많이 존재하지 않지만 환영을 통해 보이는 다른 인물들 각자의 정의를 확인함에 따라 나무의 개수가 점점 늘어나고 연극의 마지막 즈음에는 수많은 나무들이 무대 위에 세워지고 그만큼 많은 정의를 연극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정의의 사람들 연극 중, 출처 : 서울시극단>
환영에 빠지고 깨어나며
‘칼리아예프’가 환영을 보는 장면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정의의 사람들>은 독특한 무대장치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인 암전상태에서 무대전환이 되는 것이 아닌 연기와 약간의 빛을 통해 무대자체를 굉장히 흐릿한 상태로 만들어 관객들이 무대를 볼 때 마치 환영을 보는 것처럼 구성하였다. 즉 무대 전환이 이루어질 때마다 환영을 보는 것과 같은 이 무대장치를 통해 관객들도 ‘칼리아예프’의 고뇌에 같이 빠져들게 함과 동시에 몽환적인 분위기로 연극의 시공간을 흐리고 있다.
연극 중간 중간에는 유머스러운 콩트가 구성되어 있다. 언뜻 보면 굉장히 뜬금없어 보일 수 있지만 이 콩트를 통해 현재에 대한 환기를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이야기가 과거의 한정된 것, 혹은 작품 속의 이야기에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닌 현시대의 우리에게까지 닿아 있다는 것을 알리고자 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 정의의 사람들 연극 중, 출처 : 서울시극단>
시공간을 넘어 지금 우리가 보는 정의란?
서울시극단에 의해 재창작된 <정의의 사람들>은 1905년의 러시아 혁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일제강점기에 도시락 폭탄을 던졌던 독립운동가, 80년대 노동운동가, 21세기 광화문 광장의 촛불, 페미니스트, 동성애자, 이슬람 자살 폭탄 테러범까지 시공간을 넘어 오늘에 이르는 다양한 정의를 보여준다. 그리고 연극의 마지막에 와서는 각자의 정의를 외치느라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조차 들리지 않는다. 이 마지막 장면을 통해 정의란 마치 저마다 이야기하는 정의란 것은 결국 남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곧 자신들만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시 ‘정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정의란 대가가 요구되는가? 개인의 이윤 혹은 자신만을 위한 것일까? 대의라는 것이 정말 존재할 수 있을까? 수많은 질문이 남았다. 연극을 보는 내내 ‘칼리아예프’와 같이 정의에 대해, 신념에 대해 같이 흔들리고 고민했음에도, 아니, 연극이 끝나고 시간이 지난 지금도 정의란 아직 꿈속에 빠진 것처럼 흐릿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