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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 자본의 중요성 | ARTLECTURE

정서 자본의 중요성

-<아노라>가 특별한 이유, '션 베이커'에 관하여-

/Insight/
by 홍수정
정서 자본의 중요성
-<아노라>가 특별한 이유, '션 베이커'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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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우리가 살아가는데 알게 모르게 무척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정서 자본'이다. 개인적 차원의 정서 자본 말이다.
이 글에서 필자가 설명하는 정서 자본이란 개인이 세상과 소통할 때 느끼는 감정의 색채, 폭과 넓이, 그 감정을 스스로 인지하는 능력, 그것을 잘 감당하고 향유하며 다독이는 능력, 그리고 이것이 한데 어우러져 형성하는 그 사람만의 정서적 토대 의미한다.

정서 자본은 우리 삶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다. 사람을 대하는 과정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정서 자본이 풍부한 사람은 자신을 향한 사람의 감정을 쉽게 알아챈다. 그래서 내게 선의를 가진 사람, 상냥해 보이지만 악의를 가진 사람, 무뚝뚝하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 어딘지 모르게 쎄한 사람, '도망쳐!'라는 머릿속 경보가 울릴 정도로 위험한 사람을 쉽게 감지한다. 정서 자본이 탄탄한 사람은 터무니없는 결정을 잘 내리지 않지만, 그 토대가 빈약하고 궁핍한 이는 위험한 사람과 어울리고 엉뚱한 사건에 휘말리며 결국 '지팔지꼰(지 팔자 지가 꼰다)'을 시전하고 자기 인생을 수렁으로 밀어 넣는다. 그러면서도 운이 나빴다고 한탄한다. 비옥한 정서 자본 위에서 살아본 적이 없어서 자기 문제를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화 <아노라> 스틸컷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영화 <아노라>를 보면서다. 이 영화의 주인공 '아노라'는 스트립 클럽의 댄서인데, 우연히 러시아 재벌 2세의 마음을 얻지만 남자 가족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힌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다양한 사람과 마주치는데, 자신에게 진정한 애정을 가진 이와 말만 뻔드르르한 X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녀는 애정과 폭력을 구분하는데 서툴러서, 썩은 동아줄에 매달리며 엉뚱한 곳에서 패악을 부리곤 한다.


물론 이것은 그녀가 아직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경험' 자체가 정서 자본의 일종이다. 영화에서 그녀의 전사는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추측컨대 그녀는 제대로 된 애정을 받아본 경험이 부족할 것이다. 혹은 부모가 사랑을 주면서도 폭력을 휘두르고, 폭력을 행사하며 사랑이라고 우겼을 가능성도 있다. 이런 경험은 어린 시절에 그치지 않고 살아가며 중요한 순간마다 튀어나와, 그녀의 판단과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경제적 요인만큼이나 정서도 중요한 자본이다.


정서 자본은 개인의 행복에도 영향을 미친다. 행복에는 성공과 성취가 중요하다고 여겨지지만, 그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정서적 토대다. 이것은 단순하게 '행복은 마음먹기 나름'이라거나 '주변에서 행복을 찾아보세요' 같은 공허한 조언이 아니다. 고작 마음먹는다고 행복해질 수 있다면, 세상에 불행이 어디에 있겠는가.


누군가는 신기할 정도로 자기만의 행복을 잘 찾아낸다. 그 사람은 숨은 아이템을 쏙쏙 찾아내는 게임 고수처럼 기어이 행복의 요소를 찾아내어 거기 접속한다. 그리고는 건강한 묘목이 물을 흠뻑 흡수하여 성장하듯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을 마음껏 충전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객관적으로 좋은 환경에서도 불안하거나, 불행하거나, 남의 물건을 훔친 사람처럼 눈치를 본다. 마치 뜨거운 시멘트 바닥에 물을 뿌리는 것처럼, 행복을 흡수하지 못한 채로 날려 보내는 것이다. 이를 결정하는 것이 정서 자본이다. 우리 마음속 감정의 거푸집. 


필자가 정서를 굳이 '자본'이라 표현한 이유는, 이것 역시 경제적 자본처럼 상속되기 때문이다. 잔인하지만 사실이다. 감정을 느끼는 뇌는 유전의 영향을 받고, 가정의 정서는 구성원에게 공유되며 아래로 이어진다. 다양한 정서적 경험을 하고 그 과정에서 탄생한 감정을 처리하는 법을 우린 가장 먼저 부모에게 배운다. 하지만 정서 자본이 가정안에서 확정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며 선택하고 공을 들인 공동체 안에서, 그것은 다시 공유되며 꽃을 피운다. 그러므로 돈만큼이나 정서도 누군가에게 물려받거나 개인의 노력으로 일궈야 한다. 정서는 삶의 풍요로움으로 치환되고 다시 풍요로움 안에서 탄생하며 돌고 도는 일종의 자원이다.   


어쩌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정서 자본의 중요성을 인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은영 박사님으로 대표되는 무수한 정신분석 콘텐츠는, 억눌리고 천시받았던 감정을 복원하려는 시도와 맞닿아 있다. 영화, 도서, 전시 등 개인의 취향을 탐색하는 활동도, 결국 자신의 정서를 들여다보고 가꾸려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뤄낸 한국 사회가 정서의 중요성에 민감했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이를 감지하고 본인도 모를 노력을 하는 개인은 분명 많아지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혹시 생겨날지 모를 오해를 잠재우며 글을 마치고 싶다. 정서 자본은 상속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거푸집은 깨어지고 변화하기 마련이다. 다만 첫 번째 틀은 가정에서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반드시 행복한 환경에서 정서적 자본이 쌓이는 건 아니다. 때론 역경과 고난이 정서를 기르는 비옥한 양분이 된다. 무수히 빛나는 작품들이 실은 불행 가운데서 태어났다. 마지막으로 정서에는 좋고 나쁨이 없다. 누구의 정서가 더 좋고, 누구의 정서는 나쁘다고 할 수 없다. 불행에 예민한 정서를 타고났다면 행복을 느끼기 어렵겠지만, 그래서 남들보다 더 많이 노력하며 살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흐릿하게 인식되었던 정서 자본의 속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자신의 목표를 위해 잘 운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아노라>가 특별한 이유, '션 베이커'에 관하여


<아노라>는 제77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으며 유명세를 탔다. 하지만 미국의 떠오르는 거장 '션 베이커'의 작품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대가 되는 영화다. 


이와 별개로 이번 글에서는 션 베이커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아노라>는 이해하기 위해 알면 좋은 이야기들. 


션 베이커는 지금 미국에서 가장 핫한 인디영화감독이라 말할 수 있다. 짐 자무쉬, 샤프디 형제 등 인정받은 작가는 많았지만 지금 시점에서 가장 핫한 것은 누가 뭐래도 션 베이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디 영화의 지향을 분명히 한다. <아노라>는 그의 영화 중에서 가장 자본의 냄새가 많이 나는 작품이지만, <스타렛>(2014), <탠저린>(2018) 등에서 이어져 온 인디 감성은 여전히 진하다. 


그 덕인가. 션 베이커는 지금 미국의 현실, 그중에서도 성 산업과 자본의 결합을 가장 예리하게 파고드는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스스로 밝혔듯이 성 노동자에 관심이 많다. 그런데 단순히 성 노동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션 베이커는 성 산업의 마냥 환상적인 이미지에서 출발해서, 그 이면에 놓인 성 노동자의 현실에 도착한다. 그의 카메라는 꿈과 악몽을 고루 오간다. 하지만 그는 인물을 동정하지 않는다. 그저 성 산업이 들려주지 않는 이야기를 보여줄 따름이다.



<플로리다 프로젝트> 스틸컷


하지만 션 베이커의 작품은 우울하지 않고, 여기에는 늘 이상한 활기가 넘실댄다. 이것이 션 베이커의 작품이 사랑받는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 사회의 빈민층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의 삶을 힘껏 살아날 때의 소란과 소동이랄까. 


국내에서는 디즈니랜드 인근 모텔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에 관한 알록달록한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2016)가 사랑받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탠저린>(2018)을 가장 좋아한다. 이 작품으로 션 베이커를 처음 접했는데, 그때의 충격이란. 트랜스젠더 여자들의 미친 활기와 어느 밤 세탁소에서 맞닥뜨린 평온.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탠저린>은 그냥 재밌다. 션 베이커를 알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




<탠저린> 스틸컷


평단의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레드 로켓>(2022) 역시 션 베이커의 수작 중 하나다. 다만 이 영화는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인 데다, 션 베이커의 작품 중에 가장 노골적이고 뾰족하다. 그가 자주 활용하던 웃음과 농담도 확 줄었다. 미국이 그다지도 좋아하는 이미지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똑똑히 보라고 션 베이커는 말한다.


칸 영화제의 주목을 받았지만, 앞으로도 션 베이커는 인디 정신을 놓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작가가 동시대에 있는 것은 행운이다. 현실에 밀착해 있으면서, 거기에 자신의 프레임을 뒤집어씌우지 않는. 포장하지 않지만 존중을 버리지 않는. 그에 관해 썼던 글을 아래 첨부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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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영화평론가_홍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