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건 습함이었다. 내가 사는 독일 남부는 바다가 없어서 습함을 느낄 수 없는 동네이다. 한여름에도 햇빛 때문에 더울 뿐, 습하지는 않아 그늘만 가도 시원하다. 물론 요즘은 햇볕이 너무 뜨거워서 한낮에는 밖에 못 나갈 정도로 뜨겁다. 그래서 피서를 떠난 곳이 바로 바르셀로나인데, 이곳은 독일보다 햇빛은 더 강렬하고 더불어 습했다. 독일에서 비행기를 타고 갔기 때문에 바르셀로나에 도착했을 때의 느낌이 마치 제주공항에 도착했을 때와 같았다. 역시나 여름여행지는 조금의 습함이 있어야 설레듯, 바르셀로나도 도착한 순간 설레기 시작했다. 테라스에 널려있는 빨래들은 뜨겁다 못해 따가운 햇볕 아래서 바싹 말라가고, 푸르른 식물들은 햇빛 쪽으로 고개를 더 내미는 동네가 바르셀로나다.

19세기 말 바르셀로나에서 건축가로 활동했던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 1852-1926)의 도시인만큼 발을 내디뎌 가는 곳마다 가우디의 건축물들이 우뚝 서있다. 사람 사는 건물의 테라스는 형형색색의 빨래와 초록색의 식물, 파란 하늘이 어우러져있다면 가우디의 건물은 초록색의 나무와 푸른 하늘, 습하면서 시원한 바람, 햇빛을 가득 받은 땅,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동물들, 즉 자연의 모든 것들을 담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때문에 그의 건축물은 인위적인 곡선보다는 실내 바닥을 제외한 모든 선이 조화로운 곡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카사 바트요 Casa Batllo, 1902-1906>

스페인어로 ‘카사’는 단순히 ‘집’이라는 뜻으로, 카사 바트요는 말 그대로 ‘바트요네 집’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츄파춥스 회사 소유 건물인 카사 바트요는 조셉 바트요가 가우디에게 재설계를 의뢰한 건물이다. 당시 바트요의 건물 옆집에는 초콜릿 사업을 엄청 크게 하고 북유럽 스타일로 지은 카사 아마뜨가 있었다. 많은 관광객들이 카사 아마뜨를 보고 가우디의 건물보다 마음에 들어 하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아름답게 지어진 건물 중 하나다. 때문에 당시 바트요는 자신의 저택이 그라시아 거리에서 가장 화려하고 눈에 띄는 건물로, 그리고 무조건 옆집보다 높게 재건축해 주기를 가우디에게 요청했다. 가우디는 건물의 외관과 내부를 모두 설계했는데, 당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가우디의 건물을 비난했고 ‘뼈의 집’, ‘바닷속 집’, ‘용의 집’이라고 별명을 붙여서 불렀다고 한다. 카사 바트요의 외관만 보면 바로 이 별명들을 이해할 수 있다.

건물의 하중부는 다리뼈와 골반뼈 형상을 하고 있고 건물의 테라스는 모두 해골 모양의 형상을 띄고 있다. 외벽 타일은 푸른색 계열을 띄고 울퉁불퉁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바닷속에 있는 느낌을 준다. 색유리 파편과 원형 타일로 마감한 트렌카디스(Trencadis) 기법을 활용해 햇빛을 받으면 거대한 보석처럼 가지각색으로 빛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띌 수 있게 연출했다고 한다. 건물의 외벽뿐만 아니라 실내에도 푸른색 타일로 장식하며 안뜰에 푸른빛이 가득하게 구성하였다. 아래층까지 환기가 잘 되고 빛이 잘 들게 하기 위해 스페인은 건물의 가운데가 뚫린 안뜰(빠뜨요)을 많이 설계하는데 가우디는 그 안뜰의 디자인까지도 계획해서 설계하였다.

안뜰을 구분하는 실내 난간은 울퉁불퉁하지만 투명한 유리를 설치하여 마치 물결치는 바다의 느낌을 형상화했고 나선형의 계단은 파도가 출렁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건물의 아래로 갈수록 밝은 타일을 사용하고 큰 창문을 내어 햇빛이 최대한 내부로 들어올 수 있게 실용성과 미관을 동시에 해결하였다. 마지막으로 ‘용의 집’이라는 별명은 카탈루냐주의 탄생 신화인 용의 신화를 뜻한다. 건물의 지붕은 용의 비닐을 연상시키고 장미꽃 모양의 공주 발코니와 집의 전체는 카탈루냐 지방의 수호성인인 성 조르디의 전설인 기사 게오르기우스가 용과 싸워 이기는 전설을 담고 있다.
<카사 밀라 Casa Milla>

카사 밀라는 카사 바트요의 명성으로 샘이 난 직물 업자 ‘밀라 이 캄프스’가 의뢰한 집이다. 카사 바트요가 바다를 형상화한다면 각진 모서리 하나 없이 건물 전체가 큰 파도처럼 출렁이는 바위산을 형상화 한 카사 밀라는 1층은 상점, 2층은 밀라의 집, 3-6층은 부자들에게 세를 주었고 7-8층은 하인들이 머물 수 있게 설계한 집이다. 창고와 지하 주차장까지 갖춘 카사 밀라는 그 당시 엘리베이터와 인터폰, 24시간 온수 시스템을 갖춘 최첨단 건물이었다. 높은 건물 탓에 부자들을 위한 엘리베이터, 7-8층에 머무는 하인들을 위한 인터폰까지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쓴 가우디의 카사 밀라는 카사 바트요와 마찬가지로 개미집, 벌집, 채석장이라는 별명으로 또다시 놀림을 당했다. 육중한 철재 물이 발코니를 감싸고 있는데 마치 바다 위에 얹힌 해초를 표현한다. 철을 다뤘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가우디도 철을 자유자재로 다뤘기에 곡선이 가득 담긴 발코니 디자인을 만들어 냈다.

흰색 돌로 지어진 건물, 그리고 그 표면이 울퉁불퉁하다는 점 때문에 ‘라 페드리라(채석장)’라고 지금까지도 불리고 울퉁불퉁한 외벽과 개미집, 벌집처럼 구멍이 뚫린 듯한 창문은 놀림거리의 대상이었기에 명예를 중시하던 부자들이 건물에 입주를 하지 않아 밀라는 큰 손해를 입었다.

더불어 건물은 건축법 위반으로 건설 비용의 1/4을 내야 하는 상황까지 이르자 밀라는 가우디에게 크게 따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밀라는 6층 벽에 있는 장미와 알파벳 ‘m’을 발견하게 된다. 밀라는 본인 이름의 ‘m’을 의미하는 줄 알고 가우디의 이런 섬세한 디자인에 감탄하여 다시 잘해보자고 연락을 하지만 종교에 독실했던 가우디는 버럭 화를 내며 ‘성모마리아의 ’m’임을 강조했다고 한다. 결국 밀라는 가우디에게 소송을 걸었지만 밀라가 가우디에게 인건비와 설계비를 주지 않은 것이 드러나 가우디가 승소하게 된다. 밀라의 막대한 대출금에 결국 카사 밀라는 은행에 압류 당했고 지금까지도 은행 소유가 되었다.

투구를 쓴 기사의 얼굴처럼 보이는 카사 밀라 옥상의 화기탑은 실제로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에 영감을 주었으며 이 건물 역시나 직선은 오로지 집안 바닥에만 있을 뿐, 모든 선이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디자인을 연출해 지금까지도 많은 관람객에게 자연과 곡선이 어우러진 건물의 형상을 선사한다. 여담으로 현재 이 건물에는 어느 할머니가 종신계약으로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할머니는 이곳에 살면서 SNS에 카사 밀라 내부 사진을 개시하고 책을 써서 출판하는 등 가우디의 명성에 힘입어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고 한다.
이 두 건물을 포함해 가우디의 7작품이 현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가우디와 시멘트 사업 부자인 구엘이 함께 구성한 주택단지와 공원, 완공이 되기까지를 함께 지켜보며 완공을 전 세계 관광객들이 기다리고 있는 사그리다 파밀리아 성당, 그리고 이 성당에서 생활하며 건축에 전념하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된 가우디의 마지막 이야기까지, 이곳에 담긴 스토리는 이번 글에 담긴 카사 이야기 보다 더욱 흥미롭다. ‘자연은 신이 만든 건축이며, 인간의 건축은 그것을 배워야 한다.’라는 말을 남긴 가우디의 말처럼 자연의 것들이 가득 담긴 가우디의 건축물들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언제든, 햇빛이 강한 시내를 걷다 보면 만날 수 있다.
(바르셀로나와 가우디의 나머지 이야기는 다음 연재에서 계속됩니다.)
사진 일부 출처 : https://www.obonparis.com/ko/magazine/gaudi-architecture-best-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