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부터 가을까지 너무나도 날씨가 좋았던 독일은 겨울이 되자마자 해는 일찍 지고 비와 눈으로 가득 한 도시가 되었다. 모든 부분에서 정확하고 규율을 중시하는 이 나라에 온 지 반년이 지났고 정확한 이들의 삶에서 나만의 규칙을 만들어내며 예술의 도시 독일에서 살고 있다. 처음에는 이렇게나 규칙을 잘 지키는데 어떻게 문화와 예술이 각광받고 사랑받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들은 예술에서도, 휴식에서도 내가 알지 못하는 규율을 만들며 그들만의 견고한 예술 형태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여기서 오는 예술의 아름다움이 독일이 추구하는 예술의 방향성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독일 남서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에 위치하며 서쪽으론 라인강이 흐르고 프랑스 알자스 지역과 인접해 있는 칼스루에(Karlsruhe)가 바로 규율과 예술이 공존하는 대표적인 도시다. 바덴주의 영주였던 카를 빌헬름 후작의 이름인 ‘카를’과 휴식, 평화를 뜻하는 독일어 루에(Ruhe)가 합쳐진 칼스루에는 바로크 양식의 궁전과 탑을 중심으로 도로와 녹지가 부채꼴로 펼쳐진 모양을 하고 있다. 궁전은 박물관으로 각종 유물을 전시하고 있고 궁전 앞 광장은 도심의 휴식공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운동을 하고 책을 읽는다. 궁전 우측에는 독일 연방 헌법재판소와 연방 대법원이 위치해 규율성과 예술성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워싱턴은 칼스루에의 도시 형태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을 만큼 건축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겐 꼭 방문해야 하는 도시로 알려져 있다.

칼스루에에 방문하는 여행객들의 필수 코스인 ZKM(Zentrum für Kunst und Medien, 예술과 미디어 센터)은 세계 최고의 미디어 아트센터로 원래 이곳은 세계 1, 2차 전쟁 때까지 화약 등을 제조하던 무기 공장이었고 전쟁 후에는 제철소로 사용되다가 1970년 문을 닫으면서 흉물로 남겨졌으나 철거 대신 보존의 의미를 둬 예술과 기술을 기반으로 한 미디어 아트 센터로 재탄생 되었다. 이곳은 ZKM과 현대 미술 박물관(Die Städtische Galerie Karlsruhe), 조형예술대학(Hochschüle für Gsetaltung)으로 이루어져 있어 전시관과 예술대학은 하나의 통로로 연결된다.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ZKM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공간이며 예술 활동에 귀감이 되는 공간이다.

Die Städtische Galerie Karlsruhe
투박하게 그지없는 직육면체 공간의 중심은 천장까지 뻥 뚫려있고 테두리에는 그저 검은색의 난간들과 흰색의 구조물이 전부이지만 미니멀한 공간 구성은 오히려 작품에 진실성을 부여하고 작품에 대한 깊은 몰입감을 제공한다. 코로나 이전에는 가운데의 뻥 뚫린 공간에서 많은 예술 공연도 이뤄졌을 만큼 이곳은 칼스루에에서 가장 사랑받는 복합 예술 공간이 아닐까 싶다. 미디어 아트의 집합소인 이곳은 전시관뿐만 아니라 작업장과 연구실, 미디어 라이브러리 등 다양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어, 미디어 아트 분야의 전시뿐만 아니라 작업 및 연구, 보존을 목적으로도 사용된다. 특히 박물관 내에 헤르츠 연구소 같은 자체 연구기관에선 AR, VR, 인공지능 등을 활용한 미디어 아트를 연구한다.

Verena Friedrich “The Long Now”
2019년도에는 백남준아트센터가 공동 기획한 국제 교류 프로젝트 <현재의 가장자리>전이 이곳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진행한 세 개의 방 프로젝트 전시의 마지막 순회전시였다. 이 프로젝트는 한국, 중국, 독일의 세 미디어 아트 기관이 각국 젊은 세대의 미디어 작가를 공동 선정하여 각 기관에서의 전시, 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작가를 전 세계 미술계에 소개하고 지원하는 프로젝트다. 추천 및 심사의 과정을 통해 한국의 김희천 작가, 중국의 양지안 작가, 독일의 베레나 프리드리히 작가가 선정되었고 이들은 오늘날 모두가 관심을 두고 있는 현대 기술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논의와 더불어 이러한 기술이 젊은 세대 미디어 작가들의 작품에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를 조명했다. 전시 소개말에 따르면 전시에 소개된 작품들은 기술 매체가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가 점점 더 모호해지고 있는 현대 사회에 대한 새로운 관점들을 제시했다.
한국에선 유네스코 미디어아트 창의도시로 선정된 광주시립미술관과 ZKM이 공동 주최, 공동 제작으로 ZKM 미디어아트센터의 소장 작품 약 100점과 1960년대 초창기 미디어 작품부터 현재까지 미디어아트 역사에 방점을 찍은 주요 작품들을 통해 미디어아트 60년사를 정리하는 전시를 선보인다. 사진, 영화, 축음기, 라디오, 텔레비전, 비디오, 컴퓨터, 인터넷 등은 예술의 이미지를 완전히 바꿨다. 기계의 도입과 산업혁명으로 시간과 동작이 담긴 동영상 형태의 예술이 등장하면서 미디어 아트는 관객의 참여와 상호작용을 이끌어냈다. 이러한 역사를 담은 [미래의 역사 쓰기 : ZKM 베스트 컬렉션] 전은 미디어 아트 작품의 생산, 수용, 유통과 관련해 변화하는 기술에 직면한 미술의 모습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2021.12.17. ~ 2022.04.03.) https://zkm.de/de

칼스루에의 대표적인 미디어 박물관인 ZKM은 독일의 헌법재판소 근처에 자리하며 규율과 정확함을 중시하는 독일의 예술성을 가장 잘 보여준다. 누군가는 독일의 문화를 지루하다고, 답답하다고 느끼지만 이러한 정확성 덕에 미디어 예술이나 공학 등이 뛰어나게 발전한 게 아닐까 싶다. 우리와 뗄 수 없는 미디어의 세계는 예술분야에서도 무한한 확장을 보여주며 우리의 삶에 녹아들어있다. 한국 코엑스 LED 전광판에서도 <아나모픽 일루전 아트 방식>으로 구현된 ‘파도’가 상영되며 코로나로 지친 사람들의 마음에 파동을 일으켰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삶에 녹아들고 있는 미디어 아트는 전시장이라는 국한된 공간에서 벗어나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매력을 주고 특히나 MZ 세대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발전하는 기술 속에서 앞으로 어떤 미디어 아트가 우리 마음에 더 큰 파동을 일으킬지 기대된다.