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의 한 남성 교도소에서 일하는 여성 교도관 에바가 있다. 에바는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돌보는 모양으로 수감자들을 보살핀다. 그러던 어느 날 뜻하지 않게 그녀 앞에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가 등장하면서 에바의 일상은 한순간에 양상이 달라지게 된다. 에바는 무엇을 해야 할까? 수감자를 돌보아야 하는 교도관이자 자식을 비극적으로 잃은 어머니인 그녀 앞에는 어떤 선택이 놓여 있을까?
스웨덴 출신의 30대 감독인 구스타브 뮐러는 이미 전작인 <더 길티>를 통해 한정된 공간 안에서 딜레마 상황에 처한 인간의 심리를 보여주는 데에 탁월한 능력이 있음을 입증한 바 있다. 이번 영화에서도 그는 자신의 특기를 발휘하여 다시 한번 딜레마 상황으로 주인공을 몰아넣는다. 전작인 <더 길티>와 마찬가지로 주인공은 공직에 있는 인물이지만, 이번 작품은 전작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주인공이 사건의 중심이 되면서 주인공의 딜레마를 한층 심화시킨다.

극한의 딜레마적 상황에 처하다
아들의 살인자인 미켈이 등장하기 전까지 에바의 일상은 교도소의 루틴에 맞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자신의 일을 잔잔하게 해내는 그녀의 얼굴에서 격동하는 내면의 낌새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일하는 교도소에 들어서는 미켈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지난 5년간 애써 눌러왔던 그녀의 온갖 감정은 곧바로 분출하여 그녀의 내면에 머물던 또 하나의 그녀를 깨어나게 한다. 교도관이었던 에바는 미켈을 마주하며 다시 엄마가 된 것이다.

에바에게 죽은 아들은 사고 뭉치였다지만 그럼에도 에바가 단 한순간이라도 아들의 죽음을 잊은 적이 있을까? 잊고 싶었어도 잊지 못할 아들의 존재와 아들을 지켜주지 못했던 엄마로서의 죄책감은 뜻하지 않은 미켈의 등장으로 다시 부상하여 에바의 일상을 요동치게 한다.
이 영화의 영어판 제목은 <Sons>, 즉 <아들들>이지만 원제목은 덴마크어인 <Vogter>로 <보호자>가 된다. 함의하는 의미가 다소 모호한 영어판 제목보다는 원제목이 훨씬 에바의 딜레마적 상황을 좀 더 잘 담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원제목인 <보호자>에서 어떻게 에바가 처한 딜레마적 상황을 읽어낼 수 있을까?
우리의 정체성을 이루는 요소 중 가장 많은 부분, 어쩌면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직업 혹은 역할이다. 나라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에 의해서 대변되고, 이와 동시에 내가 하는 일은 곧 내가 된다는 말이다. 주인공 에바는 과거 긴 시간 엄마이기도 했으나 현재는 교도관으로서만 살아가고 있다. 달리 말하면 아들을 잃은 에바에게 현재 부여된 일은 엄마로서의 역할이 아닌, 타인의 아들들인 수감자들을 보호하고 감독하는 일인 것이며 이것만이 그녀의 정체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켈이 등장함으로써 에바의 내면에서는 오랫동안 기능하지 못한 채 묻혀있었던 또 하나의 자아, 즉 엄마로서의 자아가 깨어나게 된다. 이렇게 두 자아가 한 사람에게 공존하게 되면서 그녀는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해야 하지만 해서는 안 되는 상황, 바로 딜레마적 상황에 빠지게 된다.
다시 원제목인 <보호자>로 돌아가 보자. 에바는 이 교도소의 교도관으로 수감자들을 보호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보호하고 감독해야 하는 미켈을 보호할 수 없는 상황, 아니 보호하기는커녕 그를 괴롭히고 싶은 상황에 처하고 만다. 이것이 에바가 현재 처한 딜레마다. 이 딜레마가 더욱 지독한 성격을 갖는 것은 자신의 아들을 보호하는 부모로서의 역할을 선택의 영역에 두고 방기 했던 에바가 남의 아들들은 반드시 보호하는 일을 책무로 갖는 위치에 있다는 데에서 온다. 이제 에바는 사적 욕망과 공적 책무의 경계에서 극한 갈등의 상황을 겪게 된다. 이것을 의도하고 감독이 주인공을 공직자로 택한 것이라면 그의 선택은 주효했다.
일탈된 복수
미켈이 자신이 근무하는 교도소로 이송된 것을 확인한 후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미켈을 주시하던 에바는 결국 미켈이 수감된 수감동으로 근무지를 옮긴다. 미켈의 주변을 맴돌지 않고 그와 직접 마주하려는 결정을 내리면서 에바는 교도관으로서의 자아를 밀어내버린다. 미켈을 대할 때만큼은 다시 죽은 아들의 엄마로 돌아간 것이다.

에바가 원래 일하던 수감동은 경범죄자들이 수감되어 있는 곳이라 전체적인 분위기가 호의적이고 부드러운 곳이었지만 미켈이 수감되어 있는 중범죄자들의 수감동은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딴판인 매우 험악한 곳이었다. 분위기와 업무 강도 면에 있어서 극명한 차이가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에바가 중범죄자동으로 자청해서 옮겨간 것은 단 하나의 이유, 죽은 아들을 위한 복수 때문이었다.
어떤 복수를 성공적이라고 해야 할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복수가 성공적인 걸까? 그렇다면 복수를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또한 복수를 완수하고 나면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걸까? 이 영화를 통해 딜레마적 상황에 이어 생각해 볼 또 하나의 문제는 바로 이 복수의 문제이다. 분명 에바의 복수에는 설득력이 있다. 설득력을 가져야 복수에 명분이 생기고 추진 동력이 발생한다. 에바에게 미켈은 존재자체가 죄책감이며 분노다. 그런 그의 존재를 없앨 수는 없더라도 그의 안위를 책임지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에바는 그를 최대한 불편하게 만들 수는 있었다. 굳이 중범죄자 수감동으로 옮긴 에바는 처음에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은 채 그가 자신의 마음에 일으키는 파문의 물결만으로 치를 떨지만, 미켈에 의해 잔인하게 죽은 아들이 떠오르자 본격적으로 미켈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에바가 미켈에게 복수를 하려고 했던 이유와 목적은 명백하게 아들의 죽음에 대한 앙갚음이었다. 그러나 미켈에게 고통을 가하면서 희열을 느낀 에바는 점차 희열이 내뿜는 도파민에 중독되기라도 하는 듯 복수자체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결국 에바의 복수는 원래의 목적을 벗어나 자신을 위한 복수, 즉 아들에 대한 엄마로서의 배임행위로 인한 죄책감을 덜어내고 미켈의 고통을 통해 가학적 만족을 느끼는 병적인 단계로 접어들면서 급기야 선을 넘는 행위를 낳게 된다.
“복수를 시작하기 전에 무덤 두 개를 파라”라는 말이 있다. 공자가 했다고 전해지는 이 말대로 에바의 복수는 점차 자신을 궁지로 몰아가며 애초에 목적했던 것과는 달리 미켈보다는 에바 자신을 더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만든다. 목적을 잃고 명분이 사라진 에바의 복수는 이렇게 표류하게 되는 것이다.
자아의 회복
미켈에 대한 복수가 자신의 무리한 행위로 인해 애매해지게 되고 심지어 미켈에 의해 이용당하던 와중에 본래 에바가 근무하던 수감동에서 에바가 돌보던 수감자의 자살사건이 발생한다. 피가 낭자한 그의 방을 본 에바는 복수심에 사로잡혀 그간 잊고 있었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바야흐로 에바에게 과거의 사슬을 끊어내고 현재적 자아를 복원할 시간이 온 것이다.

미켈에게 복수를 결심한 순간부터 에바는 죽은 아들을 위한 엄마의 자아로만 살았다. 하지만 자신이 보살피던 수감자의 죽음을 통해 에바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죽은 아들을 위한 허망한 복수가 아니라 살아있는 아들들을 위한 봉사임을 깨닫게 된다.
에바는 마지막이 돼서야 미켈에게 자신의 정체, 즉 미켈이 5년 전에 죽인 사람의 엄마임을 밝힌다. 그러자 충격을 받은 미켈은 그대로 줄행랑을 치다 숲 속에서 고꾸라지게 되고, 그를 쫓던 에바는 엎어져 쓰러져 있던 미켈의 머리를 바닥에 눌러 죽이려고 시도하지만 결국 멈추게 된다. 에바가 만일 여전히 엄마의 자아로만 있었다면 에바는 그 순간 미켈을 그대로 죽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바는 미켈에 대한 복수를 끝내려고 마음먹은 시점부터 이미 교도관으로서의 자아를 회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감자를 보호해야 하는 자신의 직분에 맞게 미켈을 죽이지 않고 무사히 교도소로 데려가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에바의 복수는 에바가 교도관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자 이루어진다. 그간 에바의 괴롭힘에도 보이지 않았던 내적 동요가 미켈에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에바의 상사는 마지막 장면에서 중범죄자 수감동에서 고생하다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된 에바를 위로하며 ‘구제할 수 없는 인간들도 있다, 현실이 그렇다’는 말을 한다. 에바는 현실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앞으로의 에바는 죽은 아들을 구제하지 못한 엄마였던 과거의 자아를 두 번 다시 불러내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에바는 현재만을 살아갈 것이다. 현재에서 만날 숱한 누군가의 아들들을 보살피는 보호자로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