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의 풍경화엔 풍경이 없다.
2024년을 사는 2030 세대들에게 자신이 하룻동안 본 풍경들을 그림으로 그리라고 한다면, 어떤 이미지를 그릴까.
THE_GREAT_CHAPBOOK_3,_2024.
노상호(b.1986)작가는 매일 그림을 그린다. 아침에 일어나서 전날 핸드폰을 통해 봤던 웹상에서의 이미지들을 출력해서 그 위에 먹지를 대고 그리는 것이다. 노상호 버전으로 색을 입히고, 이미지 조각들을 조합하여 자신이 하룻동안 봤던 이미지들을 또 다른 이미지로 생산해낸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SNS에 매일 업로드한다. 그렇게해서 1년에 365점의 드로잉과 12점의 회화가 만들어진다. 회화가 12점인 이유는 한달동안 그린 약 30개의 드로잉을 조합해 캔버스 50호짜리 회화 1점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이 디지털 시대의 풍경화가, 노상호 작가의 작업방식이다.
전시전경
HOLY 홀리, 2024
아날로그 시대의 풍경화라면 나무가 그려지고, 숲이 그려졌겠지만 디지털 시대의 풍경화에는 풍경이 없다. 풍경 대신 자리 잡은 건 모바일 액정 안에서 본 흥미로운 이미지들이다.
그렇게 자신이 본 이미지를, 수행자처럼 혹은 직장인처럼 매일 그리는 노상호 작가가 5년만에 개인전으로 돌아왔다.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홀리 Holy》 라는 전시명으로 말이다. 전시명과 같은 작품명인 <홀리> 연작들은 2022년과 2023년 그의 드로잉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미지들을 작품화한 것이다. 자신을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이를 부유하는 감각'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가라고 소개하는 노상호 작가가 반응한 이미지들은 바로 AI 제너레이트 이미지가 의도치 않게 만들어낸 ‘오류’들이었다. 6개 손가락이 달린 손, 머리가 2개 달린 말, 불타는 눈사람과 같은 오류말이다. 그리고 그는 오류를 Error 라는 단어 대신 Holy 라고 명명했다.
HOLY 홀리, 2024
특히 이번 <홀리>연작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소재는 '불타는 눈사람'이다. 불과 눈은 공존할 수 없다. 불이 붙기 전에 눈사람은 녹아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연히 AI를 이용해 생성해낸 '눈사람' 이미지에서 노상호 작가는 '불타는 눈사람'을 발견했다. 이것은 종종 발생한다는 AI 생성 이미지의 오류였지만, 그 오류가 오히려 인간의 창조적인 예술감각을 닮아 작가는 그 부분을 흥미롭게 느꼈다고 한다. 머리가 2개 달린 사슴은 신화적 존재 같았고, 손가락이 6개 달린 손은 SF 영화 한편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불타는 눈사람은 악동과 빌런 사이를 오가는 사랑스런 캐릭터로 다가왔다. 그래서 작가는 그들의 오류를 홀리 Holy, '신성하다' 재정의했다.
HOLY 홀리, 2024
출처도 기억나지 않는, SNS 어딘가에서 이런 글을 본 적있다. 내가 먹은 것들이 내 몸을 만든다고. 건강한 것을 먹으면 건강한 몸이 되고 건강하지 않은 것을 먹으면 건강하지 않은 몸이 된다고 말이다. 범위를 넓혀서 먹는 것 뿐만 아니라, 내가 본 것, 내가 읽은 것, 내가 들은 것들이 나를 만든다고 한다. 노상호 작가는 자신이 하룻동안 웹상에서 보아온 풍경들을 매일 8시간씩 그린다. 디지털시대의 풍경화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화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HOLY 홀리, 2024
그럼, 나의 자화상을 생각해보자. 내가 본 것들, 내가 읽은 것들, 내가 들은 것들... 이렇게 나를 채우고 있는 것들 말이다. 어떤 것이 그려져 있을까. Holy 할까? 부끄러울까? 볼품없을까? 무의미할까? 아니면 나름 괜찮을까?
HOLY 홀리,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