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할게. 누군가를, 태어나게 해 달라고 하지도 않은 누군가를 세상에 내보낸다는 게 나한테는 늘 끔찍해 보였다.” -밀란 쿤데라-
어머니와 딸, 닮았지만 또한 다른 두 여인의 삶은 결코 같을 수 없다. 어머니에게는 아버지와 함께 어찌 됐든 자신의 소생으로서 딸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녀는 오직 자신만 바라보고 살아갈 수 없다. 그녀는 자신과 딸에게 자아를 분유하여 살아간다. 그리고 나 자신보다도 딸에 대한 책임감에 가득 차, 그녀의 육체에 주체적인 요소란 전무하여 텅 비어버리기도 한다. 어머니가 되기 이전 많은 것을 꿈꾸었을 그녀는 이제 이상향을 바라보지 않는다, 오직 발밑의 현실을 바라본다. 자신이 살아왔던 시대 속에서 여성들에게 부여된 역할, 기대감은 곧 경전이다. 한편 딸은 다르다. 그녀는 부모에 대한 책임이 없다. 책임질 것은 오직 스스로의 인생이다. 그녀가 부모에게 마땅히 인도적으로 감사와 측은지심을 느껴야 하겠지만, 어머니가 딸에게 가져야할 그 필연적인 책임은 딸에게서 느슨하다. 딸은 어머니와 다른 시대를 살아간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고를 딸은 이해할 수 없고, 이는 뒤바뀌어도 마찬가지다. 다른 한편 신체적 차이로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자식에 대한 책임을 불평등하게 더 많이 짊어지곤 한다. 그래서 몇몇 어머니들은 그 불평등한 굴레를 벗어던지고 방종이란 해방을 추구하며,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서고자 한다. 이에 방치된 딸은 어떨까. 부모의 그늘 아래서 하늘을 바라볼 수 있던 다른 딸들과 같을 수 있을까. 오히려 현실적인 어머니들의 옷을 입게 되진 않을까. 그래서 통념적인 모녀에게서 현실과 이상이 서로 간에 교차한다면, 떠나간 어머니와 남게 된 딸에게선 과연 무엇이 교차하게 될까. 이 같은 모녀의 이야기를 박석영 감독이 <바람의 언덕>으로 펼쳐낸다.

2014년 <들꽃>으로 데뷔한 박석영 감독은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연출을 기반으로 줄곧 작품세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그는 <들꽃>이후에 <스틸 플라워>와 <재꽃>을 연이어 발표하며, 꽃 3부작으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확립해나가고 있다. 그는 연출에 있어 핸드 헬드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단순히 리얼리즘의 전형적인 문법으로도 여겨질 여지가 있지만, 꽃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재꽃>에서 주인공이 잠시나마 안착했을 때는 회화적 프레임이 사용되고, 다시금 홀씨처럼 흔들리며 나부낄 때 핸드 헬드가 동원된 점을 보면, 핸드 헬드는 그가 포착하는 인물들의 역경과 풍랑에도 상응할 것이다. 그리고 실제 배우의 이름과 배역의 이름을 일치시켜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흐리게끔 만들어, 특히 현실에 더욱 밀착하고자 시도한다. 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주로 밤에만 움직이며, 방랑자·나그네·떠돌이들의 공간인 터미널이나 항구라는 공간성이 강조된다. 또한 들판이나 아스팔트의 구멍을 뚫고 피어난 이름 모를 꽃들처럼 인물에 대한 정보가 풍부하지 않다. <들꽃>이나 <재꽃>에서 주인공들의 이전 상황은 관객이 상상력을 통해 유추해나가야 했고, 3부작은 이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들꽃>의 결말에서 연대의 가능성을 보이던 인물들이 왜 <스틸 플라워>에서 다시 뿔뿔이 흩어져버렸는지, <재꽃>에서는 왜 시골로 향하는 것인지에 대한 배경은 전무하다. 즉 주인공들에 대한 개별적인 배경은 풍부하지 않지만, 한편 개별성이 제거됨으로써 얻게 된 하층민, 타자들의 동질성이 확보되고, 이를 통해 다수에게 확대될 수 있는 척박한 생존의 투쟁이 강조되곤 한다. 감독은 타인의 손에 의해 내몰리는 매음에 대한 실태나, 뿌리 없음에 더욱 착취당하고 떠돌게 되는 군상들의 비극을 작품 속에 담아낸다. 눈에 띄지 않는 밤에 급박하게 유랑하는 그들은 주로 ‘떠돎’이 강조되고, 안착한다 한들 그 삶은 대단히 불안정하다. 이러한 인물들이 아무리 '엄마!'를 되뇌어도 그녀들은 나타나지 않고, 아버지적 존재들은 폭정을 일삼는다.
그럼에도 주인공들은 탭댄스 구두나 소리 나는 장난감 등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또한 개인들은 군중 속으로 줄곧 스며들며, 어디에도 있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시사한다. 이러한 <들꽃>에서 다시 모인 소녀들, 그리고 <재꽃>에서 함께 나아가는 소녀들의 일대기는, 딸들의 유대라고도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꽃 3부작 이후에 만들어진 <바람의 언덕>은 그 척박한 여정을 버텨내고 딸들이 마주한 엄마와의 상봉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분명 <재꽃>을 끝으로 박석영 감독의 꽃 3부작은 끝이 났다. 하지만 감독은 꽃 3부작을 관통하는 직접적인 유기성과는 거리가 멀지만, 느슨한 방식으로 꽃 3부작과 본 작품을 이어내고 있다. <재꽃>에서 어머니로부터 아버지로 추정되는 이에게 보내지던, 그에게도 버려져 꽃 3부작을 관통하는 주인공 하담에게 도움을 받고 의지하며 묵묵히 길을 걸어 나가던 해금이 다시 한 번 출연한다. 하지만 전작에서 의존하던 소녀는 이제 동생으로 추정되는 소녀를 이끌고 인도하며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양식을 받던 소녀는 이제 영분에게 먹을 것을 베푼다. 박석영 감독의 작품이 늘어감에 따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인공들도 성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는 이름이 달라졌지만 배우 정은경과 김태희도 <재꽃>에 이어서 모자와 유사한 관계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전 작품에서는 혈연관계였다면, 본 작품에서는 양모와 양자의 관계다. 전작에서 엄마의 울타리 아래에 놓이던 철기는 이제 용진이 되어 홀로 서야만 한다. 이렇게 바람은 꽃 3부작과 본 작품을 향해 느슨하게 불어와 양자를 이어내며, 그들의 성장과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인가. 본 작품의 연출도 꽃 3부작으로부터 이어오는 변화를 바람이 가져다준다. <스틸 플라워>와 달리 <재꽃>에서 변모한 고정된 카메라를 필두로 하여 구축한 회화적인 프레임, 그 연출적 기조를 <바람의 언덕>에도 이어온다.
하지만 이 같은 연출로 포착되는 인물들은 이 같은 수동적인 프레임 내에 정적으로만 놓여있고 싶지 않다. 필라테스 강습소라는 역동적이어야 마땅할 공간성은 본 작품의 연출에 의해서인지 어떠한 생기도, 활력도 포착되지 않는다. 인물들은 이 같은 수동적인 연출에 대해 반항을 품는 듯하다.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듯한 인물들의 움직임은 정적인 연출이 갑갑하다는 듯이,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처럼 느껴진다. 영화의 시작도 정적인 연출과는 다소 상반되는 소재라 할 수 있는 여행이다. 한희가 향한 그 공간이 결코 낯선 곳일지 익숙한 곳일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설원은 얼어붙어 있다. 눈이 하얗게 대지를 뒤덮었고, 그 언덕에는 바람도 미약하여 풍력발전기는 미동이 없다. 하지만 이렇게 둔탁하고도 얼어붙은 세상에 움직임이 목격된다. 관객들과 한희가 들을 수 있는 미약하지만 분명 존재하는 바람소리, 그리고 생기 없는 세계에 활기를 부여하는 그녀의 발걸음에 의해 발생하는 뽀득거리는 소리, 영화의 카메라는 비운동성을 띠지만 그 내부에서는 운동감이 목도된다. 꽃 3부작에서 포착되던 떠돎의 공간, 터미널이나 역, 항구는 이제 안착의 장소로 변모한다. 이제는 낯선 곳으로 계획도 없이 떠도는 여정이 아니라, 영분에게는 익숙함과 동시에 낯선 고향으로 회귀하는 여정이다. 다만 그것을 온당 귀환으로만 받아들일 순 없다. 영분에게 태백으로의 회귀는 용기가 필요한 모험이다. 왜냐면 과거에 태백에 머물던 그녀와 지금의 그녀는 결코 같지 않기 때문이다. 방종을 선택하여 떠나가고 누군가의 양모가 된 그녀는, 이제 지난날의 책임을 완수하러 태백에 돌아온 다. 떠나가던 그녀와 돌아오기를 선택한 그녀는, 같은 육신임에도 불구하고 무수한 시간과 바람이 새겨지며 같지만 다른 사람이 된 것이며, 이에 돌아온다는 것도 하나의 낯설고 무서운 여행이 된다.
그렇게 돌아간 고향에서 궁금한 딸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을까. 영분의 눈에서는 꿋꿋하고 밝게 삶을 살아가고 있는 한희의 모습이 비춰진다. 겉으로 보이는 한희와 홀로 놓인 한희는 과연 결코 같을까. 한희는 이따금씩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듯, 비닐봉지를 이용하여 겨우 숨을 내쉰다. 영화의 후반부에 가끔씩 숨쉬기가 버겁다고 말한다. 홀로 버텨나가는 삶의 고됨이 이 같은 호흡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닌가. 또한 번듯하게 필라테스 강습소를 차렸지만, 한편 한희가 돌아가서 쉴 수 있는 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강습소에 놓인 발조차 뻗기에도 벅차 보이는 작은 텐트가 한희의 사적 공간이리라. 사라진 줄 알았던 임시 거주지, 나그네의 공간은 다시금 반복되고, 겉으로 보이지 않는 한희의 이면에는 결핍이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결핍과 고독은 서로가 서로와 함께함에 극복해나간다. 오랜 세월을 타향에서 살아오다 돌아온 영분과, 경상도에서 태어나서 태백으로 온 윤식, 두 나그네는 함께 밥을 먹고 술자리를 가지며 그 쓸쓸한 옆자리를 서로 채워주듯 보인다. 관계는 결코 영속적이지 않다. 두 차례의 자리가 이들 관계의 전부다. 하지만 그렇게 떠나가더라도 타인의 존재는 서로에게 위로가 되리. 또한 같은 공간으로서 모텔, 필라테스 강습소에 놓이지만, 다른 방에 놓여 외피 이상을 뛰어넘을 수 없는 영분과 한희도 마주한다. 너무 늦게 온 것은 아닐까, '늦었다'라는 말이 극의 전체에 거쳐서 되뇌어진다. 하지만 한희는 늦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녀의 도래에 자기 자신에게 고기를 사주던 한희는 이제 영분에게서 고기를 선물 받는다. 혼자선 홍보가 벅차던 한희는 남모르게 그녀를 도와주는 영분에 의해 강습소의 이름을 알리게 된다. 어머니의 자리는 아직 늦지 않았다. 다만 교정을 통해서 육체를 바꾸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한희는 말한다. 이전의 관계를 지금에 이르러 극복하기에는 긴 시간이 걸린다는 것, 여전히 서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름이 무엇인지, 그들은 여전히 모른다.

어머니의 방안에 빈 벽에는 이제야 딸과의 추억들이 채워지지만, 그것이 다 채워지기에는 억겁의 시간이 소요될 것만 같다. 또한 어머니의 벽에는 딸의 사진들이 있지만, 딸의 벽에는 어머니의 사진이 없고, 자신만이 추억만이 남아있다. 여전히 딸은 혼자다. 홀로 놓인 한희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여전히 혼자인 그녀로부터, 또한 양모가 떠나간 용진으로부터 홀로 놓인 딸이 어떻게 살아왔을지 비춰지는 바다. 딸은 혼자 놓여 있을 때도 자신의 주변에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전화를 하며 일련의 연극을 행한다. 한희는 그렇게 누군가가 자신의 곁에 있는 것처럼 연극을 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그리고 전화로 걸려오는 고객들의 부조리한 응대에도 한희는 묵묵히 인내하며 다만 듣기만 할 뿐이다. 그렇게 한희는 참아오며 자신의 인생을 버텨내지 않았을까. 필라테스 수강생들은 혼자 행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을까, 불안한 기색을 내비치곤 한다. 하지만 온 인생을 홀로 버텨나가야만 했던, 곁에 '강사'가 없었던 한희의 삶은 어땠을까. 한희가 영분에게 내준 숙제는 같이 하면 쉽지만 혼자 하기에는 버겁다. 하지만 영분이 내어준 그 숙제를 억겁의 세월 동안 한희는 혼자 묵묵히 수행해온 것은 아니었을까. 또한 어머니가 전단지를 붙이는 그 '선택'에 따른 '책임'을 한희가 전화를 받고 떼지는 않던가. 선택하는 자와 그것의 책임을 이어받는 자의 관계가, 전단지를 따라가는 딸의 여정 속에서 목도된다. 그렇게 영분은 간접적으로 한희가 살아왔을 삶을 체험하고, 관객은 한희의 현재를 통해 과거를 엿본다. 양모가 떠나간 용진은 이제 그녀를 찾아 나선다. 집을 뒤져서 핸드폰을 찾고,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탐색한다. 한희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미용실 사장에게 어머니의 행방을 물었으리라. 그리고 용진이 애타게 '아줌마'를 불렀던 것처럼, 한희도 애타게 엄마를 되뇌었을 것이다. 더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부재한 한희에게 세상은 얼마나 무섭게 느껴졌을까.
꽃 3부작에서 한희의 연령대와 유사하던 그 꽃들에 비한다면 그녀는 나그네가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혹시 나그네이고 싶지는 않았을까. 떠도는 어머니에 의해 딸은 떠나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안착할 수밖에 없는, 텐트를 피고 ‘기다리는 자’의 삶을 짊어진 것은 아니었을까. 어머니라는 과거에 의해 딸의 현재는 규정된다. 그래서 우리는 한희의 현재 모습을 통해서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과거를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어머니는 딸에게 '한희'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환하게 웃는다는 의미의 그 이름은 과거가 그녀에게 부여한 일련의 기대감이자 규정에 다름 아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증상을 홍콩독감으로 오인한 어른들의 선택으로 윤식은 한쪽 눈을 잃었다고 회고한다. 과거의 선택은 현재를 여전히 따라다닌다. 그런데 한희에게 그 기대감을 함께 충족시켜 줘야할 책임의 주체는 실종되어 버리고, 온당 그녀 혼자 이름을 성취해야만 했다. 이제는 그것이 버겁게만 느껴진다. 그리고 과거에는 어머니임을 부정했지만, 이제는 자신의 책임인 어머니의 역할을 수행하기로 결심한 듯한 영분이 한희에게 다가온다. 영분이 호떡을 살 때 그녀는 자신이 어머니임을 더 이상 부정되지 않는다. 합창단원이라는 과거를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는 것처럼, 어머니라는 과거는 현재의 그녀로부터 결코 거세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한희가 여전히 존재함에 어머니임은 여전히 현재적이다. 이름을 부여해준 사람은 자신에게도 그 책임이 있는 것일까. 영화 속에서 통성명이 강조되는 이유가 강조되는 것도 이에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름을 부여하지 않은 존재에 대해서 영분은 자유롭다. 아줌마로 불리던 영분은 용진에게 결코 양모로서의 지위도 얻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둘의 관계에서 양어머니 대신 누군가의 아내를 선택한 그녀의 과거가 엿보이듯 하다.
이러한 영분의 이름은 직접적으로 한희에게 알려지지 않지만, 한희가 영분의 세계를 간접적으로 엿보고, 영분을 이루는 요소 중 하나인 그녀의 음악을 마주하며 어머니임을 확신하게 된다. 오랜 세월 속에 은닉되어 있고, 또한 부정하던 존재는 서서히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영화 속에서 호흡이라는 상징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며 중요하게 사용된다. 한희에게 영분의 호흡은 어머니가 살아있음을, 존재하여 자기 옆에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촉각적이고 청각적인 요소에 다름 아니다. 다른 한편 한희의 가파른 호흡을 마주하는 영분의 모습은 다르다. 그것이 역겹다는 듯이 그대로 영분은 달아나버린다. 그리고 한희에게 온당 모든 것을 희생하던 작금의 모습과는 달리, 마치 그녀를 떼어내고 도망쳤을 과거의 모습이 엿보인다. 영분에게는 자신에게서 태어난 갓난쟁이의 호흡이 두렵지는 않았을까, 그녀는 자신이 타고 온 바람의 역향으로 다시금 되돌아간다. 전단지를 모두 떼어내며, 지나온 길들로 걸어간다. 쓸쓸하게 바닥에 널브러진 전단지 위로 '약속'이라는 간판이 눈에 띈다. 어머니가 딸에게 저버린 약속, 그것은 곧 책임이 아닐 텐가. 하지만 되돌아갈 수 없다. 영분도 한희가 자신을 알았다는 것을 눈치 챘음에 떠난 것이요, 한희의 불완전한 호흡도 어머니를 곁에 두고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모녀는 상봉하였고, 딸은 어머니의 바람을 따라간다. <재꽃>에서처럼 이 같은 인생의 변화 속에서 핸드 헬드로, 즉 카메라의 운동이 부여된다. 드디어 서로가 만남에 봉인된 모녀의 관계는 해방을, 새로운 국면을 마주하는 것인가. 그리고 한희는 보고 싶었던 자신의 감정을, 그리고 영분은 딸을 저버린 과거의 자신을 토해낸다. 이윽고 영분은 다시금 떠나가지만, 둘은 재회한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한희가 향했던 그 언덕에서, 이젠 바람이 봄을 몰고 오며 눈이 녹아 대지가 그 청량한 생기를 서서히 드러내고 있으며, 풍력발전기도 회전하기 시작한다. 또한 이는 모녀간의 굳어 있던 시간이 녹은 것처럼도 느껴진다. 그리고 미약하던 또한 거의 멈춘 것만 같았던 바람은 결코 예전과 같지 않다. 모녀의 시간은 다시금 바람처럼 불기 시작하고, 이 같은 격정적이고 세찬 바람은 특히 영분에게 두렵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봄을 몰고 오는 바람은, 그리고 딸이 타고 온 바람은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그 바람이 가져다주고 다가오는 것들을 함께 마주해나갈 것이다. 이름 모를 꽃들, 온갖 역경 속에서도 아스팔트와 시멘트의 틈새 사이로 피어나던 그 들꽃들을 다루던 박석영 감독은 이제는 이렇게 바람을 탐구한다. 과거의 영분은 과거의 자신에게 불어온 새로운 바람을 애써 부정했던 것은 아닐까. 또한 바람이 영분이 붙이던 전단지를 떼어내는 것처럼, 바람이 몰고 온 한희라는 새로운 생명이 영분에겐 자신의 삶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느껴졌을까. 하지만 바람은 거역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마치 영분이 다른 곳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수행하고 일련의 죄책감을 덜어내듯 보였던 것처럼, 결코 거스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거부할 수 없는 바람을 박석영 감독은 어머니가 되어버린 딸과, 딸이 되어버린 어머니의 봉합을 통해서 담아낸다. 바람을 통해 포착한 모녀관계, 거기서 박석영 감독의 새로운 꽃들이 포착된다. 그 꽃은 중년이 되어서도 방황하고 여행을 계속하는 영분과 같은 꽃일 수도 있고, 나그네이기 대신에 안착과 기다림을 선택한, 그리고 그 자리에서 꿋꿋하게 인내하는 한희와 같은 꽃일 수도 있다. 영화는 이 같은 꽃들의 호흡을, 그리고 이름 및 노래와 같은 지워낼 수 없는 존재의 서명을 드러낸다. 마치 꽃 3부작에서 탭댄스, 소리 나는 장난감 등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던 꽃들처럼 말이다. 그래서 바람은 결코 본 작품 안에서만 불어오는 것이 아니다. 바람은 꽃 3부작으로부터 <재꽃>으로도 불어와, 동일한 연출적 기조와 유사한 삶의 초상 등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연속 속에서는 성장한 주인공들과 같은 분명 변화가 포착되고 있으니, 박석영 감독의 다음 작품에서는 어떤 바람이 과거의 것을 이어주고, 어떤 것이 새로운 바람일지 궁금증을 자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