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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도착 | ARTLECTURE

시선의 도착


/Insight/
by 김태은
시선의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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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이 글은 영화 <놉(NOPE)> (조던필 감독, 2022)에서 드러난 시선의 대한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 있다. 인터넷에는 이미 이 영화에 대한 결말과 리뷰들이 넘쳐난다. 조던필 감독의 전작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평들이 나오지만 이 글은 영화비평이라기 보다, 시선의 문제들을 철학적 배경, 역사적 사실들에서 작은 우리의 일상들에 이르기 까지 촘촘히 연결되어 있는 사유의 문제들과 고민들을 소소하게 드러내려 한다. 영화 놉을 통해 볼 수 있는 시선의 심리적인 교환, 시선의 위치가 달라짐으로 해서 벌어지는 권력의 구도, 정보화 사회에서의 자유의 선택과 우리의 위치가 지닌 상황들 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또한 시선의 사회적 문제를 다룬 다른 영화들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으며 시선의 의미로서는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라캉의 스크린이론을 바탕으로 설명한다. 이 글을 통해 초고속 네트워크를 향해 질주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또 무엇을 하면 안 되는 것일까? 이런 고민을 한 번쯤 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열차의 도착


최초의 영화로 기록된 뤼미에르형제의 <열차의 도착>(L'Arrivée d'un train en gare de La Ciotat)은 말 그대로 열차가 들어오는 장면이 전부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증기를 내 뿜고 화면 안으로 들어오는 열차는 영화사에 있어 상징하는 바가 무척 크다. 당시의 증기 기관차는 증기선과 함께 최첨단의 제국 문화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초기에 일본이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철도를 만들고 열차가 움직이는 길을 먼저 만든 것을 보면 그 중요성을 잘 알 수 있다. 


뤼미에르의 열차도착을 기록한 영화를 다큐멘터리로 보는 입장에서는 단순히 당대의 기술에 대한 스펙터클의 기록이겠으나 정신분석학을 영화를 통해 나타낸 슬라보에 지젝(Slavoj Žižek)의 <기묘한 영화강의>(The Pervert's Guide To Cinema,2006) (1)의 시선에서 보자면 상당히 묵직한 메타포가 된다. 지젝은 이 영화에서 기차가 등장하는 영화의 시퀀스를 보여주면서 열차와 영화와의 구조적 유사성을 말해주고 있다. 가로로 긴 셀룰로이드 영화 필름에 기록된 사각형 프레임들은 열차 구간의 탑승객과 창문의 사각형 프레임이 외형적으로 일치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증기기관차는 영화 구조의 조형적 닮은 꼴이자 시간을 운반하는 기계 장치로서 존재한다. 어느덧 지젝의 증기기관차는 시간의 트랙을 달리고 달려 2022년 영화 <놉>(Nope)이라는 플랫폼에 도착한다.

 


[그림1] 뤼메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 포스터(좌)와 지젝의 기묘한 영화강의 포스터

 


하나의 눈(one eye)과 마주보기


영화 <놉(Nope)>(조던필 감독)은 2022년 개봉한 미국의 SF공포물로 알려져 있다. 이 영화는 외계 생명체와 벌이는 농장의 인물들을 특유의 감독만의 코드로 나타낸 무척 기묘하고 미스터리한 작품이다. 등장인물들은 구름 뒤에 숨은 채 자신들의 머리 위로부터 예고 없이 내려와 엄청난 공포를 몰고 오는 미확인 괴생명체의 시선과 맞서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의 시작은 뤼메이르 형제의 영화가 최초의 영화의 자리에 있게 한 전사(前事)에 대한 감독 개인의 존경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전사는 그 유명한 머이브리지의 연속사진을 의미한다.


1878년 에드워드 머이브리지(Eadweard James Muybridge)가 촬영에 성공한 달리는 말 연속사진은 연속이미지의 구현으로 영화가 태동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사진은 초기 달리는 말의 발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대한 논쟁을 해결하고자 찍은 것으로 24대의 카메라를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한 뒤 말을 달리게 해서 말의 발이 설치된 줄을 끊으면 찍히는 나름대로의 반자동(?)장치를 통해 탄생 되었다. 고전 필름의 영화가 1초에 24프레임으로 존재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장치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말의 연속적 이미지에 집중하면서 중요한 하나의 사실을 간과하고 만다. 바로 말을 달리게 만든 기수의 존재이다. 당시 말이 달리지 않았으면 연속적인 사진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말이 일정한 속도로 달려서 줄을 끊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게 해준 것은 말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말을 컨트롤한 기수의 역할이 나름 중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이 기수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감독인 바로 이 지점을 노렸다. 



[그림2] 머이브리지의 달리는 말 촬영을 위한 설치전경 ⓒfilmmakeriq.com

 


머이브리지의 연속사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의 렌즈를 가진 카메라의 원아이(one eye)를 만들어준 소실점과 만날 수 있다. 이 소실점은 서양회화의 원근법(one perspective)이 궁극적으로 도착하는 시선의 종점이다. 알베르티가 집대성한 시각 피라미드에서 하나의 소실점은 관찰자가 사물로 보내는 시선으로 나타나고 자크 라캉에 이르러 동시에 사물에서부터 나오는 시선과 마주 보는 상태로 변화한다. 조던 필 감독은 이러한 근원들을 모두 공포의 대상으로 일원화시켰다. 우연일지 모르겠으나 놉에 나타난 미확인 괴생명체의 모습은 전통적으로 희화화된 UFO의 원반 모양을 하고 있으면서 바닥 부분에 커다란 하나의 검정색 구멍이 난 것을 볼 수 있다.  



[그림3] 영화 <놉>의 한 장면. 미확인 비행물체의 모습과 구멍이 노출된 상태이다.



이 구멍 속으로 모든 사물과 사람들은 흡수되고 그 안에서 뼈와 장기가 으스러지고 분해되어 현실에서 사라져 버린다. 마치 카메라렌즈에 포착되어 사라지는 스나이퍼의 카메라 총(2)을 연상시킨다. 이 구멍은 카메라 렌즈의 원아이(one eye)를 위협적인 권력의 시선으로 상징화 시켜 영화 내내 공포의 아이콘이 된다. 

 

이제 영화를 하나의 권력 구도로 보는 견해를 조심스럽게 꺼내 보려 한다. 영화 스크린에서 배우는 절대로 관객을 볼 수 없다. 반면 관객들은 자유롭게 배우의 얼굴을 볼 수 있다. 관객은 스크린 속 그(그녀)와 눈이 마주쳐도 무방하다. 하지만 배우는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 영화촬영에서 불문율로 되어 있는 이 시선의 금지사항은 촬영 당시 배우가 카메라를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지켜지고 있다. 왜냐하면 스크린에서 배우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스크린 자체의 의미가 사라지고 관객은 자신의 합법적인 관음증 행사를 들켜서 놀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 통상적으로 배우의 시선은 카메라 렌즈의 윗부분을 보게 함으로써 관객과의 권력의 관계에서 한 발짝 물러선다. 연극무대에서의 제3의 벽의 존재와 유사하게 스크린은 영화 속과 영화 바깥을 구분 짓는 중간 막의 역할을 한다. 이제 영화관의 공간은 스크린 바깥과 안 쪽에서 두 개의 시선이 마주하는 관계를 맺는다. 영화 <놉>에서 괴생명체의 원아이와 주인공의 시선의 구도는 시선과 응시로 대결한다. 



자크라캉의 시선과 응시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어린아이가 거울 앞에 서 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자신인지 모른 채 멀뚱멀뚱 바라보지만 곧 엄마가 다가와 거울 속 녀석에게 손짓을 하고 웃는다. 아이는 비로소 ‘아. 저 거울 안에 녀석이 바로 나구나’ 깨닫는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최초의 자아 형상이 시작되는 것이다. 라캉은 자아의 형성기를 이 거울단계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자아는 자신의 시선과 거울 속 자신과 닮은 또 다른 자신과 마주하는 두 개의 시선으로 분리된다. 라캉에 따르면 (자신과 닮아 있지만 진짜 자신이 아닐 수 있는) 상대편의 시선을 담은 거울로부터 나오는 응시로 부터 노출되어 존재되어 지는 것이다. 일찌감치 시인 이상은 이러한 간극을 시 <거울>(1933)을 통해 표현 한 바 있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스크린 이론은 스크린은 하나의 작은 막과 같은 것으로 마치 우리가 야외에서 캠핑할 때 피워놓은 장작불앞에 담요를 덥고 있는 상황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담요를 덮고 있으면 장작불의 열기로부터 내 몸을 보호하지만 담요에 구멍이 나 있거나 담요가 벗겨진 부위는 열기가 전달되어 뜨거운 경우와 같다. 이 때 담요는 라캉이 말하는 스크린이며 담요에 구멍이 나 있거나 벗겨진 상태는 ‘스크린의 파열’이라고 보는 것이다. 라캉의 이론에 따르면 파열된 스크린 너머로 들어오는 것은 저 너머의 세계(스크린 너머의 세계)로부터 오는 ‘응시’’이이다. 그 시선이 넘어와 나에게 다가오면 상처를 입히게 되는데 이 부분이 정신분석학적으로는 ‘트라우마’를 남기는 것이다. 자크 라캉은 스크린이론을 통해 인간의 시선이 상대방의 시선과 마주보는 시선과 응시의 대응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을 제시하였다.




[그림4] 라캉의 스크린 이론 도식



<놉>에 나오는 미확인 생명체와 주인공들의 시선 대결은 마주보고 있긴 하나 동일한 시선과 시선의 관계가 아닌 대등한 관계를 형성하기 어려운 초능력과 위력에 의한 시선권력의 차이를 극명하게 나타낸다. UFO를 닮은 미확인 괴생명체와 시선이 마주치면 끔찍한 결말을 맞이한다. 슬라보에 지젝이 ‘기묘한 영화 강의’에서 언급한 스크린 너머의 세계는 영화장면 너머의 타자가 있는 심리 공간으로 규정하며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곳으로 해석하고 있다. 또한 영화장면에서 스크린의 파열이 가져오는 끔찍한 현실에 대해서도 은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영화 <메트릭스>(The Matrix, 1999)에서의 빨간약과 파란약의 50% 복볼복 게임의 상황과 결과 또한 잘 알려진 라캉식 스크린의 메타포이다. 


라캉의 청년기 시절 바다 위 사물을 보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바다 위를 떠다니는 정어리 통조림이 햇빛에 반짝이는 것을 보고 라캉은 ‘나는 저 정어리 깡통의 반짝이는 지점으로 부터 보여지고 있다’ 라고 말해 정신분석학의 전조적 언술을 내뱉는다. 후에 그의 이론에서 정어리캉통은 ‘objet a'라고 명명된다. 필자의 청년기 시절 사물도 라캉과 비슷한 경험을 한 일화가 있다. 대학시절 학생회관에 혼자 앉아 있다가 순간 나를 쳐다보고 있는 작은 생명체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나를 쳐다보고 있는 저 작은 생명체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녀석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난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내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가까이 가서 난 비로소 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는 그저 좀 복잡하게 접혀진 ‘껌종이’였다. 난 바로 스케치북을 열고 그의 모습을 스케치북에 기록하였다. 그 생명체의 초상화는 23살 청년시절 나의 머릿속에 이렇게 기록되어졌다. 나에게 그 작은 생명체는 라캉의 말을 빌리자면 objet a가 된다. 라캉에게 응시는 주체 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늘 대상 쪽에 있다. 영화 <놉>에서도 사람들은 응시를 당하는 입장이고 시선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알 수 없는 시선의 공포


우리가 상대방의 눈동자를 쳐다볼 때 자극이 증가하고 심장박동수와 호흡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은 인간간의 상호작용에 있어 감정적인 부분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 만큼 눈을 서로 마주친다는 것은 상대방의 이해도와 관심도를 파악하게 되고 대화의 흐름을 이어가는데 필요한 것으로 작용한다. 이처럼 사람들이 서로 눈을 맞추는 것은 매우 중요한 상호작용의 요소로써 작용하기 때문에 정신적 작용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만약 상대방이 불안정한 상태라고 한다면 이러한 불안감까지 전달 될 가능성이 있다. 위와 같은 시선의 마주봄은 서로 평등하거나, 마주하는 관계를 전제로 할 때 가능하다. 만약, 시선의 위치가 서로 다르면 우리는 전혀 다른 상황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어떤 시선이 나에게 무서움을 유발할 때,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경계심을 드러내거나 스트레스 반응을 나타낸다. 이것은 일종의 생존 본능으로써 우리가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적절한 대처방법을 찾으려 하기 마련이다.

 

시선의 위치가 우리보다 위에 있을 경우에는 어떤 권력의 차이가 생긴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시선은 그 방향과 근원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공포 그 자체가 된다. 개인이 더 이상 이 생명체의 위협으로 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시점에 이르러, 주인공 오티스 헤이우드 주니어(OJ)는 우연히 말이 눈에 반응하는 것을 각성하게 되어 하나의 방안을 깨닫는다. 바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회피하는 방법이다. OJ는 고개를 돌려 뒤통수를 보여줌으로써 괴생명체로부터 안전하게 피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영화 말미에서는 시선의 동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공격의 시작이 되는 순간이 되는 것을 보여준다. OJ의 여동생 에메랄드 헤이우드는 거대한 서부동산 테마파크에 설치된 카우보이 풍선을 하늘로 올려보내 괴 생명체와 동등한 높이에서의 시선위치를 만들어 낸다.  ‘녀석의 눈과 마주치지 않는다’는 방법을 알게 된 주인공으로 인해 관객은 그 동안 시달렸던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구름에 가려진 채 하늘로부터 언제 내려올지 모르는 시선의 근원을 떠올리며 매우 공포스러운 불쾌한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감독은 시선의 정체를 나중에 나타나게 함으로써 공포감을 극대화 했는데 시선을 위장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구름이었다. 모두 시간에 따라 흘러가는데 유독 하나의 구름 덩어리만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음을 나타냄으로써 괴생명체의 존재를 알린다. 



[그림5] 괴생명체를 유인하는 카우보이 풍선. 시선의 동등한 위치에서 비로서 공격의 기회가 주어진다. 



부드럽고 친절할 거 같아서 더 끔찍해


영화 놉에서 등장하는 UFO가 자유자재로 모양이 변하는 천 재질로 되어 있던데 보통 UFO를 고도로 문명화된 물체에 비해 의외로 부드러운 재질로 표현되어 그 배경이 궁금해진다. 영화 '놉'에서 등장하는 UFO가 철이나 고도로 문명화된 물체가 아닌 부드러운 천 재질로 되어 있는 이유는, 이 영화에서 다루는 외계인들이 고도의 기술력으로 진화한 생명체라는 것을 나타내려는 의도로 보이지만 더욱더 끔찍한 존재라는 사실을 위해 의도적으로 부드러운 재질을 가져 온 것으로 보인다. 마치 부드러운 혀로부터 예상치 못한 공격을 당했을 때 더욱 그 아픔이 큰 것과 같은 이치일까.


'놉'에서는 이와 다른 형태의 UFO를 제시함으로써, 외계인과 UFO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깨뜨리고 새로운 재질의 시선을 고안한다. 아울러 부드러운 천 재질로 된 UFO는 더욱 유연하고 다재다능하게 변화 할 수 있어, 고도의 기술력을 지닌 외계인들이 이를 사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영화 말미에 효과적일 것으로 전달하고 있다.


만약 기존의 관습대로 괴생명체를 고체의 물체로 만들었다면 기계장치와 고안된 관절 등의 처리로 인해 로봇 눈의 한계에 갇혀 있었을 것이다. 딱딱하고 공격적이지 않게 생겼는데 끔찍한 힘을 가지고 있어 상대적인 공포감을 극대화 하는 것에 성공하는 셈이다. 고체화된 근대의 시선에서 진일보한 공포의 시선으로써 부드러운 시선에 당할 때 더욱 강한 트라우마가 남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림6] 전통적인 UFO(좌)의 은색 금속 디자인과 영화 놉(우)에서의 모양과 질감의 차이



감시와 역감시의 전술


시선에 대한 두려움과 정신적인 작용을 권력화 시킨 공간구조가 바로 18세기 제레미 벤텀(Jeremy Bentham)이 제안한 감옥 건축의 개념인 파놉티콘(Panopticon)에 잘 나타나 있다. 파놉티콘은 원형구조로 설계 되어 죄수들은 주변의 방 끝에 위치하고 있고 원형의 중심에는 감시탑이 위치하여 모든 수감자들을 효율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공간적 형태를 띈다. 우리나라에도 일제 강점기에 설계된 서대문 형무소가 바로 이러한 파놉티콘의 형태를 띄고 있다. 파놉티콘의 시선은 수감자가 언제나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여 결국 스스로를 통제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수감자가 볼 수 없는 감시자의 불확실성은 수감자들의 행동에 지속적인 자기 통제장치를 만들어 내는 셈이다. 20세기 후반에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푸코(Michel Foucault)는 《감시와 처벌》(Surveiller et punir)(3)이라는 저서에서 파놉티콘을 현대 사회의 권력과 통제 메커니즘의 메타포로 사용하였으며 현대에 들어 많은 학자들이 이를 사생활 침해와 대중감시와 연결시킨다.


조지오웰의 <1984>소설에서 시선은 미래사회에서 공포와 억압을 가하는 상징적 인물 빅브라더로 나타난다. 1948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미래의 개인을 감시하고 정보를 권력화 하는 최고 정점에 빅브라더가 존재하며 그 밑에서 저항하는 인물들을 그리고 있다. 1984년 1월1일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작품을 발표하여 ‘안녕하세요 오웰씨, 당신이 그린 미래사회가 왔네요. 지금은 빅브라더가 없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어요’라며 서울-파리-뉴욕-일본을 연결하는 위성아트쇼를 선보인바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는 바로 이 작품이 가능하게 하였던 기술은 바로 인공위성과 네트워크였다는 사실이다. 즉, 이 기술은 현재 모두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 컴퓨터 등의 IP를 인식하여 나의 위치정보를 모두 알고 있는 잠재적 빅 브라더 아닌가. 


과연 우리는 네트워크시대의 편리함을 대가로 감내해야할 감시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물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1988년 개봉한 애너미 오브 스테이트(Enemy of the State)(4)에서는 위로부터의 시선에 대처하는 방법을 통쾌하게 잘 나타내주고 있다. 주인공 로버트 클레이턴 딘(윌스미스 분)은 한 개인이 미국정부의 감시체계와 맞서 싸우는 인물로 등장하는데 바로 ‘반사’의 방법을 사용한다. 시선이 출발하는 지점을 향해 나로부터 향하는 시선을 반사시켜 그들의 치부가 모든 사람에게 공개되는 것이다. 이로써 파놉티콘의 감시구조인 등을 돌린 수감자들이 감시자를 못 보게 하는 것이 실패로 돌아간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위에서 내려오는 시선은 누군가가 위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긍정적인 경험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은 심리적인 현상으로 종종 신적 존재의 영역과 연관될 수 있다. 이러한 시선은 대개 권위, 통제, 제압 등의 요소보다는 보호, 지지, 인도 등의 심리적으로 안정적인 상태를 경험하는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보통 종교에서 잘 드러나는 이러한 감정은 사실 시선자체를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이게 되면서 가능한 것이다. 그 때 시선은 세상의 가치로부터 절대적인 존재이며 성스러운 것으로 간주하게 하여 스스로가 감당하기 어려운 공포감을 해소시키는데 일시적 효과가 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시선을 존엄성을 가진 존재로 대상화 시키지만 사실 그 출발은 공포로 부터 시작되었다.



[그림7] Enemy of the State (1998) 영화 포스터

 


도시 우범지대에 CCTV를 설치하여 밤길 귀가의 안전성을 도모하는 경우는 굳이 종교가 아니더라도 심리적 마음을 안정시킨다. 현대의 인공위성, 네트워크, 클라우드 서비스, IP주소 등은 대개 위로부터 오는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술들은 대개 우리의 생활에 불가결한 역할을 한다. 인공위성은 GPS와 같은 위치 기반 서비스를 제공하고, 네트워크와 클라우드 서비스는 인터넷과 같은 많은 정보와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제공하기 때문에 이러한 기술들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기술들을 이용함으로써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들은 때로 우리의 개인 정보를 노출시킬 수 있고, 악의적인 공격에 노출될 수도 있어 양면의 칼날이 되는 것이다.


전술적인 행동을 통한 예술작품에 있어서 이러한 감시체제에 대한 유희적 저항의 의미로 개인을 감시하는 시스템을 역감시 하는 방법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진 것도 이런 입장에서 보자면 시선의 공격성을 무력화 시키는 저항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개인의 자격으로 이러한 거대한 감시 시스템을 전복시키거나 바꿀 수 없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시선을 피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정보화 사회에서 편리함을 선택함과 동시에 거대한 시선의 우산 아래 있음을 담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개인이 시선을 향해 위장을 하거나 일시적으로 다른 위치를 가짐으로 우리를 향한 시선을 교란 시킬 수 있는 기회는 있다. 여기에는 여전히 많은 개인의 저항방법들이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으며 시선으로부터의 일시적 자유를 얻는 것은 아직 유효하다. 우리는 이것을 조용히 ‘전술’이라 부르기로 약속한다.



참고목록
(1) https://watcha.com/contents/mOVmRNW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영화장면들을 교묘하게 편집한 영화. 지젝의 강연도 명강연이지만 유명 감독들의 영화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정신분석학에 들어맞는 신기함을 보여준 영화
(2) https://en.wikipedia.org/wiki/Chronophotographic_gun 총의 방아쇠 장치를 카메라에 부탁해서 연속으로 필름이 돌아가 촬영되게 만든 장치. 오늘날의 영화촬영을 뜻하는 '슈팅(shoting)'이라는 단어가 카메라 총에서 비롯되었다. 
(3) https://www.dh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7153 미셀푸코의 감시와 처벌은 저작은 근대 파놉티콘을 현대로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한다. 자세한 설명은 위 링크에서 볼 수 있다. 
(4) https://www.imdb.com/title/tt0120660/ 시선을 피하는 전술의 한 형태인 ‘반사 시키기’를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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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태은_김태은 작가는 미디어아티스트이자 영화감독이다. 가상현실과 테크놀러지를 활용한 콘텐츠 분야에서 활동중이다. (www.iiru.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