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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멂과 맛봄, 그리고 진정성 | ARTLECTURE

눈멂과 맛봄, 그리고 진정성

-서동욱의 개인전 <그림의 맛>(2020.11.03-12.06, 원앤제이 갤러리) 김동기의 개인전 <나무들_서울>-

/Insight/
by 하도끼
눈멂과 맛봄, 그리고 진정성
-서동욱의 개인전 <그림의 맛>(2020.11.03-12.06, 원앤제이 갤러리) 김동기의 개인전 <나무들_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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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눈멂과 맛봄, 그리고 진정성 서동욱의 개인전 <그림의 맛>(2020.11.03-12.06, 원앤제이 갤러리) 김동기의 개인전 <나무들_서울>(2020.12.03-12.16, 갤러리 조선)
현시대는 이미지 남발의 시대다. 이미지의 홍수는 이미지 소비를 부추기고, 이내 우리의 시야와 주체성을 포획한다. 무엇을 보아야 하고, 무엇을 믿어야 하나. 혼돈을 부추기는 이 상황 속에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또 그 질문은 동시대 미술의 흐름 속에서 함께 탐구되어야 한다. 예술이 과연 닻 내리기를 수행할 수 있을까? 같은 시기에 마주했던 전시들 속에서 이미지 진정성의 궤적들을 쫓아볼 수 있었다.

현시대는 이미지 남발의 시대다. 이미지의 홍수는 이미지 소비를 부추기고, 이내 우리의 시야와 주체성을 포획한다. 무엇을 보아야 하고, 무엇을 믿어야 하나. 우리는 매 순간 수많은 이미지들과의 씨름을 거듭하고 있다. 왜 이와 같은 혼돈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일까? 혼돈의 끝에는 보는 행위와 눈 그리고 앎이라는 불완전한 체계들의 강력한 결속이 자리하고 있다.

불완전한 지각 체계와 관련된 문제는 시각예술의 역사 속 매우 오래된 질문 중에 하나다. (누군가는 벌써부터 진부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변화하는 시대, 역사와 함께 늘 끌어안아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주지하다시피 이미지는 역사를 거듭하며 우리를 지속적으로 속여 왔고, 우리는 그 속에서 쉬이 규정하고, 속단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혼돈을 부추기는 이 상황 속에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또 그 질문은 동시대 미술의 흐름 속에서 함께 탐구되어야 한다. 예술이 과연 닻 내리기를 수행할 수 있을까? 같은 시기에 마주했던 전시들 속에서 이미지 진정성의 궤적들을 쫓아볼 수 있었다.

 



 

그림을 맛본다는 것

 

서동욱은 다원주의 시대 속에서도 초상화를 고수한다. 그럼에도 그 형태는 전형적 초상화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다. 거대한 초상화들은 고정된 형상 속에서 운동성을 획득한 채 프레임의 확장을 부추긴다.

잡지를 뒤적이며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는 듯한 <CH>(2020)의 인물이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다. 화폭 속에는 인물 외로 수많은 대상이 너저분하게 자리하고 있어 시선을 분산시켰다. 그 속에서 제시된 단서는 'CH'라는 다소 모호한 제목뿐이며, 무엇을 보라는 직접적인 지시는 없었다. 작업실인 것처럼 보이는 인물의 뒷배경 역시 매우 디테일하게 처리되어 있기 때문에 시선을 더욱 흐트러뜨렸다. 하지만 구성에 속아 무심코 지나쳐서는 안 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바로 인물의 안경이었다.

안경 속에는 어떤 움직임이 암시되고 있었다. 안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찰랑이는 빛이 투과되고 있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그 빛을 통해 인물이 응시하는 대상을 추정해볼 수 있다. 아마도 빛을 내뿜고 있는 TV이거나 창문일 것이다. 인물이 뒤적이고 있는 잡지의 페이지들과 안경 속에 찰랑이는 빛. 그 운동성을 인지한 순간 회화라는 고정된 틀은 균열을 일으킨다. 이제 의식은 가득 찬 프레임 내부가 아닌 프레임 외부의 환경을 추정하는데 몰두하게 된다. 인물이 프레임 바깥 영역으로 우리의 인식체계를 이동시킨 것이다.

 



 

반대편에는 <SH>(2020)의 작업이 무언의 불안감을 발산하고 있다. 한때 유행했던 옥색의 주방가구와 오래된 듯한 천장 조명은 냉장고에 부착된 몇 개의 포스터들과 배치되고 있다. 오래된 것들 속에서 발견된 새로움의 흔적들. 이 작업 역시도 시선을 사로잡는 요소들은 곳곳에 배치돼 있다.

하지만 <SH>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이루고 있는 것은 인물의 사소한 동작들에 있다. 중앙에 위치한 인물은 소매를 끌어내리고 있고, 발가락은 잔뜩 웅크리고 있다. 잔뜩 긴장한 듯한 포즈와 표정, 그것을 인지한 순간 우리의 시선은 인물로 고정되며 인물의 심리상태를 읽어내는데 몰두하게 된다. <CH>와 마찬가지로 <SH> 역시 시선을 프레임 외부로 유도한다. 인물의 작은 동작들과 표정을 통해 단서를 찾고, 그 심리를 읽어내는 과정은 관람자의 상상의 영역인 프레임 바깥에서 이루어진다.

서동욱의 초상화는 관습적인 초상화와는 차이가 있다. 제작 과정에서부터 관례를 벗어난다. 그는 영화적 연출과 사진 촬영을 통해 결과물에 도달한다. 최종적인 결과물은 초상화 양식으로 단일하게 제시되지만 그 과정 속에서 다양한 매체들을 거치며 실재와는 더욱 멀어지게 된다. 먼저 연출된 상황이 사진으로 고정되면서 멀어지고, 그 사진이 회화로 구현되면서 더욱 멀어진다.

초상화 속 인물이 누구이고,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인물의 외관과 인물이 처한 상황에 대해 작가는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지, 또 그것을 어떻게 제시하고 있는지에 있다.

궁극적으로 서동욱의 작업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초상화라는 장르의 프레임에서 눈멀어야 한다. 초상화라는 단어의 굴레와 고정관념 속에서 이탈해야만 발견할 수 있는 지점이 생긴다. 사실적인 재현과 초상화라는 프레임에 갇힌다면 그림의 ''에 접근할 수 없다. 맛은 눈을 통해 접근하는 것이 아니다. 음미하기 위해서는 눈을 감아야 한다. 철저하게 시각적인 초상화라는 범주의 한계를 벗어나 그림 속 내재되어 있는 수많은 가능성들을 들여다봐야 '진정한' 맛을 음미할 수 있다.

 



 

예술과 진정성

 

서동욱의 작업을 경유하며, '보는 것'에서 벗어나 '맛보는 것'의 가치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더 심층적인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맛보는 것의 가치, 그 가치는 무엇을 위한 가치인가? 이 대목에서 진정성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보고자 한다. 옥스퍼드 사전에 의하면 '진정성(authenticity)''최초로 만들어진 것(original)', '고유한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 하지만 진정성은 상업적이며 외적인 가치에 매몰되지 않은, 충실한 지각을 담은 예술작품을 칭할 때도 사용된다. 이 용어가 예술의 영역에 정립된 시기는 18세기 낭만주의 시기로 추정된다.

오늘날, 원본 없는 복제품들과 모사품들이 가득 찬 시대에 진정성이라는 가치는 시대착오적인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가끔은 시대적인 흐름과 다량의 이미지들 속에서도 진정성을 찾아 정박하고 싶다. 그 갈망 속에서 김동기의 판화를 마주했다.

김동기는 재건축 아파트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나무들이 뽑히고 잘리는 순간을 지켜봤다. 나무가 버텨온 시간들은 한순간에 무색해졌다. 김동기는 대형 목판을 세워 날카롭게 음각하며 나무들을 시각화하고자 했다.

일상적인 조경 중 하나였던 나무는 또 다른 나무(목판화)로 옮겨지며, 영구적으로 새겨진다. 철거를 앞둔 하강의 운명을 지닌 나무들은 전시장에 설치됨에 따라 다시 상승한다. 그 과정에서 소멸의 대상은 무수한 복제가 가능한 대상으로 승격한다.

김동기의 진정성은 나뭇잎 하나하나를 파내면서 더욱 짙어진다. 그 진정성은 노동과도 함께한다. 대형 목판을 상처 내는 일. 그것은 힘을 조절하며 깊이를 달리해야 하고 빛이 되어야 할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파내어야만 한다. 드러내기 위해 상처를 내야만 하는 행위, 행위와 함께 축적된 시간들 속에서 진정성의 가치가 피어난다.

관람자들은 하찮은 존재이자 소멸의 대상이었던 나무들 앞에서 조심스러워진다. 나무들의 운명을 바라보며 사라질 것들에 대해 숙고하고, 웅장하며 풍성한 나무의 비극적인 운명을 추모하게 된다. 이미지는 노동 행위와 함께 힘을 부여받았다. 결과적으로 힘을 획득한 이미지들은 무심코 지나쳤던 대상들에 대한 지위를 치환한다.

 

이미지 홍수 속 닻 내리기

 

서동욱과 김동기는 무심코 흘러가버리는 이미지들 속에서 닻 내리기를 유도한다. 이들의 작업 속에는 어떠한 장치가 내재돼 있다. 이는 동일성의 원리 속으로 포섭되지 않도록 유도하는 장치다. 단일한 이미지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도록 하는 그 무엇, 그 무엇은 이미지가 생성된 역사를 추적하게 만든다. 또 이들의 작업은 대상을 제시하되 이미지 바깥세상으로 우리를 인도한다는 점에서 틈과 균열로도 기능한다.

서동욱은 시각의 세계에서 벗어나야만 보이는 ''에 대해 이야기했고, 김동기는 사소하고, 일상적인 대상을 치환해 승격시켰다. 관람자는 각기 다른 방식 속에서 이미지를 대하는 다양한 방식을 경험할 수 있다. 무심코 스쳐가는 수많은 이미지들이 사실 저마다의 배경과 과정을 지니고 있다는 것. 그럼에도 방대한 양과 가속화된 속도에 정신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라는 것. 그것마저 잊고 살아왔던 봄의 방식과 앎의 태도들을 돌아보게 만든다. 거리를 거닐며 마주했던 두 전시는 이미지를 바라보는 관람자의 시선에 질문을 던진다. 보는 행위 못지않게 눈머는 과정이 필요하며, 스쳐 지나가는 것들에 진정성의 가치를 대입해보아야 한다는 것에 도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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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하도끼_예술학을 전공한 문화부기자. 동일 언어에 포섭되지 않기 위해 미술과 문학을 가까이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