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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을 오해하고 왜곡하는 데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 심지어는 원전에 대해 얼마든지 접근할 수 있는 시대에도 그런 오해와 왜곡이 벌어진다는 사실은 역사가 지닌 독특한 아이러니다.” -에리히 프롬-
1980년대의 TV 선전물, 배우들이 프롬프트에 적힌 대사를 읊는다. 이윽고 대사가 사라지자 배우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들은 스스로 언표할 수 없다. 오직 상부에서 지시받은 바를 앵무새처럼 읊을 뿐, 이윽고 이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당대 선전물의 푸티지와 당시에 재현되지 못한 것을 복원하는 건조한 픽션이 교차한다. 본 작품은 라드 주드가 작년 <열차의 출구>와 함께 내놓은 실험적인 다큐멘터리, <어퍼케이스 프린트>다. 라드 주드는 최근 보여준 예술론과 1980년대의 시대상을 <어퍼케이스 프린트>를 통해 아카이빙한다. <상처 입은 마음>에서 재현되고, 보이는 것 너머의 유대인의 진실을 역설한 것처럼, 본 작품에서 선전 푸티지와 과거를 재현하는 픽션을 교차하여 그 너머의 것을 포착한다. 이러한 과거를 재현하면서 <나는 야만의 역사로 거슬러 가도 상관하지 않는다>에서 심미성을 경계한 것처럼 대단히 건조한 태도로, 꿈을 깨뜨리고 현실 참여를 바라는 브레히트의 효과를 의식한 태도를 이어간다. 다만 <열차의 출구>에서처럼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는 정확히 재현될 수 없다. 그저 남겨져 있는 기록들을 건조하게 읊으며 정보를 전달할 뿐이요, 그마저도 선전물에 비해 개인의 무신경하고 불완전한 기억에 의존하고 있기에 보존은 열악하다. 하지만 열악하게 남아있는 편린들은 차우셰스크 정권이 약속하는 낙관주의와 달리 투쟁하던 개인의 삶이랄지, 체제의 메커니즘 내에 귀속되어 사물로 전락하지 않는 생생한 삶을 보여준다. 물론 여전히 영화는 귀속된 것일지 모른다. 대사를 읊던 배우는 여전히 자신이 아닌 과거의 누군가를 대신해서 딱딱하게 연기하고, 감독 또한 자신의 시대가 아닌 흘러간 시대를 다룰 뿐이다. 어쩌면 무언가를 비추는 영화는 필연적으로 수동적일지 모른다. 하지만 검열이나 시뮬라시옹에 의해, 이중으로 수동적인 영화의 막을 벗겨내는 작업을 주드는 수행하는 것이랴. 그리고 본 작품 <배드 럭 뱅잉>에서도 이러한 막을 벗겨내는 작업을 수행하리라. 영상에 담긴 나의 특정한 모습, 그것을 바라보는 감상자들의 눈에 씐 막을 고찰하는 작업을 말이다.

1977년 태생의 라드 주드 감독은 현실과 밀착한 영화를 선보이는 루마니아 뉴웨이브의 기수 중 이단아로 분류할 수 있을 테다. 그는 타 기수들과 달리 형식에 있어 매체적 실험을 일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또한 소재 자체는 역사·정치적으로 루마니아 집시 노예의 역사를 이와 적합한 장르인 서부극으로 풀어낸 <아페림!>, 2차 대전 당시 은폐된 유대인의 삶을 드러낸 <상처 입은 마음>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동시대를 다룬다 하더라도, 현대에 민감한 역사를 어떻게 재현해야 하는지를 반성하는 <나는 야만의 역사로 거슬러 가도 상관하지 않는다>와 같은 극을 선보인다. 하지만 그가 동시대에 전혀 주목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일단 그의 데뷔작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소녀>는 동시대에 범람하는 휘황한 매체들의 이면을 다룬다. 그리고 그의 초기시기의 연출은 루마니아의 전형적인 리얼리즘을 선택해, 그가 점차 변화해나간 감독임을 확인하게 해준다. 라드 주드는 심미성을 추구하고, 허황한 꿈을 약속하는 매스미디어의 시뮬라크르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거짓말, 왜곡, 작위성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그것이 결코 참이 아님을 고발함과 동시에, 자본주의에 의해 딸의 결정권을 박탈하려 하며 파국으로 치닫는 가족의 풍경을 담아내며, 심미성의 배격, 시뮬라크르에의 의심, 현대의 정치적 관심을 보여준다. <에브리바디 인 아워 패밀리>도 마찬가지로 동시대에도 여전히 잔존하는 폭력적인 가장과 그것의 근원을 찾아가는 작업을 수행한다.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인정받고 싶은 마리우스는 자신이 받았던 속박을 고스란히 딸 소피아에게 답습하려는 듯, 휴가를 낸 자신의 상황에만 관심이 있지, 어제 아팠다는 소피아의 상황은 등한시한다. 이에 가장을 증오하고 배격함과 동시에, 가장으로서 인정받으려는 욕망에 의해 순환되는 가정 폭력을 고찰하고, 남성이 상황을 통제하고자 입을 막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이 그에 의해 대신 재현되는 부당한 여성의 처우가 드러난다. 또 영화 속에서는 사고, 장례식 등 죽음이 포착되어 딸과 함께하고자 하는 순간의 간절함이 중요하게 나타나고야 있지만, 이러한 눈앞의 욕구에 눈이 멀어 현재를 미래로 연결하지 못하며, 죽음을 바라보면서도 죽음을 경계하지 못하는 아둔함을 조롱한다.
이는 모두 저 자신에게는 관대하여, 상황을 객관적으로 굽어보지 못하는 이기심에서 비롯한다. 이러한 라드 주드의 현대에 대한 관심이 그의 신작에도 이어질 것이다. 본 작품의 외설적 영상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소녀> 속 광고영상과 실재와의 간극이 연상되고, 특정한 성 통념에 의해 좌우되는 여성의 처우는 <에브라바디 인 아워 패밀리>가 떠오르니 말이다. 영화는 총 3막 구성으로 되어 있으며, 촬영자나 편집자의 개입이 자명한 영상, 푸티지의 영역과 현실 그 자체에 상응하고 있는 픽션의 영역이 나누어져 있다. 영화는 현실에 상응하는 픽션과 다른 영역처럼 보이는, 작품의 주인공인 에미의 정사 영상을 인서트하면서 시작된다. 그것이 현실과 달리 보이는 이유는 일단 화면비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 상응하는 영화의 화면비가 2.35:1이라면, 영상의 비율은 그것보다 좁다. 또 현실 속 인물들이 다듬어지긴 했지만 자신의 머리카락과 얼굴을 가리지 않는다면, 영상 속 인물은 가면 및 가발을 쓰고 있기에, 흡사 위장한 거짓된 신분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더욱이 현실의 영역이 롱테이크를 통해 시간을 거의 자르지 않고, 패닝을 이용하여 하나의 테이크 내에서 세계와 인물을 왜곡하지 않고 비춘다면, 외설적인 영상에서 편집에 의한 왜곡, 잘림은 이보다 잦게 사용되니 가상성이 강화된다. 이렇듯 성이 배제된, 연이어 이어지는 현실에서 포착되는 ‘향기로운 꽃’의 세계가 참으로 여겨지고, 성으로 가득한 추잡한 영역이 거짓으로 느껴지지만, 곰곰이 뜯어보면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영상에서 수다스럽게 자신의 모든 진실을 노출한다면, 현실에서는 이를 은닉하고 있고, 더욱이 영상에서 나체로 헐벗은 그들이 육체의 진실을 드러낸다면, 현실에서는 옷으로 이를 꽁꽁 싸매 은닉하고 있다. 또 영상의 언어가 추잡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아주 적나라하게 진실을 표현한다면, 현실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나타나는 것은 우아하게 정제된 언어와 나를 은닉하는 무수한 침묵이다. 오히려 여기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소녀> 속 광고영상과 유사한 것은 후자다. 양자 중 어느 하나가 온당 참이나 거짓이 아니다. 양자의 세계에 여러 진실과 거짓이 산재해있으며, 또 둘의 세계는 마냥 분리된 것도 아니다.
사실 양자가 공존하고 있음을 감독은 주장한다. 에미가 꽃을 사 들고 길거리를 걷는 와중에 감독은 나무가 싱그러운 나뭇잎이 만개한 목가적인 장면을 비춘다. 하지만 시각적으론 평화롭고 경이로운 풍경을 비추는 와중에, 청각적으로는 번식기의 고양이들이 울부짖는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포착한다. 시각과 청각은 신성과 육욕이라는 양극단에 놓여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 이들은 하나의 차원에 공존하고 있다. 분열된 두 세계를 비춘 이후, 공존하는 신성과 육욕이 공존하는 세계를 포착한 감독은, 보다 적극적으로 양자가 하나의 순환이요 세계에서 분리되지 않은 채로 공존하고 있음을 연역한다. 영화의 촬영은 독특하다. 에미가 자신의 연인과 정사하는 영상에서 촬영의 주체는 그들 자신이므로, 영상의 관심은 오직 두 연인, 정사 그 자체에만 집약되어 있다. 하지만 이후 길거리를 포착하는 주드는 에미의 발걸음을 따라가긴 하지만, 오직 그녀에게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지는 않은 듯하다. 그녀를 따라가더라도 이윽고 카메라가 미처 못 따라갈 정도로 발걸음이 멀어지면, 다른 행인이나 건물을 비춘다. 그녀가 충분히 포착될 수 있는 거리에서도 마찬가지다. 주드의 관심은 에미 그 자체가 아니라, 에미를 바탕으로 다른 삶과 세계를 함께 포착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선에서 두 세계가 이어진다. 에미가 부쿠레슈티 거리 이곳저곳을 쏘다닌다. 이러한 과정에서 거대하게 포착되는 건물 중 하나가 바로 성당이다. 오랜 시간 루마니아의 정체성이요, 국민들의 삶과 가치를 결정지었던 정교회 체계 내에서 성은 오직 번식을 위한 수단으로 제한된다. 하지만 성당이 포착된 이후에 보디빌더들의 육감적인 육체가 전시된 전광판이 비춰진다. 성에 관한 관심을 아무리 축소하고, 인류에게서 거세하려고 애쓰더라도, 결국 성당보다 더욱 가까이에서 포착되는 것은 바로 육욕의 전시장이다. 이후 에미는 어느 한 가정에 방문한다. 도입부에서 포착되었던 바로 그 영상이 타인에 의해 유출되었고, 이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고자 지인의 집에 방문한다. 아파트에 진입하는 입구에 여성 마네킹의 다리가 널브러져 있다. 힘이 빠진 채로 눕혀진 마네킹의 다리는 정사 이후 모든 기력을 소진하고 낭비한 순간을 연상케 한다. 의술과 식량이 열악하던 고대인들에게 그리고 가까운 과거까지도, 막대한 에너지가 소모되고 체액이 낭비되는 성교는 죽음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졌으니 말이다. 또 섹스의 결과인 임신과 출산도 마찬가지다. 여성 마네킹의 다리는 이러한 정사 이후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널브러지고 버려진 마네킹 다리 주위로, 아스팔트를 뚫고 자라난 이름 모를 들풀이 포착된다. 애욕에 광분하여 무수한 기력을 낭비하더라도, 그 결과물로 유한한 나의 삶이 분신을 통해 간접적으로 무한히 이어진다. 이러한 영생불멸의 욕망은 성욕 없이는 실현할 수 없다. 그리고 마트에서 유아용 장난감 판매대에 임신한 인형이 진열되어 있다. 추하게 규정된 외설의 결과인 우리, 인류는 더 이상 삶에 필수적인 성을 허황된 신성의 이름으로 배제할 수 없다. 주드는 인위적으로 형성된 이념에 의해 성이 현실에서 배제되었지만, 그 성에 의해 태어나고 나를 지속하는 인류는 필연적으로 성을 거세해낼 수 없음을 상징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성의 메타포들은 모두 에미의 발걸음을 따라가며 포착된다. 본 작의 1막은 산책하는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미가 발걸음을 옮기는 과정에서 비치는 세계의 풍광, 행인의 초상, 평범한 사건들이 영화의 전부다. 그리고 이는 에미와는 무관하게, 즉흥적이고 우연하게 일어난다. 카메라는 이에 개입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비추기만 할 뿐이다. 이는 시장에서 한 노인이 카메라를 의식하여 렌즈에 눈을 맞추고 만지작거리는 장면에서 가시화된다. 주드는 현실을 왜곡하기보다는, 그저 현실의 객관적인 풍광을 있는 그대로 담아낼 뿐이다. 현실을 적나라하게 비추며 허황된 가상과 감상자를 매개하기보다는, 객석에 앉아있는 감상자의 세계와 영화의 세계를 눈 맞춤과 터치로 허물고자 한다. 이렇게 길거리를 누비며 객관적으로 현실을 관찰하고 담아내는 영화는 '인상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 19세기 말에 태동한 인상주의의 핵심적인 특징 중 하나는 바로 '플라뇌르'다. 교외를 유유자적하게, 무관심, 무목적의 태도로 산책하는 중년 남성 산책자의 시선을 의미하는 단어로, 그 의미에 걸맞게 인상주의자들은 객관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각을 기계적으로 캔버스에 옮기고자 했다. 그리고 본 작품의 라드 주드 또한 영화의 주인공에 다름 아닌 에미가 구조물, 버스 등에 가려도, 또 구급차, 오락실의 소음이 에미의 대사를 방해하더라도, 이에 개입하지 않고, 그렇게 가리거나 뒤섞여있는 풍경을 비추며 현실 그 자체의 시청각을 비추기에 바로 이 점에서 인상주의적이다. 그렇게 주드는 현실에 근접한다.
라드 주드 최근에는 다루는 소재에 맞추어 적합한 형식을 도모하는 실험을 전개하고 있지만, 초기에는 다른 루마니아 감독들과 마찬가지로 왜곡을 최소화하는 리얼리즘을 도모하곤 하였다. 그래서 이 같은 1막의 태도는 객관적인 현실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비추고자 하는 리얼리즘의 실험처럼 보인다. 이러한 객관적 촬영에서 나와 세계의 관계가 드러난다. 에미가 방문하는 마트, 많은 차가 주차된 도로에서 오직 본인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포착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거나, 자신의 주장을 타협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세계의 중심은 오직 자신으로, 무수한 세상의 중심들이 자기 뜻을 관철하지 않아 거센 충돌이 발생한다. 만약 이러한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오직 나만을 생각하는 영화를 촬영한다면, 이 모든 즉흥적, 우발적 요소들을 내가 투영된 에미를 중심으로 제거했어야 하리라. 하지만 현실을 비추고, 또 현실을 구현하고자 한다면, 영화가 제거하지 말고 오히려 구현해야 할 것은 이 같은 우발성, 그리고 무수한 세상의 중심들이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분열이다. 이렇게 리얼리즘의 의미에 대해 고찰하는 감독은, 이와 동시에 기록의 의미에 대해서 탐구한다. 에미를 비추다가 이윽고 건물, 행인을 비추며 집중이 분산되는 영화의 카메라, 에미는 그 이후에도 줄곧 포착될 인물이다. 하지만 에미가 지나가는 과정에서 포착되는 건물, 행인 등은 카메라가 기록하지 않는다면, 순간 존재하고 이윽고 존재가 확인되지도 않게 사라지고 흩어질 안개 같은 존재들이다. 이렇게 찰나적으로 나타나고 사라질 유한한 존재들을 주드는 기록하고자 한다. 그 순간에만 존재하므로 이를 붙잡고 보존하고자 주드는 기록한다. 주드가 이렇게 포착하는 대상에는 로마 시대의 조각상, 철거가 진행되는 허름한 건물 등, 지금 포착하지 않는다면 사라져서 한때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도 없는 대상들이 주를 이룬다. 어쩌면 에미가 자신의 정사를 촬영한 이유도 이와 맞닿아있을지 모른다. 아무리 연인과 그 이후 또 정사를 나눌 수 있다고 해도, 그날의 정사는 전날의 정사, 다음날의 정사와 결코 같지 않으니, 지나면 사라져버릴 유한한 순간을 기록하고 보존하고자 한 것이랴. 즉 주드는 유한한 것의 반영구적으로 보존하는 '작업'이라는 관점에서 영화의 촬영과 기록을 모색한다.
이렇게 에미의 발걸음을 따라가며 현실을 비추는 1막이 끝나고 2막이 펼쳐진다. 1막이 에미의 발을 따라서 현실을 비추고, 이에 대한 방법론과 지론을 탐구하는 영화였다면, 2막은 아카이빙 푸티지로 현실을 구성하고, 이를 통해 영상과 기록 둘러싼 관계를 탐구하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사진, 기록 영상, 보도 영상, 가상적 대중문화 등 여러 편린들이 비논리적으로 뒤엉켜있다. 배치 순서에 논리, 유기성을 찾기 어렵다. 흡사 에미가 지나다니던 현실 속 무수한 세상의 중심들이 푸티지로 환원된 것만 같다. 하지만 나름의 통일된 의미작용은 찾을 수 있다. 일단 '감시'다. 2막의 푸티지 중 많은 요소는 역사적이다. 루마니아 군부 비판, 차우셰스쿠 독재, 히틀러 및 무솔리니의 파시즘 비판, 서구식민주의에 대한 기록, 정교회의 역사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대가 폭압적으로 시민 혁명을 언제나 좌초시키고, 그들의 자유를 불발케 했다는 언급이 나온다. 또 메두사의 무시무시한 시선에 돌로 얼어붙었다는 이야기도 삽입된다. 이전 시대의 감시는 군대, 종교, 정치인 등 권력자의 시선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시선에 따라서 자유, 권리를 열망한 시민들의 바람은 모두 교정되었다. 감시를 당하는 사람은 바라보는 주체의 시선 하에서 허용되는 것, 불가능한 것을 구분하며, 오직 전자만을 행동에 옮기고 반복하며 교정되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히틀러의 선출에 독일 시민들이 비정치적인 태도로 책임을 회피했다는 언급도 이와 연관될 테다. 독일 시민들의 시선이 과연 비정치적이었을까. 그들의 시선과 정치인에 대한 감시가 그런 지도자를 만들어낸 것은 아닌가. 그리고 이전 시대까지의 감시, 시선은 특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감독이 군인, 독재, 역사적 과오가 담긴 푸티지를 인서트하며, 역으로 그들을 감시한다. 푸티지 속 관람객들이 자유롭게 셀피를 찍으며, 일상 곳곳에서 대상을 감시한다. 그러므로 기록한다는 것은 곧 감시, 그것을 바탕으로 현실의 행동을 뒤바꿀 힘을 가진다. 이는 곧 영상으로 논의되는 시뮬라크르(복제품)와 시뮬라시옹(복제하는 행위)의 관계로도 이어진다. 영화의 1막에서 시뮬라크르인 에미의 외설적 영상은 현실을 복제한 결과물이다. 회화, 조각, 영화 등은 현실을 재현하고 모방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주장하는 시뮬라시옹은 이러한 가상에 의해 현실이 규정되고 만들어질 수 있는, 양자의 관계가 대단히 상호 유기적이라는데 있다. 현실 또한 가상으로 여겨진 시뮬라크르를 시뮬라시옹하며 그 여파를 고스란히 행동에 반영하게 된다. 1막에서 에미의 발걸음은 모두 영상에서 좌우된 것으로, 시뮬라크르에 발목 잡혀 결정된 산책이라 할 수 있듯 말이다. 영상이 없었으면 과연 현실 속 그녀의 발걸음이 이와 같았을까. 더욱이 카메라를 의식하여 렌즈와 눈을 맞추고 우리와 대화를 하려는 듯한 할머니처럼, 우리가 영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영상이 우리를 바라보고 이에 따라 행동이 결정되기도 한다. 영화는 작년 촬영되었고, 또 코로나 여파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기에, 본 작품 자체도 그렇지만 2막의 푸티지에도 거리 두기를 몸소 실현하는 영상들이 있다. 이 같은 영상을 두고 현실 속 우리가 이를 모방한다면 시뮬라시옹은 참 기능이리라. 하지만 주드는 본 시뮬라시옹이 항상 참은 아니었음을 밝혀낸다. 특히 여성에 있어서 언제나 매춘부, 남성을 타락시키는 팜므파탈, 수동적인 어머니상으로만 제시된, 여성에 관한 시뮬라크르의 역사가 펼쳐진다. 이러한 상에 따라서 여성의 행동은 축소되고, 작금의 에미도 정숙해야만 하고 성적으로 능동적이면 타락한 것으로 여겨지는 여성의 이미지에 의해 부당하게 평가받는다. 이는 가상이 현실을 규정하는 사례이랴. 또 가정폭력의 이미지, 강간의 책임을 피해자나 외부 요건에 떠넘기는 통계 등도 분명 현실에 시뮬라시옹될 것이다. 그것이 무비판적으로 시뮬라시옹될지, 비판적으로 검토되고 감시될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영상이나 기록은 객관적일 수도 있지만, 주체의 관심이 투영된 것이기도 하다. 2막에서 포르노그라피의 어원이 '매춘부의 초상'이요, 기원전부터 존재했고, 초기 무성영화에도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기록되는 것은 '매춘부의 얼굴'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기록하고자 하는 애욕, 매춘부를 사랑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그래서 기록은 필연적으로 주관적인 관심의 투영이다. 그리고 성을 거세할 수 없는 인류는 필연적으로 정욕을 어떠한 매체가 되었든 남기고 보존하고자 한다.

이러한 개인적 관심이 곧 감상에도 이어진다. 영화의 3막이 바로 1, 2막에서 구축된 영상을 둘러싼 여러 단상이라 할 수 있다. 에미는 상류층들이 다니는 명문 사립학교의 역사 교사다. 그래서 외설적 영상이 성인 사이트에 타의로 유출되자 이는 더더욱 파문을 자아내고, 학부모들은 그녀를 추궁하고자 회의를 개최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에미의 영상을 바라보는 갖가지 시선이 펼쳐진다. 학부모들은 주로 고위층으로 사회학자 부르디외가 『구별 짓기』에서 밝혀냈듯, 깊은 정통성이 요구되는 문화와 도덕을 숭상하고, 이를 유지하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상에서 에미가 하는 구강성교가 매춘부들이나 하는 행위라며 폄하하고, 역사는 웅대하고 고상한 것을 취급하기 때문에 에미는 적합하지 않다며 힐난한다. 2막에서 군대가 시민들의 자유를 좌절시켰다는 언급이, 3막의 장군에게 이어지는 것은 덤이다. 또 남성들은 외설적 영상이 유출된 교사에 대한 자질 심사, 판단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영상이 주는 쾌락에만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회의의 목적에 걸맞은, 영상을 둘러싼 주체들의 책임을 판단해야 하지만, 이들의 감상은 이와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일단 영상 자체는 에미가 촬영한 것이 맞다. 에미는 촬영에 대해선 주체다. 하지만 선생이라 해서 자유로이 성애를 기록하면 안 될 이유가 없으며, 문제가 되는 유출에 대해선 객체요 피해자다. 만약 에미가 유출자라면 책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유출한 것이 아니기에, 악의적으로 유포한 가해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이는 불발되고 유출한 주체에 의해 악의적인 이미지가 덧씌워져 버린 객체를, 흡사 그 악의와 관심대로 비난한다. 영화 속 부르주아지들은 2차 대전 당시 악의적인 선전의 피해자인 유대인, 집시에 대한 이미지를 여전히 신봉하고 있다. 유대인, 집시 또한 이미지를 만들어낸 주체가 아니다. 그것을 만들어낸 주체는 선전가지만, 그들은 책임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고, 심지어 그들의 후손이라 할 수 있는 군인은 여전히 이를 신봉하며, 이들의 희생양이 그들의 책임까지 둘러쓴다. 회의장에서 한 남자가 줄곧 에미를 촬영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에 의해서 기록된 에미는, 그의 의중에 따라서 어떠한 모습으로 촬영되고 대중들에게 유포될 것이다. 그리고 감상자들은 작품에 담긴 에미를 판단하지, 이를 촬영한 주체를 생각하기가 힘들 것이다. 작품에 담긴 것이 그 작품의 주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작품의 주체에 의해 그들은 구성되고 촬영된 객체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즉 영화는 세상의 중심인 무수한 개인들의 필연적인 작품의 주관적인 해석, 그리고 작품을 만들어내고 유포한 주체가 아닌, 작품에 투영된 객체가 주체의 책임을 짊어지게 되는 딜레마를 고찰한다.
이러한 영화의 결말은 총 세 개인데 그중 두 개는 부르주아지에 의해 쫓겨나거나 그들과 타협하는 현실적인 결말이요, 장르 영화와 외설적인 영화를 패러디한 마지막 결말은 에미가 영웅이 되어 그들을 심판하는 허무맹랑한 결말이다. 부르주아지들에 의해 좌우되는 전자의 두 결말은 현실과 밀접한 1막의 연출로 비친다면, 그들에게 구애받지 않는 후자는 가상임이 자명한 장르적 양식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여전히 2막에서 나타난 소수 특권적인 감시의 권력은 여전히 현실에서 그대로인지 모른다. 능동적으로 위치에 구애받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고 감시하는 시대는 여전히 도래하지 않은 것이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주드는 더욱 치열하게 현실을 비춘다. 이는 현실과 역사를 어떻게 재현하고, 이를 감상자들이 어떻게 수용하는가를 고찰한 <나는 야만의 역사로 거슬러 가도 상관하지 않는다>를 이어오고, 또 작년에 공개한 <열차의 출구>나 서론에서 언급한 <어퍼케이스 프린트>에서 제기된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픽션으로 승화하며 이를 집대성한 것처럼 느껴진다.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세상의 중심인 나를 내려놓고 타인과 그들에 의한 즉흥, 우발에 집중한다. 현상에 개입하지 않고 객관을 추구한다. 그래서 영화가 촬영될 당시에 범람한 코로나 펜데믹도 굳이 손대지 않는다. 마스크와 비교적 먼 거리를 유지하며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않고 적나라한 롱숏으로 근접하는 카메라로 시대를 반영하며, 마찬가지로 이를 반영한 드니 코테의 <공중보건>처럼 코로나 펜데믹 당시를 반영한 영화로 기록되리라. 또 이러한 객관의 결과물로서 도입부의 적나라한 성애가 어쩌면 성에 관한 하나의 진실이다. 아름다움과 신성함이 벗겨진 추함, 하지만 우리가 소거할 수 없는 거친 야성성이 바로 아름답게 꾸며지지 않은 성의 진실이랴. 이러한 영상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마찬가지로 영화가 현실에 반영되기도 한다. 이러한 리얼리즘론과 더불어 기록과 영상을 둘러싼 여러 이해관계를 탐구한다. 유한하고 곧 사라져버릴 것의 붙잡음, 그렇게 현실에서 무언가를 길어오지만, 마찬가지로 영화에서 무언가를 길어가기도 하는 것이 현실과의 관계다. 더욱이 기록되는 대상을 감시하며 행동을 규정, 강제하는 힘, 하지만 이는 민주적으로 만인이 가능해야만 한다. 아직까지 본인들의 특권을 내려놓지 않고자 하는 부르주아지들의 감시와 기록,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들의 민낯을 생생히 촬영하는 3부를 통해 주드는 그들의 감시에 굴복하지 않는 영화론과 권리를 천명한다. / 글/박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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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Michel Basquiat's 'Untitled (Skull)
Sebastião Salgado – Amazônia
A Peek through the Iron Curtain with Sibylle Bergemann’s Wintry Duo
Lingering in Time : Koo Bohnchang’s Photography 1990 - 2021
Niamh O'Malley, 'Glasshouse'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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