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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뒷모습엔 장미가 있다. | ARTLECTURE

그녀의 뒷모습엔 장미가 있다.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에두아르 마네-

/Picture Essay/
by 안노라
Tag : #뒷모습, #마네, #회화
그녀의 뒷모습엔 장미가 있다.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에두아르 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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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무릎길이의 얇은 가디건을 걸치고 나왔어. 양말 없는 플랫슈즈에 에코백이 전부였지. 아직은 차가운 바람이 부는 3월의 저녁, 그녀의 차림새는 추워 보였어. 편의점과 통신사 사이의 좁은 골목길에서 먼 데 눈을 두고 서 있는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지. 시간은 쇠도 녹인다고 했던가. 그간 야물어진 시간이 그녀의 어깨에 내려앉았는지 예전보다 작아 보였어. 횡단보도를 건너 그녀에게 다가가자 그제야 엄마를 알아보고 활짝 웃더구나. 

  

근처 술집으로 들어갔단다. 몇 팀이 서로의 웃음소리가 건너가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두고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었어. 약간 구석진 곳에 자리 잡으며 오랜만에 그녀의 얼굴을 보았지. 웃으면 살짝 볼우물이 파이고 새침하게 고개를 갸웃하던 어린 시절 모습이 떠오르겠지? 공기놀이할 때, 공기가 손등에서 떨어지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이건 연습이야." 하면서 고집 세우던 콧날도 여전했단다. 습관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는 것도 똑같더구나. 테이블 위에 검지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는 것까지도.

  

대화 도중 간간이 웃을 때마다 그녀의 화장기 없는 얼굴은 파도에 밀리는 물결처럼 주름이 퍼졌구나. 사는 게 뭘까를 고민할 때 생기는 주름의 껍질이 아니라 아등바등 삶을 살아갈 때 생기는 주름의 내면. 그건 아마도 세월의 바다에서 자신을 건져 올리는 데 사용한 그물이었을 거야. 그녀가 채우는 내 잔이 넘칠 때, 불현듯 이 그림이 떠 오르더라. 

  

느루야,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에두아르 마네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1883)의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이란다. 이 그림은 마네가 살롱전에 출품한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고, 51세의 나이로 죽기 전, 유작이기도 하지. 그는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근육통이 심해져 밤마다 고통으로 이를 악물어야 했거든. 시간이 지나자 발목이 뒤틀리고 걷기가 어려운 정도를 넘어 회저병(괴저)으로 다리를 절단할 지경까지 이르렀어. 그는 그의 육체가 피폐해질수록 활력 넘치는 공기가 그리웠던 것 같아. 담소를 나눌 친구들이 있고, 부드럽게 미소 짓는 여인의 따뜻함이 있고, 입 안 가득 기포가 터지는 스파클링 와인이 있는 곳, 시인과 화가들의 도시, 파리로 오게 되지. 


  

파리의 대표적인 바, 폴리 베르제르 술집은 우리의 홍대 앞 '콘서트 카페'라고나 할까? 술도 팔았지만 서커스 공연도 하고 음악도 연주하는 공간이었어. 그림 왼쪽 상단에 초록 양말을 신은 두 다리가 보이지. 공중그네에 앉아 있는 곡예사란다. 이 곳에서는 누구나 담배를 피우면서 에드가 앨렌 포의 <검은 고양이>를 얘기하고, 화려한 장식의 모자를 쓴 여인을 흘끔거리기도 했지. 사업가들이 만나 신대륙 미국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았고, 연인들은 오페라 관람을 약속하기도 했어. 마네는 울고 웃고 화내고 사랑하는 삶이 있던 이 바(bar)의 웨이트리스, 쉬종에게 모델을 부탁했단다. 그녀는 허리가 잘록하고 가슴이 파인 벨벳 옷을 입고 있어. 가슴엔 꽃장식을 했구나. 그녀의 앞 쪽으론 샴페인과 와인, 맥주, 그리고 장미꽃과 과일 등이 놓여있어. 그녀는 약간 지친 듯, 무심한 듯 화면 밖을 바라보지. 단지 바의 풍경을 그린 것뿐이었다면 미술사에서 현대 미술의 시작이라는 밑줄을 마네의 이름 위에 긋지 못했을 거야.  


  

쉬종의 뒤편을 보겠니? 거울이 보이지. 그리고 거울 속에는 커다란 샹들리에와 폴리 베르제르 술집 내부의 풍경이 담겨 있어. 시선은 그곳에서 멈추게 되지. 마네는 의도적으로 캔버스 안의 공간을 차단해 3차원 환영인 원근법을 거부했단다. 전통적인 원근법의 중심엔 '화가의 눈'이 숨어 있어. '화가의 눈'을 기준으로 사물의 거리가 정해 지거든. 보고 있는 '나'라는 주체가 있어야 원근법은 가능해. 그러니 '위대한 인간'의 시기였던 르네상스 때 원근법을 발견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지. 르네상스 이후 서양 회화는 원근법을 이용해 2차원의 캔버스 위에 3차원의 공간을 그렸어. 그건 화가에겐 숨 쉬는 것만큼 당연한 것이었어.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캔버스에 나타난 공간이 실제가 아니고 환영이라고 외친 거야. "이건 그림이에요. 단지 물감을 바른 평면일 뿐이에요."라고 말이야. 그가 마네야. 




에두아르 마네 <오페라 극장의 가면무도회>



 

 <오페라 극장의 가면무도회>를 보렴. 사람들로 꽉 차 있는 극장 내부를 그렸어. 빽빽한 사람들이 곧 벽이지. 벽으로 막힌 이 곳은 거리가 느껴지지 않아. 화면을 나누는 두 개의 굵은 세로 기둥과 가로로 가로지른 발코니는 이 공간이 직사각형의 캔버스라는 걸 말해주고 있지. 아직은 전통이 강고하던 시기, 마네는 무엇을 그리려고 했다기보다 보여줄 수 없는 것, 곧 회화의 정체성을 보여주려 했던 것 같아. 마네는 냉정했고 늘 자신의 눈을 의심했단다. 사춘기의 소년처럼, 먼 곳에서 존재를 소환하는 우편이 날아든 것처럼, "회화란 무엇인가? 화가란 무엇이냐?"라고 물었지.


  

마네처럼 엄마의 친구에게도 아주 오래전, 발신인이 없는 편지가 도착했단다. 편지엔 이렇게 쓰여 있었어.


"너는 누구냐?" 



  

삶의 어느 순간, 허를 찌르듯 존재를 육박해 오는 질문의 습격을 받을 때가 있지. 미처 빗장을 지르지 못한 유년의 지하실이라든가, 감추어 놓은 스무 살 다락방에 몰래 침입자가 숨어 들어온 것처럼, 스스로가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질문. 그녀는 피하지 않기로 작정했단다. 그래서 대답을 구하러 이 곳 저곳을 방황했지. 그녀가 힘써 자신의 길을 찾고 있을 때, 사람들은 안정된 궤도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말했어. 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이렇게 그려야 한다고 강권하는 중세의 수도사처럼, 사회는 그녀에게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는 삶이 바르다는 충고와 간섭을 아끼지 않았지. 사람들은  그녀에게 불친절했고 그녀는 '적당한'이라는 방법을 찾지 못했단다. 


  

그러던 어느 화창한 날, 그녀는 자신이 더 이상 맑은 하늘을 볼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어. 세상이 어두워졌고 아주 가까워졌다는 걸 느꼈지. 그녀가 볼 수 있는 세상은 그녀의 눈을 중심으로 콤바스를 빙 둘렀을 때, 직경 2~3미터의 흐릿한 시야가 전부였지. 그녀의 시력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장애인 판정을 받았단다. 시간에 있어 단호한 작별은 없다고 하지. 그녀도 이전의 삶과 단호히 결별하지 못했어. 과거의 등을 대고 울었지. 억울하고 안타까워서 세상에 매달리고 자신을 비난했어. 


  

그녀가 소리 내어 울었던 만큼 마네도 속으로 울었을까? 비평가와 관람가들의 비난과 빈정거림을 들으면서도 마네는 작품 활동을 쉬지 않았단다. <광기의 역사>로 현대 문명을 진단한 철학자 푸코는 마네의 위대함 중 하나는 '빛'이라고 해. 기존의 회화에서는 화면 안에 빛의 출처를 넣어서 가시성을 부여하지. 작품을 보겠니?





조르주 드 라 투르 <등불 아래서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라 투르의 작품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얼굴은 깊은 고요 속에 있어. 그런 환영적 공간을 만드는 건 마리아를 비추고 있는 내부의 빛이지. 측면에 도달하는 빛은 양감을 부여하거든. 화가들은 화면 내부에서든, 외부의 조명에 의해서든 빛을 통해 화면에 입체감을 부여하려고 하지. 살아있는 것처럼, 실제 하는 것처럼 말이야. 하지만 마네는 달랐어. 아래 그림을 보자.





에두아르 마네 <피리 부는 소년>

    

  


소년의 발 끝에 살짝 기우는 그늘 말고는 어디에도 양감이나 입체감을 느낄 수 없는 그림이야. 피리 부는 소년을 다리미로 잘 다려 놓았지. 깊이도 없고 배경도 없어서 마치 카드 같다고나 할까? 누구나 이건 그림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어. 

  

이렇게 기존의 기법을 부정하는 마네의 태도는 살롱전의 심사위원들을 화나게 하고, 비평가와 수집가들의 빈축을 샀어. 하지만 그는 계속적으로 전혀 다른 회화를 선보였단다. 마네 이전의 회화는 현실을 캔버스 위에 재현하려는 노력이었어. "너, 그림 잘 그린다."라고 했을 때의 '잘'은 본 것을 최대한 그대로 옮겨 놓는 것을 의미하는 것과 같아. 이렇게 말이야. 




발렘 헤다 <정물>


  


어떠니? 진짜 같지. 하지만 원근법과 극사실주의를 바탕으로 한 이런 재현(reconstruction)은 1839년 다게르의 은판 사진술이 발명된 이후 흔들리기 시작했어. 아무리 정확한 눈도 카메라 렌즈보다 정확할 수는 없었거든. 화가들은 고민하기 시작했단다. 도대체 나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그리고 그 이야기를 어떻게 나타내고 싶은지... 화가들이 시끌벅적해 지자 시대로부터 만신창이가 된 마네가 대답했지. "자연의 모방을 멈추고 자신이 본 것을 표현(expression)하세요."  마네는 미술의 근원인 점, 선, 면, 색에 집중했어. 그리고 2차원적 평면성과 물감, 캔버스 등의 물질로 대변되는 '그림 자체'를 보도록 만들었지. 현대미술, 모더니즘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 나팔을 분 셈이야. 예술이 모순의 힘으로 성장하듯 20세기의 미술가들은 그동안 미술을 치장했던 원근법이나 조명 등의 화려한 수사를 버렸단다. 그리고 마네가 앞서 시도했던 회화만의 정체성, 순수성을 표현하기 위해 격렬한 실험을 시작했지.  


  

그럼 다시 처음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으로 돌아가 볼까? 그림 오른쪽 위를 보면 여종업원 쉬종의 뒷모습과 실크 햍을 쓴 신사분의 얼굴이 보이지. 그런데 이상하지 않니? 쉬종의 시선 맞은편이 잠정적인 화가의 위치일 텐데 거울은 그녀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비추고 있어. 마네는 왜 이렇게 그렸을까? 



아마도 마네는 '나'가 주체가 되는 원근법의 고정적 시점을 버린 것이 아닐까? '나'의 시선을 유보하고 그녀를 바라본 것은 아닐까? 거울이라는 매개를 통해 그녀의 내면을 표현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화려한 파리의 밤을 사는 앞모습 뒤에, 머리를 얌전히 묶은 앳되고 어린 소녀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지도 몰라. 고통에 익숙해진 그의 시선이 고개를 내밀어 깊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결코 보이지 않는 그녀의 모습을 찾았을 테니까. 마네는 고급스러운 교양으로 무장하거나, 금화의 번쩍거림으로 위장하거나, 독한 술 한 잔으로 희롱하거나 하는 사람들을 재현하지 않았어. 오히려 자칫 놓치기 쉬운 그녀의 뒷모습에 풋풋하고 발그레한 장미가 향기를 내뿜고 있다고 표현했단다.   


  

느루야, 엄마는 친구와 늦게까지 술을 마셨단다. 그녀는 가물거리는 시력으로 내게 곧잘 술을 부어주었어. 주고 싶은 마음과 시력은 반비례해 술잔은 자주 넘쳤지. 넘치는 술이 자꾸 내 눈을 타고 흘러내리더구나. 그녀는 이렇게 말했어. "친구야, 나 시험 합격했어. 축하받고 싶어서 왔어. 나 장하지."  "그럼 장하고 말고." 엄마는 3번 정도 크게 소리 내어 말해주고 100번 정도 마음속으로 더 크게 말해 주었단다. 그녀는 자주 힘든 길을 택했고, 가끔은 되돌아왔으며, 때때로 주저앉았지. 특별히 나빴던 건 표지판이 없었다는 거야. 지도도 없었지. 있다 해도 볼 수 없었을 거야. 그녀는 내 얼굴도 정확히 보지 못할 정도로 시력이 나쁘니까. 지도도 없이 표지판도 없이 길을 찾아 헤매었을 그녀가 포기하지 않고 이룬 작은 성취가 마치 내 일처럼 기쁘구나! 돌아가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어.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고 어디선가 풋풋하고 발그레한 장미향이 피어올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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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노라_역사를 그림으로 푸는 안노라입니다. 그림과 음악과 문학과 역사의 숨은 이야기를 엄마와 딸이 알콩달콩 수다 중입니다. 쓰면서 토닥토닥, 읽으면서 쓰담쓰담 하기를 꿈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